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LOVE & PEACE(3)
“아니, 회장님요! 총리대신 그 양반이 와 한 회장님을 찾는데예? 지도 같이 갑시더. 마, 지도 같이 좀 가입시더…!”
“혼자 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방에서 주무시고 계십시오. 겸사겸사 술도 좀 깨시고.”
내 방에서 반강제로 쫓겨난 김 교수. 이 술주정뱅이 아저씨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뒤따라 들어온 이 말괄량이 철부지 아가씨가 더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총리대신이? 한 회장 당신을?”
“네. 갑자기 대뜸 저를 찾더라고요.”
“으음….”
엄지와 검지로 브이(V) 자를 그리고는 턱에 가져다 대는 히나 공주. 그렇게 한참을 무언가 골똘히 고심하던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감탄사 하나를 내뱉었다.
“으웩, 재수 없어.”
“아니 또 뭡니까, 그 반응은.”
참으로 입체적인 표정을 얼굴 위에 구현한 히나 공주.
이 사람과의 대화는 뭔가 적응이 안 된다. 예측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하나.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이 희한한 여자를 교화하기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
“암만 가짜 연애라고 하더라도, 그게 남자친구에게 할 반응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 한 회장님한테 하는 게 아니라, 그 총리대신 말이야.”
“아.”
별로 좋은 기억은 없는지 속이 영 매스꺼울 때나 보이는 모습을 한 그녀.
하기야, 아무리 고삐 풀린 망아지여도 공주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정계 고위층과 커넥션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
“만나봤습니까? 그 사람.”
“궁성 공식 행사 때 몇 번쯤? 어렸을 때부터 뻔질나게 여기저기 다니데? 지금은 꼴에 총리대신이라고 방구석에서 똥폼 잡고 있지만.”
“그러면… 어떤 사람인가요, 총리대신은?”
“말했잖아. 인간이 재수 오지게 없다고. 그냥 뭐랄까.”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입 밖으로 전시하려 애쓰는 히나 공주.
10분 정도를 끙끙 앓고 나서야, 백치미를 여과 없이 뽐내던 그녀의 입에서 적합한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
“뱀 같은 사람?”
“뱀이라 하시면…?”
“그 영국 마법사 영화에 나오는 스네이크인지 스테이크인지 하는 교수. 그 양반하고 똑같이 생겨 먹었거든.”
아무래도 해리포터의 스네이프 교수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총리대신은 상당히 깐깐하고 칼 같은 자라고 할 수 있을 터. 아무래도 조금 골치가 아프게 생겼다.
“아, 맞다. 근데 그런 건 있어.”
“무슨…?”
갑자기 잊고 있던 게 생각이라도 난 듯, 머리 위에 밝은 백열전구 하나를 떠올린 히나 공주.
털썩,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 허공 위로 손을 뻗으며, 그녀가 웃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총리대신. 그 뱀 껍질 같은 아저씨 말이야.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공략 방법이 간단해.”
뒤이은 히나 공주의 말 한마디.
만약 그녀가 말한 대로라면… 어쩌면 일이 조금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도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속물적인 사람이, 복잡한 신념을 가진 사람보다 협상 테이블 위에서는 상대하기 쉬운 법이니까.
“기계. 그냥 기계라 생각하면 돼. 생각의 알고리즘 자체가 이해득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 * * *
뱀 같은 사람.
총리대신의 인상을 묘사한 히나 공주의 말은 타당하기 그지없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온화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의 눈동자는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달랐으니까.
특유의 정갈한 일본식 정원을 지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 안에서, 총리대신은 내게 도자기 잔을 내밀며 물음을 던졌다.
“녹차 괜찮으십니까?”
“아, 감사합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공기.
마주친 눈은 양쪽 모두 쉬이 경계를 풀거나 하지는 않았다.
각자 서로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며, 가볍게 한 합 한 합을 겨루어 보는 칼싸움처럼.
그렇게 타는 목을 녹차로 축이며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던 순간, 총리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회장님은 혹 옛 서화(書畫)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지요?”
“기본적인 것은 압니다. 굳이 고풍스러운 취미를 가지셔야 하는 분들이 종종 주위에 계셔서 말입니다.”
“잘되었네요. 그럼.”
천천히 손을 들어 한쪽 벽을 향해 가리키는 총리대신.
거기에는… 너무나도 수려한 서화가. 아니, 어딘가 수장고 비슷한 곳에서 막 가지고 온 듯한 문화재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건… 몽유도원도?”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몽유도원도.
조선 시대 서화 가운데 거의 최고의 평을 받는 그림이지만,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것.
여러 의도를 섞은 듯한 표정의 총리대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이 걸린 벽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 그림을 보기 전에 그 앞에 적힌 글을 먼저 봅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친필이 바로 이것.”
매끄럽게 휘날리는 유려한 문체.
빛바랜 한지에 스며들듯 눌러 쓴 그 글씨의 주인은.
“안평대군. 조선 세종의 왕자이자, 자신의 형인 수양대군에게 사사당한 남자.”
친절함이라는 미소를 가면 위에서 조금씩 지워내기 시작하는 총리대신.
뱀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딱 맞게도, 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도 분위기만으로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정치라는 게, 그리고 권력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겁니다. 피를 나눈 혈육에게까지 칼끝을 겨누어야 하니 말입니다. 하물며.”
“…….”
“피조차 나누지 않은, 생판 남인 사람이 자꾸 이렇게 제 권력의 기반을 부수려 드신다면.”
