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내부자들(3)
“바로 만나주실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임재호 부회장의 얼굴은 퀭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깊은 골이 패어 있었다.
노여움이나 두려움 따위가 아닌, 그저 모든 힘이 빠진 채 탈진한 상태로 체념한 자의 모습.
막 49재를 마친 모양인 듯, 검은색 상복 차림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대답했다.
“…올라가지. 인사는 드려야 할 테니.”
돌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황량한 선산. 중간중간 듬성듬성 난 수풀길을 지나 소나무가 가린 곳을 넘어가니, 그곳에는 둥근 묘지 하나가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고(故) 임계현 회장. 한국 재계의 별이 눈을 감고 편히 잠든 곳이었다.
“…….”
나는 미리 가지고 온 소주를 아직 잔디 싹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묘지 위에 흩뿌렸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표하는 동안 흐르는 어색한 기류. 쌀쌀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칠 때쯤, 고개를 든 나는 손바닥으로 비석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작고하신 임계현 회장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신의가 두터워 보이는군. 분명… 몇 번 만나 뵙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지.”
겉으로 내뱉은, 어쩌면 다소 비꼬는 것으로 의식할 수도 있는 임재호 부회장의 대답.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의 말에는 그 어떤 잔가시도 돋쳐 있지 않았다.
오로지 씁쓸한 회한만이 잔향처럼 입가를 맴돌고 있을 뿐.
“뭐, 상관없겠군. 만남의 빈도가 얼마나 잦은가보다,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가 더 중요한 법일 테니.”
“임종 당시 임 부회장님이 아닌, 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이제는 전부 지나간 일이다. 그것보다.”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는 임재호 부회장.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꺼내야 할 이야기를 꾹꾹 적어 넣듯 말하기 시작했다.
“J-Coco에 이어 SA그룹까지 목을 매달 셈인가? 미국 상무부 장관의 칼을 빌려서?”
“제가 기획한 쇼는 잘 보셨는지요.”
“단번에 알겠더군, 누구 작품인지 말이다. 서윤지 그년 때에 이어서, 두 번째로 사냥감이 되어 구석에 몰리게 된 일이니.”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J-Coco의 고위직 임원들을 구속에 이르게 한 미국 상무부 장관 양 웬리.
그는 자금의 뒷배인 <상하이 캐피탈>과 중국 정부에 각을 세워, 혈통의 한계를 넘고자 눈이 벌게져 있었다.
함께 연루된 SA그룹 따위야 언제든지 숨통을 조를 수 있을 만큼.
“원래라면… 목을 매달았을 겁니다. 어쩌면 SA그룹도 예전 철화그룹처럼 이리저리 쪼개졌을 수도 있지요.”
“……!”
아버지가 물려준 왕국이 하루아침에 붕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진심으로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문이 막힌 임재호 부회장.
자신의 무능력함이 만들어낸 한계, 그 한계로 인한 파국.
그리고 나는… 그 파국을 불러일으킬 방아쇠에 손가락 하나를 걸치고 있는 상황.
그러나.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만은 약속드리지요.”
“어째서지…? 네놈은… 아니, 한서준 회장 당신은 내게 좋은 감정이 일절 없을 텐데?”
조금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 무덤.
이미 향이 다 타버려 회색 재만 무성한 황동제 향로 위에 나는 긴 녹색의 장례용 향을 꼽고 불을 붙였다.
마치… 하늘 위에서 이 모습을 꼭 눈에 담으라는 것처럼.
“이래저래 약속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이곳, 바로 앞에 계신 분하고요.”
“그게 무슨…?”
“뭐, 자세한 각론은 지금부터 이분께서 맡으실 겁니다.”
바스락, 눈 덮인 낙엽 밟는 구둣발 소리. 고개를 돌린 임재호 부회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 서렸다.
“최 변호사님…?”
“오래간만이에요, 임 부회장님. 뭐… 당혹스러우시겠지만, 일단 상황이 이리되었다는 것 이해해 주길 바라요.”
고(故) 임계현 회장의 전속 변호사인 중년 여성.
서로 안면이 있던 모양인지 임재호 부회장과 인사말을 나누던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고(故) 임계현 회장님의 마지막 유언 집행을.”
* * * *
그날. 고(故) 임계현 회장의 마지막 생명이 다하던 때, 재계의 거목(巨木)이 내게 던졌던 딜.
‘내 SA그룹이라는 고깃덩어리에 미리 누린내를 좀 입힐까 하네. 자네 같은 포식자가 굳이 입맛을 다시지 않게끔.’
병상에 누운 임계현 회장은 피를 토해가며…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탄약그룹에 모든 첨단 IT 사업 부문을 넘길 테니, 백색가전 부문을 전부 자신의 못난 아들에게 맞교환해 달라고.
비록 호부견자(虎父犬子)인 아들이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하려던 계책.
그리고 지금, 그의 마지막 유언을 접한 임재호 부회장은 무덤가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소용돌이치는 괴로운 감정.
분명… 그 또한 알고 있겠지. 그리고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아버지가 이룬 모든 것을 받아먹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고인의 유언 집행을 계속하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계속하시지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저 무덤만을 바라보며 힘없이 변호사에게 대답하는 임재호 부회장.
내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자, 최 변호사는 묵묵히 계속해서 서류를 읽어나갔다.
“탄약그룹과 SA그룹의 각 사업부를 교환하는 것에 더해, SA그룹은 탄약그룹의 다음의 계열사를 추가로 매각한다.”
