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LOVE & PEACE(1)
히나 공주와의 끝내주는 첫 만남 후 바로 다음 날. 다시 찾은 검도장.
-딱!
“어어…?”
문을 열자마자 죽도를 쥐고는 내게로 돌진하는 히나 공주.
간신히 막아낸 양 손바닥에는 따가움이 올라왔다.
“어어는 무슨? 막지 마!”
“아니, 누가 때리려고 하면, 당연히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맞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나 해당하는 거고. 한서준 회장, 당신은.”
검은색 검도복을 입은 채로, 내 얼굴을 향해 죽도를 내지르는 히나 공주.
아무래도 아바타 게임의 여파 때문인 듯,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어쩐지 첫인상이 좀 묘하게 얄밉단 말이지. 뒤에서 몰래 조종이나 하고.”
“아니, 제가 무슨.”
“보니까 그전부터 사업할 때 일 처리 하던 방식이 비슷하드만. 암막 뒤에서 혼자 큰 그림 그리는 식의.”
“…….”
암만 망나니 끼가 있다고 해도 일국의 공주는 공주이긴 한가 보다.
고작 하루 만에 나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아본 듯한 히나 공주.
나는 양쪽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리고는, 아직도 나를 향해 뻗어있는 죽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벌써 기본적인 조사는 얼추 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 그 첫인상은 기억에서 좀 지워주시죠.”
“됐고. 대충 조사한 대로라면 말이지, 당신이 나 하나 연예인 데뷔시키는 건 일도 아닌 것은 알고 왔어.”
“이야기가 좀 빨라지겠네요. 좋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깟 연예인 데뷔 따위 탄약그룹의 자금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아니, 아예 어지간한 중대형 기획사 하나를 통으로 인수할 수 있는 정도니까.
“그런데.”
그러나, 히나 공주는 아직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찐빵처럼 양 볼을 부풀리고는 내게 따지기 시작하는 그녀.
“각론이 없잖아, 각론이. 이 사람아.”
“구체적인 각론 말입니까? 데뷔까지의?”
“엉. 번드르르하기만 한 이야기로 사람 희망 고문하는 건 우리 아빠만으로도 충분하걸랑?”
뒤이어 들려오는 덴노 집안 이야기.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딸이 최대한 사고 치지 않게 억제기 역할을 하던 덴노. 축 처진 아버지의 그 슬픈 이야기를 듣고서, 내 마음속에서는 연민의 정이 저절로 샘솟아 나왔다.
“도대체 덴노… 그분은 가정 내에서 어떤 투쟁을 하신 겁니까?”
“흠흠, 남들이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경호원들 빠져 있는 지금이 딱이야. 바로 설명해 줘야겠어.”
떼인 돈을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내게 손을 내미는 히나 공주.
하기야, 이 또한 빚이라면 빚일 터. 그녀와 마주 앉은 나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각론. 물론 있습니다. 그러니까….”
* * * *
이곳에 오기 몇 시간 전,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던 나.
전화번호를 누르기 전까지,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지 참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래도 일국의 공주인데, 아무한테나 맡기고 치우게 된다면 후폭풍이 상당할 테니까.
‘일단 김원철 아저씨는 패스.’
다른 분야라면 모를까, 엔터 분야는 촉수엄금 되시겠다.
이런 쪽으로 희한한 취향이 있는 양반이라, 분명 어디 트로트 기획사 쪽으로 돌릴 것이 눈에 선하다. 애초에 전화벨 소리부터 별 요란맞은 뽕짝이니까.
‘양택수 부회장님은 거의 조선 후기 판소리 세대라 할 수 있겠고. 할머니는….’
전통 중시 끝판왕, 유교걸 할머니는 그런 광대놀음판 따위 무엇이 중요하냐고 호통이나 안 나오면 다행일 터. 엔터 업계를 산업으로 봐주신다면 다행일 거다.
그 외에 다른 다채로운 옵션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영 마땅한 인선은 없었다.
