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재앙은 쓰나미처럼 다가와서(3)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후쿠시마시 외곽의 한 전통 료칸.
간판은 료칸이지만 나름 고급 요정을 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화려한 색실로 짠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 몇 명은 샤미센 줄을 튕기며 은은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름 모를 노래가 끝난 후, 곧바로 각자 맡은 상대의 자리 옆에 붙은 게이샤들.
“하이고, 제가! 이 나까무라가 말입니다! 도쿄전력에서 35년을 일했습니다요, 한 회장님.”
“아, 예.”
술자리가 시작된 지 서너 시간 만에 드디어 얼굴이 붉게 물든 나까무라 사장.
아리따운 접대부의 허리춤을 움켜쥐며, 그는 자기 나름의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잘한 일이 안 일어날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조직은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뭐, 그렇겠지요.”
왜 내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는지에 대한 변명.
거짓말과 자기변호로 점철된 낱말의 나열은, 술병 주둥이에서 쏟아지는 사케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신(保身)! 남들이 아무리 욕을 한들, 저는 제 사람과 제가 몸담은 이 회사를 지킨 겁니다. 제 몸처럼요!”
들을 가치도 없는 말. 나는 대충 대꾸하고 계속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일단 이해는 합니다. 그러니 오해도 풀고 그러려고 여기 온 것 아니겠습니까? 사나이답게.”
“크흐… 역시 한 회장님은 야마토 사나이입니다! 간빠이!”
멀쩡한 한국인더러 야마토 사나이라니, 그나마 내선일체 어쩌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안 한 게 다행일 정도다.
아예 딸기코가 될 만큼 단단히 취기가 오른 나까무라 사장.
마침내, 주정뱅이 보신주의자는 픽하고 마지막 단말마를 외치며, 꿈나라를 향해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야마토 남아가 몸을 던져서, 일본의 혈관을 뻗어 내린다! 그곳에 흐르는 건 피가 아니다. 빛보다 환한 전력의 질주!”
아마 도쿄전력 사가(私歌)인 듯한 괴이한 노래.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나는 컵에 든 물을 모조리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드디어 가셨네.”
“저기… 혹시 이 손님분을 옆방으로 옮겨드리면 되겠습니까?”
큰대자(大)로 뻗은 나까무라 사장의 모습에, 당혹한 기색이 잔뜩 서린 요정 마담의 얼굴.
나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냥 여기에 이부자리 깔고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나나 여기 이분은… 곧 떠날 테니까.”
옆쪽으로 돌린 시선.
그 또한 나처럼 입에 술은 한 방울도 데지 않은 듯, 아주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그렇습니까, 와타나베 소장님?”
“굳이 여기 계속 있을 거라면 애초에 오지도 않을 겁니다.”
“제 눈이 맞았네요. 그러면….”
중정으로 난 창틀 사이로 흐드러지게 내리는 벚꽃잎.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에게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는 입을 열었다.
“담배 태우시죠? 전 비흡연자지만 바람이나 잠깐 쐴까 합니다. 일단 나가시죠.”
* * * *
“도와주시죠, 와타나베 소장님.”
“네…?”
환하게 뜬 보름달. 달무리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달빛 아래에서, 나는 아직 담뱃불도 붙이지 않은 와타나베 소장에게 대뜸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여기 이 남자에게는 장사치의 언어도, 정치가의 언어도 통하지 않을 것이 보였으니까.
물론… 더 이상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기도 하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전 내부를 세밀하게 봐야 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지금 당장이면 더 좋고요.”
“굉장히… 당혹스럽네요. 아무런 설명조차 없이 그런 무리한 말씀을 다 주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원전 내부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로봇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당혹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와타나베 소장. 그런 그를 본 나는 고심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인지.
“총리대신 승인을 받았던 내용이니 강행하기를 바란다… 라고 제가 밀어붙이면.”
“…….”
불도저처럼 몰아붙이는 수.
그러나, 분명 원리원칙주의자인 와타나베 소장에게 먹히지 않을 수다.
애당초 원자력 발전소 출입 통제에 관한 권한은 그에게 있고, 그 누가 인사권으로 겁박을 주어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분명 거절하시겠지요? 저기 방안에 널브러진 딸기코 아저씨에게 그러셨듯이.”
조금 더 담백하게 나가야 할 필요가 있는 지금.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대신해 새로이 그의 입에 물린 연초 한 개비.
잿빛 연기를 들이쉬기도 전에, 나는 그의 마음에 쐐기를 박기로 결심했다.
“역으로 그렇게 외압에 굴하지 않으시니, 지금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
빙빙 돌리는 말도, 그럴싸한 거짓을 꾸며내는 것도, 양팔 저울 위에서 손익계산을 논하는 것도 안 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범위 내에서, 진심을 담아 담담하게 사실만을 나열하듯 말하는 것뿐이다.
짤막한 한숨과 함께 내뱉은 내 진심 어린 한 마디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위험할 겁니다. 아니, 곧 위험해집니다. 손을 쓰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한 회장님…?”