“잠시만요, 변호사님.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회장님?”
최 변호사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간 나. 유언 집행 절차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이 말만은 직접 하고 싶었다.
비록 패배자처럼 이 자리에 선 임재호 부회장이지만, 남아 있는 SA그룹의 주인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는 싶었기에.
“어떤 계열사를 매수할 것인지,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임 회장님께서 돌아가시던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결정을 내렸을 정도이니까요.”
“…무엇이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하게나. 아버지께서 못난 아들놈을 위해 결정하신 일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한 임재호 부회장.
그렇다면, 나 또한 그에게 똑바로 된 대답을 주어야겠지.
“SA 정밀기기.”
“정밀기기? 어째서 그런 선택을…?”
SA 정밀기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임재호 부회장.
그도 그럴 것이, SA 그룹 중에서 알짜라고 불리는 건 배터리나 화학 쪽이었으니 말이다.
로봇 팔을 전문적으로 생산하지만, 애매하다는 평가를 받는 중하위권 계열사인 SA 정밀기기. 임재호 부회장의 얼굴에는 곧바로 복잡한 감정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결코, 값싼 동정도 승리에 따른 기만도 아닌 합리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니.”
“음…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이긴 하네만.”
“굳이 힌트를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이제 막 두 번째 달이 저물어가는 2011년.
다사다난했던 이번 해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를 강타할 큰 재난이 불어닥칠 것이다.
단순히 사고가 발생한 한 지역을 넘어, 태평양을 끼고 있는 모든 이들이 고통받게 될 재난이.
“조만간… SA 정밀기기가 가진 기술이 세상을 구할 일이 있을 테니까요. 동쪽 바다 건너의 나라에서.”
* * * *
“나이스 샷! 허허허. 이거, 우리 양 장관님 공이 기가 막힙니다그려.”
“대통령님이야말로 공이 쭉쭉 뻗어가는 것이, 오늘 필드의 판은 다 꿰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서울 인근, 고위층 전용 골프장.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한국을 방문한 양 웬리 미국 상무부 장관.
잔디 위에 놓인 골프공을 쥔 그는 대통령을 바라보며 뼈 있는 말을 건넸다.
“마치 뭐랄까, 실리콘밸리에서 있었던 일처럼 말입니다.”
“에헤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신다.”
손사래를 치는 대통령.
자기 좋으라고 두 기업을 경쟁 붙이기는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영 난감한 결과가 나와 버렸다.
거기에 고(故) 임계현 회장이 갑자기 타계해 버린 탓에 쓸만한 카드 한 장도 손에서 빠져버리고 말았고.
“IT 산업 선두 기업 선정이야 국가에서 사활을 건 프로젝트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있었던 일은 기업 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정부는 모르는 일이에요.”
민망한 거짓말이 목에 메였는지, 헛기침을 하는 대통령. 카트에서 내린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뒷말 하나를 덧붙였다.
“물론, 종국에는 한서준 회장이 승기를 거머쥘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딱! 다시금 들려오는 경쾌한 타격음. 골프채 정중앙에 맞은 공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저 멀리 깃발이 보이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굿 샷!”
이번에는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 제대로 잘 맞은 양 웬리 장관의 공.
유치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이 조금 풀린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던 걸까?
어깨를 으쓱거린 양 웬리 장관. 그는 선심이라도 쓰는 양 대통령에게 대답했다.
“뭐, 이래저래 따지고 보면, 제 쪽에도 이익이 되었으니 딱히 외교적으로 꼬투리를 잡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요. 그나저나. 중국 쪽에서 이번 일로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 있던데?”
“아아, <상하이 캐피탈> 말이군요.”
베이징 정계로부터 발원해 남쪽으로 내려온 피바람.
최근 너무나 많은 실패를 연달아 저지른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질 인물로 낙점되었던 것인지, 그는 모든 직책에서 사임한 채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참 그런 걸 보면… 서준 한 회장, 그 젊은 친구는 생각할수록 기가 찹디다. 돌 하나로 새를 몇 마리를 잡는 것인지.”
피식, 웃음 짓는 양 웬리 장관.
고작 J-Coco라는 돌 하나를 던졌건만, 거기에 맞은 새는 탄약그룹에 막대한 이익을 주고 있는 상황.
특히나 SA그룹으로의 매각이 저지된 J-Coco. 사내의 개발자들과 특허권 이슈를 정리한 J-Coco는, 해당 특허권 지분의 일부를 탄약그룹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회사나 기술의 소유권이 해외에 통째로 넘어가지는 않지만, 그 특허권의 사용은 탄약그룹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그리고 IT 산업 선두 기업으로 선정될 자격을 갖출 수 있을 정도까지의.
그 사실을 떠올리자 고개를 가로젓는 대통령. 그는 이 통제 불가의 젊은 파트너의 또 다른 행보를 기억해냈다.
“워낙 영민하니까 말입니다. 안 그래도 무슨 일을 또 벌이려는 건지 어제 제게 와서 묘한 요청을 하나 하고 가더이다.”
“묘한… 요청이요?”
휘잉, 힘껏 헛스윙을 한 대통령.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던 모습이 퍽 민망했던 건지, 헛기침을 한 그는 재빨리 대화 주제를 옮겼다.
그 주제가 앞으로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채로.
“크흠, 갑자기 일본 외교 특사 사절에 자기를 끼어달라네요? 그쪽 원자력 산업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