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67화 (167/300)

167화 내부자들(2)

양 웬리 미국 상무부 장관.

어딘가 익숙한 이름의 이 남자는 딱 적당한 지위와 적당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충성심을 의심받는 중국계 미국인. 타 계파로부터 쏟아지는 견제. 그러나, 자신의 능력만으로 일개 부처의 장관이라는 위치까지 올라온 성과.

성큼성큼 다가오는 미·중 패권전쟁을 앞에 둔 그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위기의 비바람을 피하기 적당한 쇼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내가 감독과 연출을 도맡은, 실리콘밸리라는 배경에서 펼쳐지는 쇼를.

“한서준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양 웬리요. 뭐, 본론부터 꺼내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앞서 당부 하나를 하고 싶군.”

워싱턴 D. C 인근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진 이번 만남. 테이블 위에 놓인 적포도주로 목을 축인 이 반백의 사내는, 그저 가만히 나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치 나라는 사람이 가진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기라도 하듯이.

“고위 정치인에게 시간은 곧 금이나 다름없지. 당신네 기업가들이 좋아 죽는 황금 말이요.”

“백번 이해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까지.”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러니…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겠소. 만약 이번 대화에서 영 시원찮은 이야기만 나온다면.”

그의 날카로운 인상은 그저 타고난 외모 탓은 아닌 모양이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입안 가득 넣고는 거칠게 씹어대는 양 웬리.

잔뜩 가시 돋친 말투로, 그는 집고 있던 포크로 나를 가리키며 그르렁거렸다.

“그쪽, 탄약그룹이라 했던가? 앞으로 내 장관 임기 동안 미국 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 어떤 수익 창출도, 절대로.”

확실히… 조사했던 그대로였다.

서희 누나의 인맥 정보가 담긴 USB, 그 모든 내용을 샅샅이 훑어 찾아낸 힌트.

핏줄은 중국계일지언정, 그 안은 뼛속까지 미국인인, 그러면서 동시에 주류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양 웬리.

그의 가시 돋친 듯한 언행은 내게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 지금 정치적으로 상당히 몰려 있다고. 그리고… 그 절벽 끄트머리에서 내가 손을 내민다면, 분명 내가 원하는 것 또한 얻을 수 있다고.

“고위 정치인에게 시간이 금이라는 것은… 그만큼 자리에 계신 기간에만 힘이 나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렇기에, 그의 날 선 협박에도 불구하고 무심히 내던질 수 있는 말 한마디.

“지금 장관님께서는 중간선거가 끝나는 대로 자리에서 내려오실 위기일 텐데요?”

“뭐라…?”

“그렇다면, 그다음 이어질 장관님의 시간은 흔해 빠지고 무가치한 것이 될 겁니다. 그저 평범한 범인(凡人)의 시간처럼.”

“어찌 그런 말을…!”

양 웬리 장관이 화를 내려는 순간, 오른손을 들어 올린 나.

잠시 일부러 불러일으킨 침묵.

서로가 서로의 눈을 응시한 채, 가만히 노려보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가볍게 목을 축인 내가 이어지는 말을 꺼냈기에.

“저는 장관님의 시간이 앞으로도 귀했으면 합니다. 다음, 그다음 더 높은 곳으로 가실수록 더더욱.”

“…말은 청산유수로군.”

딸그락, 백색의 도자기 접시 위에 포개진 은제 포크와 나이프. 웨이터에게 잠시 서빙을 멈추라는 의사를 표시한 양 웬리 장관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들어나 봅시다. 날 만나려 했던 용건을.”

불쾌감과 공존하는 묘한 기대감.

팔짱 낀 그의 모습에서는 그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저 걸어 잠근 빗장 같은 팔이 다시 풀어지리라는 것쯤은 이미 충분히 확신하고 있지만.