시퍼렇게 날 선 독니.
꿈틀거리기 시작한 주름진 그의 눈가에는, 제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추지 못할 적개감이 나를 향해 정조준하는 상황.
마치 쐐기를 박듯, 그는 내게 위협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고는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옳은 걸까요? 모쪼록 한 회장님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 지금 바로.”
* * * *
매섭게 노려보는 눈.
그리고, 강요되는 대답.
그는 내게 묻고 있었다. 혐한이라는 선거의 틀을 네놈이 깨부수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그 대안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고.
만약… 그 대안조차 없이 일을 벌인 것이라면, 적어도 일본 내에서 탄약그룹을 포함한 내 모든 것은 파멸로 향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곁들여서.
“서화(書畫)에 관심이 지대하시니, 붓을 들어 대답할까 합니다. 지필묵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편하실 대로.”
그렇기에, 미리 준비해 둔 대답.
붓을 든 나는 가득 힘을 주어 새하얀 종이 위에 투박한 네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제 대답입니다.”
오월동주. 다른 말로는… 적과의 동침.
독도를 중심으로 한 혐한. 그로 인해 틀어진 한일관계. 그러나, 이를 묻어 두고 각자가 가진 거대한 이문 앞에 손을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설득.
내가 쓴 고사성어를 본 총리대신의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어찌 보면 재미있다는 듯한 낌새까지 포함된 경련이.
“하! 내 배를 불 질러 놓고, 뱃삯을 받으시겠다는 거요?”
보인다. 의도적으로 연출한 분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가진 감정선의 흐름을.
그렇기에 더욱 강하게 둘 수 있는 다음 수.
“그깟 낡아빠진 배, 타셔 봤자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물고기 밥이나 될 뿐입니다. 야쿠자 따위가 만든 걸 뭘 믿고 타시려는 겁니까?”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으시군요.”
“이미 혐한 이슈는 정류장을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히나 공주의 열애설로 판을 뒤집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심하는 듯한 얼굴의 총리대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가볍게 걸렸다.
“판을 뒤집는다라.”
“한일관계 회복의 부싯돌이 될 터이니, 그걸로 중도층을 좀 잡으시라는 겁니다.”
“스스로 광대가 되시겠다?”
“이미 반쯤 그리되었고요. 그리고. 극우 성향 지지자 역시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혐한 이슈에 적극 반응하는 일본의 극우 성향 시민들.
그러나… 이들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가 하나 더 있다.
덴노. 그리고 히나 공주를 포함한 일본 황실 전부.
“가네야마 하야토라는 산 제물이 이렇게 도살장에 끌려가고 싶어 몸을 비틀고 있으니까요.”
“……!”
“황색언론을 동원해 공주를 넘어 황실과 덴노를 모독했던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참에 피를 보실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바뀐 선거의 틀에서, 화살받이로 쓰기 딱 좋은 산제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총리대신. 나는 뒤이은 말 한마디로 그의 생각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노선을 180° 돌려서 나와 함께 같은 배를 탈 수 있겠다는 확신을.
“총리대신 각하께 무엇이 더 이득인지, 그리고 무엇이 더 위험성이 낮을지는 뻔히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 * * *
가네야마 하야토의 자택.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초였으나, 그는 상의를 벗어 던진 채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치솟아 오르는 열불을 좀처럼 삭이지 못하고 있기에.
“하! 이놈들이 단체로 간이 부었나? 왜 다 연락 자체가 안 되는 거냐!”
국세청의 세무조사, 지방자치단체의 시정 명령, 심지어는 경찰의 사소한 단속까지.
갑자기 유례없이 올가미 속에 목이 들어간 것처럼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가네야마. 그는 부하 야쿠자에게 이 사달이 난 까닭을 물었다.
“어찌 된 일이야! 바로 알아오라 했잖나!”
“그, 그게… 어느 쪽에서도 화답을 주지 않습니다요, 보스.”
“아예 무시로 간다고? 그놈들 전부가?”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연예인들로부터 부적절한 상납을 받은 관료들.
그 개 목걸이가 헐거워졌다고 판단한 가네야마. 험악한 인상이 한층 더 흉악스러워진 그는 칼을 뽑아 들기로 결심했다.
“이것들이… 그래, 아직 쓴맛을 제대로 못 봤던 게야. 실제로 누구 한 놈이 목을 매달아야 나머지들도 정신이 번쩍 드는 법이지.”
“어찌하시려고 그러시는지…?”
“가장 먼저 반기를 든 작자가 국세청장 그놈이었다지?”
“그, 그렇습니다. 저번에 중단하던 세무조사부터 다시 들어온 것이 시작이었습니다요.”
안 그래도 한번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국세청장이 시범타의 대상으로 정해졌다.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는 가네야마.
“상납 영상 풀어. 우리 쪽 언론사에 쫙 뿌린다. 일주일 내내 메인에 걸어 두고.”
“예, 보스!”
“개가 감히 주인 손을 물면 어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아주 철저하게 인격을 말살토록… 으악!”
-와장창!
거친 파열음과 함께 들이닥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들.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그들은 가네야마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총리대신 직속 내각정보조사실 특별수사관이다! 머리에 총알구멍 나기 싫거든 바닥에 엎드려!”
“이게 무슨… 끄억!”
영문도 모른 채, 군홧발에 짓밟히는 가네야마.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줄로 온몸이 결박당하는 와중에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 최후가 이 꼴이 난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들어낸 남자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단순한 장기 말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