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72화 (172/300)

172화 밀려오는 재앙을 막는 법(4)

커피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깜냥이 되는 그릇인지를 품평하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주일대사.

어찌 보면 약간은 무례하다고 볼 수 있는 행위지만 이해는 간다. 애당초 다짜고짜 찾아와 무례를 저지른 것은 내 쪽이 먼저니까.

마침내, 긴 침묵을 깬 그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조금… 이야기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드릴까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예 축객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니.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를 간신히 정리한 주일대사.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조금 외람되지만 사실 제 속마음은 이렇습니다. 상황이고 뭐고 그냥 지금 한 회장님 말씀하신 것을 다 믿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상당히 긍정적인 초록색 신호.

그러나, 콧잔등에 내려앉은 안경을 고쳐 쓴 그의 입에서 뒤이은 말 한마디는 다시 신호등의 색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저는 공직에 몸을 담은 사람입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바가 국익에 일치한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기에, 한 회장님.”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허리를 끊는 주일대사. 외교관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온 이 남자는 내게 간단한 시험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오직 자격 있는 자만이 풀 수 있는 시험문제를.

“혹시 제게 그런 확신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제 대사 임기가 남은 몇 시간 동안이라도?”

째깍째깍,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들리는 벽시계 초침 소리.

어떻게 답하면. 아니, 어떻게 답해야지… 맞는 걸까?

미래에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뻥뻥 터졌다는 것을 무턱대고 지를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소금이나 안 맞는다면 그걸로도 용할 거고.’

아니면, 대통령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마구잡이로 윽박지르기?

그것 또한 그른 선택이다. 이미 추방만으로도 외교관 커리어가 다 날아간 마당에 무슨 인사 협박이 통하게 생겼나.

그렇기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그저 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

“구체적인 내용 자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실망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진 주일대사. 그림자의 무게가 제법 무거웠는지, 그는 고개를 떨구어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다시 조금씩 위쪽을 향하는 주일대사의 고개. 나는 그저 담담하게 내가 처한 상황을 그에게 있는 그대로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한일관계가 지금 상태로 빠그라진다면… 국익뿐만이 아니라 제 이익 또한 같이 적자로 돌아서게 생긴 상황이거든요.”

“……?”

“저는 관료도 정치가도 아니니, 장사치의 언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본 특사단에 끼기 위해서… 저는 회사 하나를 인수했습니다. 생각보다 꽤 비싼 회사를.”

“……!”

신문이나 뉴스에서 본 걸까?

SA 정밀기기 인수 건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한 주일대사의 표정.

어떤 그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머릿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퍼즐 조각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급적이면 내게 긍정적인 방향을 한 조각을.

“그렇기에… 국익과 제 사익이 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양(+)의 상관관계 정도는 있다. 일단은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째깍째깍, 침묵 속에 다시금 울려 퍼지는 벽시계 초침 소리.

그러나, 이번 침묵은 아까와는 달리 그리 길지도, 목 멘 듯 답답하지도 않았다.

주일대사. 이 남자의 나를 향한 모든 신호가 납득이라는 단어의 모습을 띠고 있었으니까. 뒤이은 대답을 포함해서.

“후우… 일단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현 상태에서 그나마 저와 뜻이 비슷하신 분은 한 회장님이 유일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긴 손가락 하나를 내 눈앞에 올려 보인 주일대사.

조금씩 떨리는 그 검지 너머, 닫혔던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처음 말씀하신, 박살 난 한일관계를 딱풀로 붙인다는 것 말입니다만.”

“아, 그건 저도 모르게 어휘 선택이….”

이건 전적으로 김원철 아저씨의 탓이 아닌가 싶다. 남 탓이 아니라, 뭔가 자꾸 이상한 영향이 스멀스멀 물든다고 해야 하나.

내 생각과는 달리, 다행히도 주일대사가 문제 삼은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단어 선택이야 상관없습니다. 다만… 깨진 관계를 붙일 방법은 알긴 합니다만, 열흘 안에는 못 합니다. 몽둥이로 때려죽여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대충 이런 겁니다.”

* * * *

깊은 밤, 이미 어둠이 충분히 내려앉다 못해 새벽 공기가 성큼 다가오고서야 대화는 얼추 갈무리되었다.

주일대사에게 들은 일본 정치판은 복잡다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재 집권 중인 자민당 주류 계파가 힘을 잃고 있다는 점. 그래서 조총련 야쿠자를 뒷배로 한 극우 혐한세력이 벌이는 이 사달을 묵인하다 못해 장려하고 있다는 점까지.

괜히 주일대사가 이를 단시일에 해결하기 어렵다 한 것이 아니었다. 산 넘고 또 산을 넘어도 첩첩산중의 연속이었으니까.

“자민당 주류 계파. 그리고 극우 혐한세력을 연출하는 재일 조선인 야쿠자라… 이쪽 정치판도 참 다이나믹하네요.”

“지금 자민당 주류 계파가 워낙 힘이 달려서요. 이대로라면 아마 총리가 갈릴 기세입니다.”

쉽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저쪽 총리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못해 활활 타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화상 치료에 바를 연고로는, 한일 독도 갈등이라는 유구한 전통의 약재가 제조실에 올라와 있는 상태다.

“판이 큽니다. 그래서 열흘 내로는 도저히 못 한다는 겁니다. 불가능해요.”

“음….”

“개인이 아무리 힘을 쓴들, 곧바로 거대한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처럼요. 여하튼…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상당히 타당하고 솔직담백한 주일대사의 의견.