“적당한 판 하나를 짜 보았습니다. 대략적인 스토리로는… 인종차별과 갑질로 인한 불쌍한 동양인 피해자, 그리고 그의 정의감 넘치는 내부고발.”

같은 동양인인 박철수 씨. 그것도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로 포장될 그의 손을 양 웬리 장관이 맞잡는다면, 동정 여론으로 인해 미국 정치판에서 분명 수혜를 볼 터.

그렇다면 오히려 소수자였던 그가 올라설 발판이 생기는 꼴이다.

거기에 더해서.

“그런데 하필이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악의 축이 장관님의 혈통과 연관이 있더군요.”

“……!”

중국. 양 웬리라는 사람이 가진 핏줄의 본류.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발목을 잡힐 만한 것이기도 한 혈통.

씁쓸한 표정의 양 웬리 장관.

그는 새하얀 냅킨으로 찝찝한 입가를 닦아내고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중국… 어쩐지, <상하이 캐피탈> 측이 그래서 그토록 끈질기게 접근하려 들었던 것인가.”

“J-Coco 매각 승인 건이 아래쪽에서 빠르게 해결된 이유이기도 하지요.”

“크흠….”

탄식과 함께 놓인 탁자 위에 놓인 유리잔.

내가 만든 이 쇼의 대략적인 시나리오를 받아 든 그는 목이 타는 듯 연신 찬물을 마셔댈 뿐이었다.

눈으로는 내게 어서 구체적인 시놉시스를 내어오라 말하며.

“그래서 말입니다. 제게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일종의 면도칼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만.”

그리고 나는, 그런 신호 하나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어설픈 사람은 아니었다.

툭, 탁자 위에 올려진 서류 봉투 하나.

“소수 인종인 동양인 피해자를 영웅으로 만든다면, 그리고 장관님의 혈통이라는 족쇄이자 또 잠재적 적국인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막으신다면.”

지시가 내려지는 순간, 곧바로 매스컴에 의해 영웅으로 만들어질, 인종차별과 갑질을 넘어 정의의 사도가 된 박철수 씨라는 우상.

그리고, 그 옆에 서서 목이 터지도록 그를 옹호하는 양 웬리 장관의 모습.

내가 짠 시놉시스를 받아든 그의 얼굴에 진지한 주름이 하나씩 잡히기 시작했다.

“장관님의 미합중국에 대한 충심. 충분히 입증할 만한 판이 짜이지 않겠습니까?”

* * * *

“쓰레기! 철수 박, 그 쓰레기 어디 있나!”

실리콘밸리, J-Coco 본사 건물.

평소처럼 괴성이 난무하는 CEO 집무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중간중간 들려오는 매타작 소리 없이, 오로지 딕 존슨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봐! 노란 구더기 그놈 어디로 사라진 거야?”

“노란 구더기라 하심은… 미스터 박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액의 돈이 오가는 만큼, 그리고 그 사이에 불법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이 끼어있는 만큼, 민감함의 끝을 달리고 있는 그였다.

애꿎은 비서실 여직원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대거리를 하기 시작한 딕 존슨.

“이 회사에 구더기가 그놈 말고 더 있나? 쓸데없이 되묻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대답이나 해!”

“네…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괜히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어깨를 움츠리는 여직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전산을 확인한 그녀가 딕 존슨에게 대답했다.

“어디 보자… 오늘 하루 병가 쓰신다고 이른 새벽에 전산에 등록하셨네요.”

“뭐라고? 하! 기가 차는군! 그놈 이거 완전 정신병자 아니야!”

쾅, 홧김에 찬 발길질로 저 멀리 날아가는 쓰레기통.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딕 존슨은 손에 잡히는 것을 던져대며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분출해 내었다.

“SA그룹에 매각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멍청한 놈이 특허권 하나 똑바로 조정 못 하고 몸뚱이나 고장 났답시고 병가를 써!”

겁에 질린 여직원.

