166화 내부자들(1)
경상남도 의령군 인근, SA그룹 임씨 집안의 선산이 있는 이곳.
이제는 고인이 된 임계현 회장. 그의 장례는 이곳 돌산 중턱에서 황량하게 마무리되었다.
“아버지….”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1월의 끝자락. 추위가 눈물마저 앗아간 것인지, 임재호 부회장의 충혈된 벌건 눈에는 그저 메마른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
“날씨가 찹니다, 부회장님. 이만 내려가심이 어떠신지요.”
임재호 부회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건네는 고(故) 임계현 회장의 직속 비서실장.
그러나 막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에게, 그런 추위 따위는 일절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생 채워지지 못한 공허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우선일 뿐.
“되었다. 다들 먼저 물러가 있도록. 잠시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하니.”
“…알겠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술잔 가득 채워지는 소주.
재계의 거목(巨木) 소리를 들었던 자였으나, 유독 술 취향만은 소박했던 고(故) 임계현 회장.
황망한 표정의 임재호 부회장은 아직 잔디 뗏장도 제대로 묻지 않은 무덤 위에 술을 흩뿌리며 말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생각이 무엇이셨는지. 제가 어떤 일을 해 나가야 할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못난 자신.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핏줄조차 아닌 자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했음을 생각할 때면, 임재호 부회장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원망과 서운함. 그리고 자괴감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채로.
“차라리 제가 미워서 그러신 거라면… 말씀이라도 좀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기 전에.”
투둑, 투둑.
임재호 부회장의 독백에 화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한두 방울씩 쏟아지기 시작한 빗물.
진눈깨비에 가까운 차디찬 겨울비가 매섭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서 우산을 들고 다가오는 비서실장.
“부회장님! 내려가셔야 합니다!”
“물러나 있으라니까, 왜 다시 올라오고 그러나? 이깟 비쯤이야 조금 맞아도 괜찮네.”
“비도 비지만… 지금 미국 쪽에 일이 터졌습니다! J-Coco의 딕 존슨이 갑자기…!”
점점 거세게 몰아치는 빗줄기.
바람 소리에 섞여 웅얼거리는 비서실장의 설명을 들으며, 임재호 부회장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무언가 해탈한 듯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한 표정으로.
“설마… 이것까지 생각하셔서 그러셨던 겁니까? 마지막까지 한서준이 그놈과 따로 만나셨던 이유가?”
* * * *
가난한 집 장남의 유학 성공기.
J-Coco의 CEO 비서 자리에 있는 박철수의 인생 스토리를 축약하자면 아마 이런 문구가 나올 것이다.
장학금으로 견딘 고된 유학 생활과 뒤이은 실리콘밸리 취업까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뒤따라온 여동생까지 보듬은 그는, 이민자 사회의 귀감이 되곤 했다.
어디까지나 수면 위 겉보기만으로는.
“쓰레기 같은 놈! 아직도 일 처리가 늦으면 뭘 어쩌자는 거냐!”
퍽, 단단한 구둣발이 박철수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그의 앞에서 성질을 내는 딕 존슨.
“특허권 문제는 법적인 부분에 문제가 많아서… 아무래도 은폐가 쉽지 않습니다.”
“증거 서류 파쇄는 네놈의 그 띨띨한 머릿속에서 떠오를 생각이 없었나! 나중에 증거로 쓰지도 못하게 죄다 없애버려!”
회사 매각을 앞두고, 혹여나 개발자들이 특허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까, 날이 잔뜩 선 딕 존슨.
자신을 집어삼킬 만큼 압도적인 욕망에 휩싸인 그는, 자신이 지시하는 일의 위험성조차 망각한 모양이었다. 이미 거액의 매각 금액에 뒤집힌 눈이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버러지 같은 옐로 몽키! 영주권을 준다고 해도 뭣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쓰레기!”
평소처럼 박철수에게 감정을 배설하고는 집무실 바깥으로 나간 딕 존슨.
또다시 혼자 덩그러니 방 안에 남은 박철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후우, 성질하고는… 그나저나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주눅이 들어 처진 어깨. 그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딕 존슨의 지시대로 한다면, 나중에 자신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도 홀로 뒤집어쓸 수 있고.
그렇다고 그의 지시대로 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 쫓겨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아예 상무부나 경찰에 신고한다면….”
고개를 가로젓는 박철수.
한번 내부고발자로 찍힌 인원을 받아주는 회사는 좀처럼 없다. 적어도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하아…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지갑을 꺼내어 안쪽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박철수. 그의 시선은 이제 막 대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의 얼굴을 향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막한 상황. 앞뒤가 꽉 막힌 공간에 갇혀 숨을 쉴 수도 없을 것만 같던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바지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르는 번호였지만… 010으로 시작하는 한국 번호였다.
“한국…? 일단 받아볼까? 네, 여보세요.”
-박철수 씨? J-Coco에서 CEO 비서로 계시는?
철컹, 가슴이 내려앉는 박철수.
분명 목소리만 들어서는 남자치고는 약간 앳되다고까지도 할 수 있었으나, 신상정보를 안다는 것에 그는 괜한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누구십니까? 혹시 수사기관이나 그쪽 분이시라면 저는 아는 것이 없어서….”
-아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수사기관이라면 학을 떼던 사람이라서요.
한국 검찰 중에 이상한 여자 검사 하나가 있다는 말을 덧붙인 의문의 목소리.
박은지 검사인가 하는 이상한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는, 정신이 좀 든 것인지 다시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건지? 그리고 누구신지?”
