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재앙은 쓰나미처럼 다가와서(2)
도쿄, 총리대신 공관.
새하얗고 가느다란 양털로 만든 붓. 그 끝에 머금어진 검은 먹물이 종이에 닿아 가느다란 춤을 추고 있었다.
좀처럼 목제함에서 꺼내지 않는 양털 붓. 워낙 세심한 필법을 요하는 이것은, 돌아가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만 총리대신이 꺼내 쓰곤 했다.
마치 지금 모습처럼.
“어찌, 간사장 보시기에 서체가 괜찮게 나왔는지요?”
“허어, 총리대신 각하께서 붓을 잡으시면 바로 명필이 나오니, 정말이지 여기 올 때마다 제 눈이 다 즐겁습니다.”
부드러운 양모로 쓰고 있음에도, 오히려 힘 있게 뻗어 나가는 글씨체인 추사체(秋史體).
자민당 간사장은 서예를 마무리한 총리대신을 바라보며, 감탄 반 아부 반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 쭉 뻗은 필체가 꼭 총리대신 각하의 결단력과 똑 닮았습니다.”
“애당초 해결될 일은 과정이 무엇이든 간에 쉬이 해결되는 법이지요. 마치… 지금 이 글씨처럼.”
“아아, 너무 정신을 잃고 감상하느라 보고도 채 못 드렸네요. 가네야마 그 야쿠자 놈 뒷정리는 잘 해결되었습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빙그레 웃음 짓는 총리대신.
덴노와 황실이라는 상징물을 웃음거리로 만든 가네야마 하야토.
어쩌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건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다.
발가벗겨지듯이 검찰에 넘겨져 모든 것을 탈탈 털리는 것이 그 야쿠자의 말로였으니까.
“과하다 싶을 만큼 단단히 손을 보았으니, 바깥 공기는 놈이 늙어 죽고 나서야 마시게 될 겁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총리대신.
마지막 글자까지 전부 휘갈겨 쓴 그는 고개를 돌려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가네야마에게 목줄 잡힌 관료들도 포섭했겠지요?”
“물론입니다. 관료들은 그 목줄이 완전히 없어진 걸로 알고 있겠지만.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주인만 바뀐 것이지요.”
“잘 처리했네요. 간사장이 여러모로 수고했습니다.”
“앞으로 몇 년은 관료들 반발 따위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니 마음 놓으시고 국정에 임하여 주십시오, 총리대신 각하.”
잘 풀린 일과 함께 잘 써진 글씨.
너무나도 희한할 만큼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일에 마무리를 하려는 듯, 마지막으로 나무통에서 얇디얇은 세필(細筆)을 꺼내는 총리대신.
추사체로 적은 글씨 옆에 제 이름을 써넣던 그의 팔에 갑작스럽게 묘한 떨림이 일었다.
스스로로 인한 떨림이 아닌, 외부에 의한 떨림이.
“음? 방금 뭔가 진동이…?”
“약한 지진… 인 것 같습니다만, 아마도.”
“흐음, 기상청에서 따로 언질은 없었는데.”
전등이 매달린 줄이 가볍게 흔들릴 정도의 약한 지진.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묵직한 불안감을 남긴 채로.
다시 세필을 든 총리가 간사장에게 물었다.
“뭐, 되었습니다. 그보다 이번 일에 물꼬를 튼, 한서준 회장 그 친구는 지금 후쿠시마에 있다고요?”
“아, 예. 원전 방문 승낙이 나자마자 바로 달려가더군요.”
“흠, 도대체가 히나 공주에 이어서 무슨 꿍꿍이인 건지….”
“탄약그룹도 중공업 쪽에서 원전 관련 사업을 하니, 부품이나 좀 납품해보려고 애쓰는 것이겠지요.”
“그럴 것이었으면, 저번에 나를 찾아왔을 때 함께 묶어서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때, 그는 장사꾼의 눈빛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마치….”
그날, 자신을 찾아온 젊은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총리대신.
탄약그룹의 회장은… 참으로 희한했다.
분명 정치가와 장사치의 언어인 손익계산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나, 막상 그가 얻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히나 공주와의 관계마저 그저 가짜 연애에 지나지 않았던가.
“영웅이라도 되겠다는 자의 눈빛이었는데 말이지.”
“영웅 말입니까? 한서준 회장, 그 어린 친구가요? 허허허.”
“뭐, 나중에 가 보면 알지 않겠지요. 일단은 첫인상이 그랬다는 것이니… 으윽!”
“끄악! 총… 총리대신 각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지진이!”
쿠궁, 굉음과 함께 도자기를 넣은 나무 장식장이 쓰러지고, 전선이 늘어진 전등이 깜빡거리는 아수라장의 상황.
천지를 뒤흔드는 격한 흔들림은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오래 계속되었다.
-삐! 삐! 삐! 삐!
정신없이 울려대는 건물 내부의 붉은 보안등.
균열이 일은 나무 미닫이문 바로 앞에 걸터앉은 총리대신. 정신이 든 것인지 그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괜찮아요, 난 괜찮습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이지…?”
“총, 총리대신 각하! 급보입니다!”
그 순간, 방 안쪽으로 들이닥친 경찰 고위직 출신의 정보실장.
그는 평소와 달리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총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정보실장, 어떻게 된 일인가? 상황은 어찌 돌아가고 있고?”
“비상 상황입니다! 지금 동북부… 동북부 지방에서…!”
그리고, 정보실장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소식, 그것은.
백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거대한 재앙. 그 재앙이 일본을 향해, 그리고 전 세계를 향해 쓰나미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초대형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지진 규모는… 9.0! 관측 역사상 최대의 지진입니다!”
* * * *
조금 시곗바늘을 앞으로 돌려서 사고 발생 하루 전, 늦은 저녁 시간.