평소 박철수가 오롯이 저 화를 감당했기에 그저 곁에서 동정의 눈빛을 보내기만 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막상 자신에게 재앙이 닥치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었다.

“네년은 지금 뭘 쳐다보고 있나! 당장 꺼져!”

“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한참을 씩씩대던 딕 존슨.

조금 흥분이 식은 듯 소파에 걸터앉은 그는 습관처럼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후우, 머리나 좀 식혀야겠군.”

그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늘 보던 F1 자동차 경기. 미친 듯한 속도로 빠른 트랙을 달리는 자동차 경주를 본다면, 늘 그렇듯 끓어넘치려는 분노도 가라앉으리라.

물론 F1 자동차 경기 채널을 켜기 이전, 다른 곳에 눈이 팔리지 않는다면.

“뭐, 뭐야… 저건? 옐로우 몽키가 왜 저기 있지?”

TV를 켜자마자 나오는 긴급 뉴스. 방금까지 그토록 목이 터지게 찾아다니던 박철수. 그는 상무부 장관과 함께 화면 중앙에서 무어라 연설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 박. J-Coco 내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폭로하셨는데요. 앞서 말씀하셨던 인종차별과 갑질, 폭행 외에도 중대한 범법행위가 있었다고요?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박철수가 알고 있는, J-Coco의 중대한 범법행위라면, 지금 딕 존슨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것’뿐이니까.

-특허권. J-Coco의 기술 특허는 개발자에게도 지분이 있습니다만, 회사 매각을 위해 관련 서류를 조작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아… 안돼. 철수 박, 저 겁쟁이 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미친 짓을…!”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어대며 절규하는 딕 존슨.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어차지 않을 때쯤, 갑자기 화면 속에서 상무부 장관이 마이크를 쥐고 앞으로 나왔다.

“양 웬리 상무부 장관? 저 양반이 어째서…?”

-상무부 장관 양 웬리입니다. 여기 미스터 박의 내부고발을 진지하게 검토한 상무부 특별조사위는 다음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 그리고 하필 이럴 때만 틀리지 않는 슬픈 예감.

양 웬리 장관이 입을 열자, 그것은 곧바로 현실이 되어 딕 존슨에게 다가왔다.

-J-Coco의 매각 과정에 있어 중국계 자금이 배후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전략물자 수출통제 위원회의 승인 과정에 비리가 있었다는 것. 따라서.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잘 짜인 하나의 연극판.

마침내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공연의 중앙에서, 미리 건네받은 각본대로 양 웬리 장관은 배역에 맞는 대사를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해당 승인을 전면 취소하고, J-Coco의 CEO 딕 존슨을 연방 검찰에 고소 조치토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 * * *

경상남도 의령군, SA그룹 임씨 집안의 선산.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가는 임재호 부회장. 그의 옆에 붙은 비서실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임재호 부회장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번 일을 통해 입지를 다지려는 모양입니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좀 더 알아봐야 합니다만.”

“알아볼 게 뭐 더 있겠나. 뻔한 일이지.”

“예?”

“전형적인 한서준 그놈 스타일 아니던가. 딕 존슨은 놈이 짜놓은 거미줄에 걸린 것이다.”

옴짝달싹 못 하게 날개가 묶인 딕 존슨. 문제는 그 날개를 잡은 손 가운데 SA그룹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 또한 같이 걸려 버린 것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임재호 부회장.

어느새 짓궂게도 내리던 비는 멈추어 환히 갠 하늘만이 눈에 담기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비서로부터 들려오는 급보.

“부회장님,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 쪽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합니다. 회장 본인이 이 근처에 왔다고….”

“후우, 그렇겠지. 역시나 그런 것이었겠지.”

짤막한 한숨을 내쉬는 임재호 부회장. 뒤를 돌아본 그는 제 아버지의 무덤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뜻 모를 독백을 쓸쓸하게 내뱉으며.

“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왜 한서준 그놈과 이야기를 나누셔야 했는지…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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