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77화 (177/300)

177화 LOVE & PEACE(2)

한국 대사관 앞에서 LOVE & PEACE를 외친 효과는 굉장했다.

호텔로 복귀하자마자 당장 눈에 보인 것은, 잠긴 내 방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제 먹은 술 냄새를 풍기는 김 교수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이고, 한 회장님요! 이 중차대한 시기에 공개 연애라니! 그것도 덴노 딸랑구랑 연애라니! 이 머선 일입니꺼?”

무심하게 못 본 척,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나. 그리고 목청이 터져라 한탄을 하며 따라 들어오는 김 교수.

살짝 주책맞은 이 아저씨는 거의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앞에 따끈따끈한 인터넷 찌라시를 들이대며 말했다.

“못 산데이. 내가 못 살아. 지금 한일관계 빠그라진 거 안 보이십니꺼? 이래 관심을 끌어가 우짜실라꼬 그라시는데예?”

-[도쿄핫 저널]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히나 공주. 한국 대사관 앞에서 공식 열애 발표! 히나 공주의 혼전 임신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자.

-[재팬 팩트 체크] 살얼음판 같은 한일관계에 돌덩이를 던진 두 남녀의 LOVE & PEACE! 설마… 황위 계승권을 노리는 한국 정부의 큰 그림?

혼전임신이니 황위 계승권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이 잔뜩 들어간 찌라시.

정말이지 황색언론 기자들이란 창의력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들이다.

“이건 도대체….”

“인터넷만 이라는 기 아입니더! 벌써 테레비서도 떠들어 싸기 시작했네. 하이고, 조상님요. 하이고….”

그나마 TV 속 정규 뉴스 채널에서는 이 정도의 헛소리를 하는 미디어는 없었다. 그저 모든 이슈를 삼킨 이 블랙홀 같은 열애설에 일본 열도 전체가 흥분해 있었을 뿐.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TV를 꺼버린 나는, 일단 소파에 앉아 반쯤 초상집 분위기의 김 교수를 진정시켰다.

“뭔 고작 이런 일에 조상님 씩이나 찾고 그러십니까? 그냥 남녀상열지사인데.”

“그냥 남녀상열지사예? 지금 무신 사고를 치셨는지 감도 안 오시는 겁니꺼? 한일관계가 죄 빠그라져 있다 안캅니꺼!”

“그 빠그라진 한일관계 딱풀로 붙이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예? 그기… 무신 소린교?”

제반 사정을 모르기에 답답한 속을 달랠 길이 없어 보이는 김 교수.

아무리 대통령 특사 딱지를 달고 있다지만, 영 믿음이 안 가는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이 양반을 붙잡고 길게 말하는 건 패스.

“김 교수님께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제발 술이나 좀 그만 드십시오. 일본 외무성 관료들한테 주사 부리시는 것도 그만하시고.”

“크흠, 그… 이게 다 외교적 성과를 위한 기름칠이다 아입니꺼.”

자기 나름대로 그간의 음주 가무에 대해 항변을 하는 김 교수.

일본 외무성 차관하고 밥도 먹고 골프도 치고 사우나도 갔다는 말이 이어졌으나, 사실 그건 큰 의미가 없었다.

악화된 한일관계의 방향타.

그리고 그 키를 쥐고 있는 쪽은… 외무성이 아니라 자민당, 그것도 총리대신 쪽 파벌이니까.

“일단, 김 교수님은 좀 가만히 계시죠. 저도 이것저것 풀어야 할 숙제가 많으니.”

풀어야 할 숙제.

일단… 히나 공주와의 가짜 열애설로 혐한 분위기에 큰 충격파를 쏘기는 했다.

그러나, 막 피운 이 불씨를 드리블해 거대한 불꽃으로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

결국, 총리대신과 직접 연결이 필요한 상황.

“제반 요건은 다 갖추어졌는데 말이지….”

옆에서 떠드는 김 교수의 잔소리를 무시한 채, 그렇게 고뇌에 빠진 나.

그러나, 생각보다 그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찌 보면 참 얄밉다고 할 수 있을 절도로, 일본 총리대신은 이 바뀐 판에서 자신이 두어야 할 최적의 수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회, 회장님…!”

노크도 생략하고 들이닥칠 정도로 급히 나를 찾는 유세나 보좌관.

통화를 채 끊지도 못하고 달려왔는지, 그녀는 화면 켜진 휴대전화를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총리대신… 총리대신이 지금 당장 회장님을 보고 싶다고 합니다.”

* * * *

“하! 기가 막히는군. 혐한 이슈로 자민당에 줄을 대었는데, 반대로 한국 재벌 놈 덕에 돈까지 벌게 생겼다니.”

호방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금칠한 부채를 바닥에 쳐대는 가네야마 하야토.

가뜩이나 돈 먹는 하마였던, 최근 인수한 그의 미디어 언론사들. 그들은 그저 혐한 이슈를 널리 퍼트리는 역할 외에는 밥만 축내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 앞에서 있었던 히나 공주의 공개 연애를 눈앞에서 취재하기 전까지는.

“딱 타이밍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요, 보스. 어떻게 딱 혐한 시위 취재 장소 바로 옆에서 잭폿이 터지다니 말입니다.”

제 주인 앞에서 손바닥을 비비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부하 야쿠자.

모처럼 찾아온 기분이 좋은 날. 때마침 점수라도 따려는 듯, 인간 비데의 아부가 이어졌다.

“거기에 다른 언론이 덴노 황실 일이라 눈치만 설설 보고 있을 때, 저희 애들은 바로 특종부터 내고 보지 않았습니까요.”

“그랬었지. 우리 기자 놈들 움직임이 가장 빨랐었지.”