아직 신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부족한 걸까?
조금 머릿속이 복잡한지, 미묘한 표정을 짓는 와타나베 소장.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부 안전 통제에 문제가 있어도, 사후 처리는 제가 다시 확인하는….”
“아니요, 아니요. 그런 자잘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확인하네 마네를 떠나서.”
조금 무례하지만, 그의 말허리를 중간에 끊은 나.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숨을 고를 나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키워드를 뒤이어 던졌다.
충분한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대자연의 힘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
그리고 그 진심은… 아무래도 그에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바스락, 상의 안쪽에 손을 넣더니 이내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내미는 와타나베 소장.
“기본적으로 제가 받았던 일본 기상청 자료에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한 회장님의 말씀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겠지요.”
“…….”
“하지만.”
분명한 확신을 담아서, 내 쪽을 향해 건네는 그 종잇조각.
“제 개인적으로 취합한 데이터입니다.”
상당히 복잡한 대기과학적 요소들로 점철되어 보이는 관측 자료.
여러 차례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 흰 곳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빼곡하게 데이터를 써넣은 그 안에는, 와타나베 소장의 고심이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혹시…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일치합니까? 그 대자연의 힘이라는 것 말입니다.”
“제가 아는 사실과 비슷하네요. 아니, 오히려 더 확신이 듭니다. 와타나베 소장님께서 보여주신 자료 덕에요.”
“그럼 설마 탄약그룹 차원에서 일본을 방문하신 이유가…!”
약간 착각 비슷한 무언가를 하는 와타나베 소장.
하지만, 내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회귀 운운하며 가타부타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려 꿈틀거리는 그의 생각을 끊었다.
“보안상 정보의 출처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이해합니다.”
“그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밀물이 밀려오기 시작한 듯, 달빛에 비쳐 하얀 물결을 해안가를 향해 때려대는 파도.
담배 연기에 섞여 풍기는 깊은 밤 냄새를 맡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진심을 던졌다.
“걷잡을 수 없이 큰 재앙이 현실이 되기 전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소장님께서 도와주십시오.”
* * * *
다음 날. 아니, 정확히는 서너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이른 아침.
평소보다 다소 무거워진 공기.
철근 콘크리트로 겹겹이 쌓인 이곳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안에는 유독 삼엄한 기운이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여깁니다.”
“생각보다 통로가 넓네요.”
흰색 방사능 보호복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는, 내부 시설로 나를 안내하는 와타나베 소장.
다소 어두운 이곳이 워낙 익숙한 건지,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복잡한 공간을 거닐었다.
“애당초 설계 당시에 안전을 고려해서 지었으니까요. 물론… 그걸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이 위에 있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그리고, 가지고 온 수첩에 최대한 쉽게 알아볼 수 있게끔 길을 그리며 나아가는 나.
아까 줄자를 대고 대략적인 폭을 재어 보니, 소형 장갑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나마 들어갈 성싶다.
진입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을 터.
“다행이다. 그래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
“아아, 거기서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는 와타나베 소장.
알고 보니 옆에 달린 보안장치를 만지작거리는 모양이었다.
몇 번의 버튼 조작이 있는 후, 곧바로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하는 육중한 철제문.
“이 문을 넘으면 원자로입니다. 냉각 장치 시설도 같이 있지요.”
원자로.
아주 자그마한, 우라늄이라는 돌덩이로 만든 봉 몇 개.
고작 그 작은 봉 속에는 세상을 이롭게 만들, 그리고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었다.
“…아름답네요, 빠져들 만큼.”
거대한 수영장처럼 보이는 냉각수 아래 잠긴 원자로.
그것은 물속에 빠진 고대의 보석처럼 영롱한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는 저 푸른빛을 볼 때마다 꼭 야누스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수조 앞 난간에 양손을 짚고 멍하니 빠져들 듯 그 안을 바라보는 와타나베 소장.
전혀 다른 두 얼굴이 앞뒤로 붙어 있다는, 야누스에 대해 언급한 그는 그 푸른빛을 향해 손을 뻗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평소에는 환한 빛으로 문명을 가져다주지만, 한번 그가 뒤를 돌게 되면.”
“……?”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매서운 얼굴로 모든 것을 노려볼 테니까요.”
아직은 온화한 얼굴의 원자력이라는 이름을 가진 야누스.
비록 지금은 따뜻한 미소로 세상을 향해 이로운 빛을 내뿜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제 곧 뒤편의 시리도록 매서운 얼굴이 세상을 증오하듯 뾰족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임을.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 최대한 무서운 모습을 잘 막아 봐야겠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리 끝에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
아무래도 내가 읊조린 혼잣말을 야누스가, 그 원자력이라는 놈이 들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기시감이겠거니 했던 진동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강해져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어어… 설마?”
그래, 시작이다.
자연이 가져다준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재앙.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인재(人災),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제부터 나는, 그 밀려오는 재앙을 최대한 막아낼 것이다.
“지진! 한 회장님, 어서 이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