명목상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견학하기로 한 나. 그러나, 내 머리 위에는 뿔이 자라나고 있었다.
고구마를 물 없이 목에 욱여넣을 정도의 답답함이 가져온 분노 때문에.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총리대신께서 허락하신 발전소 견학인데, 이걸 도쿄전력 사장님이 와서 막으면 뭘 어쩌자는 겁니까?”
“에헤이! 한 회장님, 내 말이 그게 아니잖습니까! 젊은 사람이 왜 말귀를 못 알아들으셔.”
도쿄전력 사장 나까무라 기모찌.
반쯤 벗겨진 머리에 뚱뚱한 배가 툭 튀어나온 그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는지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쩐지 망부석처럼 서 있던 와타나베 발전소장을 갑자기 저 멀리 치워버리더니만. 내게 따로 이야기할 게 있다는 게 이런 거라니.
“보안상 절차가 복잡해서 그래요. 복잡해서.”
“그 복잡한 절차 통과했다고 받은 게 이 패스 아닙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그게요….”
뻔한 반응.
탄약그룹에서도 참… 여러 번 보았던 반응이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잔뜩 있을 때, 외부인에게 절대 누설하고 싶지 않은 무능한 관리자의 발버둥.
‘쓰흡, 아무래도 이 보신주의의 화신하고 있으면 말이 영 안 통할 것 같은데.’
사실 도쿄전력이 내 회사도 아니고, 이런저런 문제가 좀 쌓여 있어도 상관없다.
다만, 문제는.
‘내부 견학을 못 하면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구호용 장갑차가 들어갈 길을 모른단 말이지.’
침묵과 함께 찾아온 고민.
비록 로봇팔 앞에 카메라를 달아 두었다지만, 미리 노심까지 가는 길을 아느냐와 모르느냐는 천지 차이일 터.
그러나, 내 고심하는 모습을 이 나까무라 사장이라는 작자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비굴한 모습은 기저에 깔고 간 채, 갑작스레 호방함을 연출하기 시작하는 이 사람.
“크흠, 한 회장님. 그냥 비즈니스 이야기면 저랑 어디 좋은 곳이나 가셔서 회포도 풀고 그럽시다. 사나이끼리!”
“그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립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꺼내 보이는 나까무라 사장.
일본의 상징인 노란색 국화 문양. 손가락으로 국화 잎사귀를 가리키며 그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됐고! 여기 국화 문양 보이십니까?”
“하아… 국화는 또 왜요.”
“야마토 사나이는 국화 잎 개수만큼 계집을 거느려야 한다, 뭐 그런 일본 속담이 있습니다. 조선 사나이도 무궁화 잎 개수만큼은 해야지요!”
“그건 또 무슨….”
내가 알기로 일본 속담에 그런 헛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막 던지는 나까무라 사장. 이런 사람이라면 대화고 협상이고 일절 통하지 않을 터.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말이 좀 통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가진, 일정 직급 이상의 책임자가.
마침 그런 사람이… 저기 구석에 한 명 있기도 하고.
“됐습니다. 아무래도 나까무라 사장님과는 여기서는 달리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군요.”
“한 회장님?”
나까무라 사장의 휑한 정수리 너머를 바라보는 내 두 눈.
이 상황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와타나베 소장.
후쿠시마 발전소의 총책임자인 그에게 무언가 은폐하는 것이 전적으로 일임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와는 말이 좀 통할 수도 있을 터.
결심을 굳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나까무라 사장의 어깨를 팔로 휘감으며 말했다.
“그럼 이동하시죠. 어디 계집 한번 거느려 봅시다. 무궁화 잎 개수만큼이나.”
“오! 역시 내 눈이 옳았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나까무라 사장.
내 통역을 맡은, 유세나 보좌관의 경멸 섞인 눈초리는 잠시 무시하자. 이게 다 큰일을 하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건 나중에 해명하면 된다. 그 나중이 좀 피곤하겠지만.
“크흐… 내 처음부터 딱 알아봤습니다. 사나이는 사나이끼리 통한다니까! 바로 갑시다!”
“아, 잠깐. 가시기 전에.”
잔뜩 상기한 얼굴의 나까무라 사장을 살포시 무시하고, 손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키는 나.
“저분이 여기 소장님이시지요?”
“예… 예? 아아, 그렇습니다요. 어이! 와타나베, 자네 이리로 좀 오지!”
이런 상황 자체에 학을 떼는 듯,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오는 와타나베 소장.
대충… 이야기는 통할 것 같다. 내 직감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이분도 같이 가는 것으로 합시다.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되니까요.”
“하하… 한 회장님. 이 친구는 샌님이라 그런 자리에는 좀….”
뭐 얼마나 난잡하게 놀 생각인 건지, 중간에서 진땀을 빼며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나까무라 사장.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광대 같은 모습 따위는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 내 앞에 다가와 선, 와타나베 소장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무언의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굳게 닫힌 입이 열렸다.
“가겠습니다.”
“으잉? 와타나베 자네가? 웬일로다가?”
통했다. 될 것 같다.
거칠게나마 전해진 진심은 서로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으니까.
다시 난봉꾼의 가면을 쓴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는 나까무라 사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큰 목소리로 호방함을 연기하며 외쳤다.
“자, 갑시다. 마침 날도 좋은 게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고 있네요. 이거 기가 막히게 아름답네.”
조금 일찍 핀 벚꽃.
연분홍색 꽃잎은 바다를 향해 슬프게도 휘날리고 있었다.
곧 다가올 재앙을 맞이하기 전, 곧 사라져버릴 아름다운 모습을 최대한 뽐내는 시한부 환자라도 된 것처럼.
“벚꽃이 날리는 것에 비해서… 저 시커먼 바다는 안 그런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