-아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진지함으로 낮게 변한, 조금 가다듬은 목소리로.
-탄약그룹 회장 한서준이라고 합니다. 제가… 박철수 씨를 좀 도와드릴까 하는데, 이따가 뵐 수 있을까요?
* * * *
미국 실리콘밸리 인근, 금문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저번 출장 때 김원철 아저씨와 함께 왔던 이곳 햄버거는 다시 먹어도 기가 막히는 맛이었다.
물론 오늘 이 자리엔 쓸데없이 입맛만 까다로운 중년 아저씨는 없다.
조금 주눅이 든 채,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한국계 이민자 박철수 씨가 있을 뿐.
“전화 드렸던 한서준입니다.”
“아… 박철수입니다. 그런데….”
나를 힐끗힐끗 곁눈질하는 박철수 씨. 그는 조심스럽게 내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실례지만 정말 탄약그룹의 회장님이 맞으신 건지…?”
“아아, 이해합니다. 제가 나이가 적다 보니 종종 받는 오해이지요.”
나는 주섬주섬 서류 가방에서 잡지 하나를 꺼내었다.
급하게 출국하느라 정비 중인 전용기를 이용할 수 없어 탔던 일반 항공사. 그 좌석 앞자리에 꽂혀 있던 여성용 잡지였다.
가지고 갈 때는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조금, 아니 굉장히 부끄럽습니다만. 일단 증거로 보여드릴 마땅한 것이 이 정도겠네요.”
-[주간 주부들] 특집! 탄약그룹 회장의 열애설! 한서준 회장의 안방을 꿰찰 여자는 과연 누구인지 ‘주간 주부들’이 집중탐사해 보았다!
“…일단 맞긴 한 것 같습니다만.”
“이것 참 민망하네요. 여하튼, 제가 여기까지 날아온 건 도움을 드리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딕 존슨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해야 할까요.”
망측한 잡지를 넘기던 도중, 눈이 휘둥그레지는 박철수 씨.
당황했는지 그는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상… 상황을 아시는 겁니까? 어, 어, 어떻게?”
“대기업 회장쯤 된다면 이래저래 정보가 많습니다. 평소 갑질을 당하시는 것부터, 영주권으로 목줄이 잡혀 사시는 것, 그리고.”
상황을 알고말고.
그러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고작 조력자 한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회장씩이나 된 사람이 움직이는가 싶겠지만… 그는 이번 사태를 해결할 결정적인 키맨(Key man)이니까.
“J-Coco의 특허권 정리 때문에 골치가 아프시다는 것까지.”
“……!”
“하나 더 있네요. 그거 뒤집어쓰시고 미국 감옥에 가실 것도 추가하겠습니다. 영주권 없이도 평생 살 수 있는.”
그제야 체감이 와닿는 것인지 고개를 떨군 채 고민하는 박철수 씨. 나는 그의 떨리는 손을 잡고서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민하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다만.”
“다만…?”
“한 가지, 딱 한 가지만 박철수 씨께서 제게 협조해 주셔야만 일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어떤 협조를 말씀하시는지…?”
이제야 움직일 준비가 되어 보이는 키맨(Key man). 절대적 약자였던 그의 등에 내가 내린 실이 하나둘씩 매달렸다.
“미국 상무부 장관, 양 웬리. 박철수 씨께서 그분 얼굴에 금칠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 * * *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 장관 집무실.
검은색 상아에 음각으로 조각된 책상 위 명패에는, 조금 특이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상무부 장관 양 웬리
백인 위주의, 간혹 흑인이나 히스패닉 몇몇만이 보여주기식으로 있는 미국 정계에서 동양인으로서 장관까지 올라온 양 웬리.
중국계 핏줄을 탔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오른 그는, 오늘도 어디선가 걸려 온 회유 전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관님, 그러지 마시고 따로 만나서 이야기나 좀 나눠보심이….
“아니, 안 합니다. 그깟 돈다발 따위 받을 생각 없으니 다시는 전화하지 마시오!”
쾅, 거칠게 전화기를 내던지는 양 웬리. 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칼 아래, 노기로 붉어진 얼굴의 그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 물며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무슨 민족이니 혈통이니 말 같잖은 타령이나 하더니만, 결국 돈으로 매수하지 못해 안달이 났군.”
<상하이 캐피탈>이라고 했던가, 라는 말을 덧붙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양 웬리.
이제껏 중국계라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눈총과 의심을 이겨내는 데에 평생을 바쳤던 그였다. 그렇게 미합중국의 충복으로 살아왔건만, 이런 전화 한 번에 자꾸 정치적으로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빈번하게 몰리기 일쑤였고.
막대기를 꾹꾹 눌러 파이프 담배를 끄는 양 웬리.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그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개 같구먼. 또 중간선거에서 상대편 공격이 들어오게 생겼군.”
숱하게 절벽 끝에 몰리던 양 웬리. 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무언가 적당한 사건 하나가 터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건으로 하여금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내 충심을 입증할 만한 건수로 무엇이 적당한가, 이것이 문제인데….”
고민하는 양 웬리.
분명 전화 통화 기록이 남았기에, 이대로라면 상대 계파의 탄핵이 들어오기 십상인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을 뒤집어줄 무언가는, 소리 소문 없이 그에게 홀연히 다가왔다.
저 멀리 태평양 너머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장관님? 전화 통화 요청이 있습니다만.”
“또 중국인가? <상하이 캐피탈>이든 다른 놈들이든 안 받는다고 하게!”
“아, 중국이 아니라… 한국입니다. 탄약그룹의 서준 한 회장이 장관님께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