‘흐음… 미셸 사장은 대놓고 공돌이. 성원식 사장은 대놓고 기성세대 아저씨고.’
그렇다고 유세나 보좌관에게 일임시키는 것도 뭐하다. 죽도로 두들겨 맞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그렇기에 남은 선택지는 다름 아닌.
‘엄마, 부탁해요.’
엄마 찬스 되시겠다.
‘상황이 이런데, 혹시 예전에 배우 시절 인맥 좀 활용할 수 있을까요? 아예 엔터 회사를 하나 차려 드릴 테니, 운영해 보셔도 괜찮고.’
몇 차례의 설득 끝에 다행히도 수락의 뜻을 밝힌 엄마.
순식간에 인재풀이 뛰어난 엔터 회사를 인수하고 인원을 보강하는 식의 의사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나름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히나 공주.
“흐음, 엄마 찬스라.”
“은퇴하신 지는 오래되셨지만, 나름 한국 연예계 쪽에서는 발이 넓으시긴 합니다. 특히 원로급들처럼 높으신 분들하고요.”
구체적인 각론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향해 뻗어있던 죽도에 들어간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을 정도.
털썩, 마룻바닥에 마주 앉은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하는 건? 한서준 회장, 당신이 원하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
내가 원하는 것.
전 세계적 재앙인 후쿠시마 사태를 막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해야 하는 당장의 한일관계 개선.
독도라는 상징물을 둘러싼, 일본의 총리대신이 의도적으로 비비 꼰 이 상황 속에서, 해결의 키는 단 하나뿐이다.
선거, 그리고 지지율.
그리고 이 지지율이라는 놈은… 이슈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법.
혐한 이슈를 덮어버릴, 거대한 스캔들이라는 이슈에.
“그거 아십니까? 요새 아이돌 걸그룹은 노래랑 춤만 잘한다고 장땡인 게 아니라는 걸요,”
“나 정도면 그래도 제법 이쁜 편인디. 어제 같이 왔던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외모 말하는 게 아니라, 끼에 대한 겁니다. 이를테면… 연기라던가.”
연기.
지금 내 눈앞에 앉은 히나 공주가 조만간 미디어 앞에서 펼칠 연기. 그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자니 제법 그럴듯했다.
“연기…?”
“마침 덴노… 아니, 아버님께서 히나 공주님 연예인 되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시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근데 그게 연기랑 무슨 상관인데?”
다만 한 가지.
“그러니까….”
그 세기의 연기를 펼칠 히나 공주라는 여주인공 옆에, 맞상대할 남자로 나까지 연기를 펼쳐야 하는 것이 문제지만.
“좀 판이 큰 로맨스 연기를 해보자는 겁니다. 아버님을 포함해 일본 열도 1억 3천만이 모두 껌뻑 넘어갈 만한 세기의 연기를.”
* * * *
특이하게도, 오늘 유세나 보좌관은 가자미눈을 뜨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인상과 함께.
“죽 쑤어서 개 줬네요.”
“네?”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회장님.”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 듯, 애써 감추었음에도 조금씩 새어 나오는, 유세나 보좌관의 불편한 기색.
“흐음, 확실히 유세나 보좌관이 좀 신경 쓰이시는 부분이 있나 봅니다.”
“네? 회장님이 웬일로 그런 걸 다 알아채시고…?”
즉답 대신, 그저 이마에 띠를 질끈 동여맨 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국뽕을 가득 넣어 그린, 태극 문양을 정중앙에 박아 넣은 띠가 무언가 인상적이다.
“이러고 혐한 시위대 앞에서 도발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지나치게 과격할 수 있으니까요.”
“네? 하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요.”
뭔가 묘하게 핀트가 안 맞던 대화.
손가락으로 미간을 몇 번 꼬집던 유세나 보좌관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든 건지 대화의 맥락을 똑바로 잡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기에 혈자리 비슷한 게 있던 모양이다.
“그렇네요. 그것도 확실히 신경 쓰이기는 합니다. 다른 의미로.”