가뜩이나 일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 신분인 나. 그것도 열흘 남짓한 짧은 시간 내에 이 모든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떠올린 생각 하나.

이거 어쩌면… 먹힐 수도 있지 않을까?

자민당 주류 계파가 극우 혐한세력에 손을 뻗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자를 끌어올 그 방법이.

“대사님, 아까 말씀하셨던 그 수레바퀴 말입니다.”

“네?”

“아무래도… 제가 좀 거꾸로 돌려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좀 도와준다면요.”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지만, 아주 살짝 실밥이 터지지 않을 만큼만 봉합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어차피… 여긴 내 나라도 아니니까 말이다. 조금 금기시되는 것도 과감하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한 회장님? 뭘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일본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서일까?

내가 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미루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갸웃거리는 주일대사.

피식, 가벼운 웃음과 함께 나는 그에게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대사님. 여기 일본에서 대빵이 누굽니까? 제일 높은 사람이요.”

“그야, 내각 총리대신이지요. 갑자기 그건 또 왜 물으시는 건지….”

“아니요, 아니요. 내각 총리대신 위에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건전지 빠진 자동인형처럼 혼자서는 못 움직이는데 서열만큼은 원탑인.”

이제야 눈치를 챈 듯, 경악한 표정을 하는 주일대사.

이 양반, 일본에서 하도 오래 살았더니 생각도 비슷해졌나 보다.

어떻게 그걸 건드릴 생각을 했냐는 듯 창백해지는 표정.

“한 회장님, 지금 말씀하시는 게 혹시…?”

맞다. 그 혹시가 맞다.

입헌군주제의 마스코트.

일왕이니 천황이니, 무슨 명칭으로 부를지 매번 논란이 빈번한 그 영감님네 집안.

평소 현실 정치에는 절대 관여하지 못하는 서열상 일본 대빵은 바로.

“덴노.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일본 황실 쪽에서 도움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 * * *

다시 돌아온 도쿄의 호텔.

이미 특사단 전체는 반쯤 망연자실한 채로 포기 모드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회의실로 쓰자고 정해놨던 스위트룸.

“김 교수님? 이건 또 뭡니까?”

“마! 한서준이 니 어데 갔다 이제 오노! 퍼뜩 와 앉으라! 햄이 느한테 을매나 서운한지 니는 아나, 모르나?”

홍당무처럼 벌게진 얼굴을 한 채, 내게 남자끼리의 감정 교류를 바라는 김 교수.

대충 마주 앉아 술 한 병을 가볍게 대작하고 나니, 이 귀찮은 아저씨는 금방 꿈나라로 나가떨어졌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 크흠, 유세나 보좌관?”

“네, 회장님.”

“일단 제 방으로 가시죠. 여기서는 어떻게 일을 할 만한 환경이 아니니까.”

약간 어색한 기류와 함께 올라간 내 방.

나와 함께 침대에 마주 앉은 유세나 보좌관.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나는 빨리 일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까 주일대사님과 있었던 자리에서 들으셨겠지만, 저는 덴노를, 그게 안 된다면 그쪽 황실 가문을 좀 움직일까 합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제까지 철저하게 현실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직접 누굴 지지하고 이런 건 불가능하겠죠. 다만, 미디어 노출을 통한 간접 효과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일본 황실 인물 목록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일단 덴노는 패스. 그 할아버지는 애초에 나를 만나 주지도 않을 터.

1순위 계승권을 가진 남자 황족들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아마 궁내성 공식 경호원들 선에서 컷일 터.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바로.

“그게 아마, <폭약소년단>… 이었던가?”

“회장님?”

입 밖으로 새어 나온 혼잣말.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적당한 인물 하나가 내 머릿속에 비쳐졌으니까.

회귀 전, 전 세계적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 보이그룹 <폭약소년단>.

어찌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지, 그 당시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노래가 나오자, 수많은 해외 팬들이 한국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심지어는… 일본 공주까지도.

-화제의 연예가 소식! <폭약소년단>을 보러 온 일본의 히나 공주의 모습인데요. 확실히 앳된 모습이 참 예쁘네요.

-히나 공주는 어릴 적부터 검도 선수 출신이라지요? 이거, 이거 악성 스토커 팬들은 긴장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감옥에 있을 때 보았던 <폭약소년단> 관련 예능 프로그램.

분명, 히나 공주는 이 당시 도쿄의 한 검도장에서 매일같이 수련에 힘쓰고 있었다고 했었다.

주위에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유세나 보좌관, 지금 몇 시죠?”

“지금… 새벽 4시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잠깐 같이 눈 좀 붙입시다.”

“네…?”

조금 놀란 듯, 평소와 다른 반응의 유세나 보좌관.

하여간, 이 사람도 어지간히 일 중독이다. 그거 눈 좀 붙이자고 한 걸 가지고 저렇게 놀라다니.

“잠깐 기력 좀 충전하고 바로 아침에 갈 곳이 있습니다.”

“아아… 그런 거였구나. 에휴.”

“유세나 보좌관?”

“아닙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려고요? 눈만 잠깐 붙이시고서.”

이번에는 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한 표정.

아무래도 철야를 각오했는데 조금 실망한 모양이다. 정말이지 열정 하나만큼은 대단한 여자다.

상사로서 유세나 보좌관의 그 열정에 마땅히 응해야 하기에, 나는 최대한 비장한 모습을 하고는 그녀에게 대답을 주었다.

가상의, 보이지 않는 막대기 하나를 집어 세우고서.

“검도, 일본까지 왔는데 검도나 한판 시원하게 하고 가려고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