대사관 앞에 있던 취재진 중에서 특히 발군이었던 두 언론. [도쿄핫 저널]과 [재팬 팩트 체크].

각기 혼전임신과 황위 계승권 떡밥을 던지던 두 언론의 조회 수와 인지도는 이전에 비할 바 없이 수직상승한 상황.

“바로 그겁니다. 보스께서 금기니 성역이니 가리지 않고… 덴노까지 건드려도 된다고 하시니 아랫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니었겠습니까요.”

“흐흐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역시 움직여야 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법.”

기분이 동했는지 대뜸 장식장에 있는 진검을 뽑아 든 가네야마.

시퍼렇게 날 선 검을 바라보며 그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해 나간다면, 미디어 재벌도 꿈이 아닐 것이라는 상상을.

“연예인 상납 영상으로 관료들의 목줄을 쥐고, 정치가 놈들에게는 계속 돈을 먹인다면… 그래, 못 할 것이 어디 있겠나!”

자신감에 취해 웃음 짓는 가네야마.

그러나, 이 꿈 많은 야쿠자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배경이 되어 불러일으킨, 이 거대한 나비효과가 그에게 어떤 최악의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지를.

“계속 쉬지 말고 후속 보도를 내라고 해라. 기회가 왔을 때 끝을 봐야 하니까.”

“예, 보스!”

* * * *

총리대신의 관저는 그 비싸다는 도쿄 금싸라기땅 한가운데에 있었다.

정갈함과 차분함을 주제로 삼았는지, 검은색 자갈과 대나무 몇 개로 이루어진 정원.

기와지붕 사이의 회랑을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미닫이문 앞에 선 안내인은 머리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각하, 자민당 간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하세요.”

서서히 열리는 문과 함께 보이는 총리대신의 얼굴.

외모는 점잖은 교수님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곳 정원의 짜임새에 이 사람의 취향이 적극 반영되었구나 싶을 만큼.

“…송구합니다, 총리대신 각하.”

“송구하다는 생각을 하신 것을 보니, 간사장께서는 아예 저능아는 아니십니다그려.”

“각하….”

그러나, 그 중후한 외모 속에 숨은 가시 돋친 말투.

차갑게 미소 지은 총리대신은 다다미 바닥에 무릎을 꿇은 간사장의 앞에 섰다. 냉랭한 그림자를 그의 머리맡에 드리우며.

“혐한 이슈가 수명을 다했습니다. 히나 공주와 그 한서준이라는 자와의 불장난으로. 문제는.”

쪼그려 앉은 채로 간사장의 양쪽 어깨를 힘주어 잡는 총리대신.

그의 얼굴에 걸린, 웃음 지은 가면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불장난이 큰불로 번지게 된 것이 가네야마, 그 근본 없는 쓰레기 야쿠자 놈 때문이었고.”

“각하….”

“그리고, 가네야마 하야토. 그자를 통제할 주인은 간사장 당신이니 말이지. 안 그렇습니까?”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방향으로….”

“무능하면 눈치라도 좀 잘 챙기든가 하셔야지. 지금 선거의 틀이 깨졌는데, 간사장 당신이 퇴진한다고 해결될 일인가?”

선거의 틀.

독도 문제를 비롯한 혐한 이슈를 극대화해 정권을 지키겠다는 총리대신의 전술.

그러나 그 전술은 지금 와해되고 있었다. 고작 두 남녀의 가짜 연애 때문에, 한낱 배경으로 전락해 버린 양국의 갈등.

“…….”

졸지에 책임을 뒤집어쓰게 생길 간사장.

눈치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그의 직감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 그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닐 것이라고. 살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해결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저… 총리대신 각하.”

“아직 내뱉을 말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지금.

노회한 정치인의 생존본능이 그의 뇌를 일깨웠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어쩌면 히나 공주의 열애설이 단순한 불장난이 아닐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불장난이 아니다?”

“메시지를 던지는 장소, 메시지를 던지는 타이밍, 그리고… 그 메시지가 뜻하는 바까지. 우연의 산물이라 보는 게 더 이상할 정도입니다. 이건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추론.

한 꺼풀씩 벗겨지는 외피는 이내 진실이라는 벌건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대놓고 결정권자가 짠 판을 엎는 형국 아니겠습니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판을 엎었다라….”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는 총리대신.

그는 바로 몇 시간 전, 덴노가 있는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현실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심은 아니라 믿겠습니다, 폐하.’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총리대신도 알겠지만 히나가 워낙 제정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거세게 부인하던 덴노의 모습에는 그 어떤 숨김도 없어 보였다.

거기에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던 덴노.

‘그리고… 내가 볼 때는 그리 오래갈 사이도 아닐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히나 그 아이가 무언가에 꽂혔을 때 보이는 태도가 있어요. 뭐랄까, 광적으로 파고드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안 보여요. 마치.’

잠시 뜸을 들이던 덴노는 적합한 표현이 생각났는지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어쩌면 이 모든 사태를 한 번에 관통할, 아버지로서의 통찰력이 담긴 말을.

‘한서준 회장, 그자와의 관계는 그냥 사업상 동지 같은? 여하간에 연인으로는 안 보입디다.’

그리고, 지금.

덴노가 내뱉었던 그 말을 곱씹는 총리대신.

톡, 톡. 그는 손가락으로 다다미 바닥을 두들기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인이 아닌 사업상의 동지라. 설마…!”

“총리대신 각하?”

무언가 촉이 온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총리대신.

흩어져 있던 점과 점이 연결되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큰 그림이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이 막연한 그림을 그린 자가,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그 남자가 맞는지를.

“한서준 회장. 당장 그자를 이리로 불러오십시오. 나머지 특사단 전체는 필요치 않으니, 그자 혼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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