“뭐, 경호 관련 이슈는 얼추 해결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촤락, 호텔 창문가의 커튼을 걷은 나.
바깥에는 오늘도 푸짐한 문신 돼지들이 대규모로 혐한 시위를 벌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아마 저 친구들은 이제 조만간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저렇게 현장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댄들, 거대한 이슈 하나가 해일처럼 덮쳐오는 순간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릴 테니까.
“후속타로 히나 공주가 연기를 잘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회장님 연기가 제일 걱정됩니다만….”
“그건 걱정 마시고.”
양손에 든 한국 국기와 일본 국기. 호텔방문을 연 나는 심호흡을 내뱉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나갑시다. 대사관 앞으로.”
* * * *
-다케시마는 일본의 것이다! 조선인이 일본해라는 우물에 파시즘이라는 독을 풀었다!
-한국인은 매가 약! 한국인은 매가 약!
한국 대사관 앞, 스피커로 생생하게 울리는 무지성 비난.
혐한 세력을 자칭하는 야쿠자들. 그들이 올라탄 시위용 트럭 앞에는 늘 그렇듯이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어차피 단조롭기 짝이 없는 일본 정치판. 이 정도의 이슈만 나와 줘도 감지덕지할 테니까.
거기에… 혐한 시위의 배후에 있는 야쿠자 가네야마. 그가 가진 언론사의 기자들 또한 이곳에 상당수 포진되어 있을 터. 오히려 좋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리고, 지금.
혐한 야쿠자 시위용 트럭 바로 옆. 비슷한 차량 한 대를 끌고 온 나는 곧바로 즉석에서 연단 하나를 만들었다.
한국 국기와 일본 국기가 함께 걸린, 비둘기 조형물과 월계수 잎사귀로 평화적 분위기를 꾸며낸 연단을.
“옆에 깍두기분들, 이제 개 짖는 소리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독도가 일본 땅입니까?”
어설픈 일본어로 시작된 연설.
곧바로 주위에 있던 기자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뭐지?”
“일본어가 조금 어눌한데… 어어, 잠깐만. 저 사람 혹시…?”
개중 눈썰미가 있는 기자가 있던 모양이었다.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는 긴가민가해 하던 표정.
그 모습을 본 나는 여봐란듯이 목청을 더더욱 드높여 목소리를 토해냈다.
“국뽕도 과하면 치사량에 근접합니다! 이제 그만들 하시고, 이웃 나라끼리 사랑하며 지냅시다! LOVE & PEACE!”
LOVE & PEACE.
이 훌륭한 표어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안색이 바뀐 기자 한 명.
눈이 왕방울만 하게 변한 그가 큰 소리로 내 정체에 대해 외치기 시작했다.
“한서준,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
“어…? 그 희대의 돈 귀신이자 숨은 난봉꾼? 저 양반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원래 좀 관종이긴 했어. 요즘 보니까 매스컴 타는 거 좋아하더라.”
아니야. 내가 탄약그룹 회장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실이 아니야. 돈 귀신도, 난봉꾼도, 관종도 전부.
“대충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PEACE는 뭔지 알겠는데, LOVE는 또 뭐야?”
사랑과 평화.
이제껏 목이 터져라 평화를 부르짖은 것이 제법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슬슬 관심의 정도가 고조되는 분위기.
지금이… 타이밍이다. 빼도 박도 못할 만큼, 카메라 여러 대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으니까.
“그냥 적당히 끼워 맞춘 것 같은데… 어? 가만있어 봐봐. 선배, 지금 연단에 올라오는 저 여자 설마?”
나는 눈 한쪽을 찡긋 감고는 연단 아래쪽에 대기 중인 그녀에게 신호를 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배우보다 밝게 빛나는 연예인인 그녀에게.
“LOVE & PEACE! 내 사랑 한서준 회장과 함께 사랑과 평화를!”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카메라 플래시. 갑작스레 구름처럼 몰려오기 시작한 인파.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다.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로.
“히나 공주…! 아니, 히나 공주가 저기 왜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