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재앙은 쓰나미처럼 다가와서(5)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한서준, 그 남자.”
도쿄. 덴노 황궁 안, 히나 공주의 방.
핑크색으로 가득 찬, 소위 소녀소녀한 그녀의 방안. 히나 공주는 베개 위에 털썩 머리를 맡기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필 일하러 가도 어떻게 그런 곳만 딱 집어서 가는 거지? 진짜 신기해 죽겠네.”
본래 가지고 있던 호감 때문일까?
일단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괜히 가방에 짐을 넣었다 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
다행히도 그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히나 공주의 그런 꼴을 보다 못해 말을 건 불청객 탓에.
“히나 공주님?”
“아, 왜요. 집사장.”
“그… 지진은 동북부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도쿄에는 이상이 없을 겁니다.”
“뭔 소리여, 갑자기.”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환갑의 집사장.
마음속에 든 덴노의 가정교육에 대한 불신을 애써 꾹꾹 누르며, 그는 공주가 끼고 안은 대형 여행용 백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굳이 피난용 짐을 바리바리 싸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령 도쿄에 추가 지진이 오더라도 황궁 대피소가 있사오니….”
“아아, 이거요? 피난용 아닌데?”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히나 공주.
그와 동시에 집사장의 등줄기에는 한 방울의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기 때부터 보아온 그녀가, 무언가… 대형 사고를 치기 전에 보내는, 일종의 감각 신호였다.
“공, 공주님…?”
“피난용이 아니라, 출장용이에요. 일단은 그 뭐냐, 명목상이라도 약혼남이잖아. 한서준 회장.”
덜컹, 흔들리는 집사장의 눈동자.
제발 자신이 생각한 것이 아니길 간절히 비는 노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기 남편 될 사람이 지금 죽네 사네 하는 위험에 처했는데, 아내 될 사람은 탱자탱자 놀고 있다? 이건 자존심상 용납이 안 되걸랑.”
“아니, 공주님! 그게 무슨…!”
폴짝, 산토끼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창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히나 공주.
언제 준비했는지 바로 밑에 주차해둔 자동차에 시동을 건 그녀는, 손을 흔들며 집사장의 속을 또다시 새까맣게 태워댔다.
“그럼, 수고! 아빠한텐 당분간 비밀로 하는 걸로. 부탁해요!”
“공주님! 히나 공주님…!”
-부우우우웅!
제한 속도 따위 시원하게 무시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녀의 차.
하지만 히나 공주는 알지 못했다.
그녀를 뒤따라가는 기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빨리빨리 가자. 저거 뭔가… 대박의 냄새가 난다.”
“선배, 지금 공주 가는 방향 보니까 북쪽인데, 이거 혹시 잘하면…?”
전직 야쿠자, 현직 모범수가 된 가네야마. 그의 산하에 있던 언론사 중에는 아직도 돌아가는 판을 제대로 못 읽는 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머리 한 군데가 살짝 모자라고 오로지 기사만을 갈구하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특종 하나 거하게 건지는 거지. 운전 잘하자고. 절대 놓치지 말고, 딱 달라붙어.”
덴노 황실에 대한 취재라는 금기 따위, 그리고 지진과 쓰나미를 비롯한 자연재해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기자들.
카메라를 짊어지고 공주의 스포츠카를 따라가는 그들은 알지 못했다.
후쿠시마, 앞으로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를.
* * * *
“일당 40만 달러 더.”
“NO!”
“그럼 일당 400만 달러 더.”
“Never! Even if you give me 40 million dollars, I won't do it!”
협상의 정석이라는 방식대로 임했건만, 도저히 꿈쩍도 하지 않는 서양인 기술자, 속칭… 코쟁이 아저씨.
제아무리 많은 돈을, 직접 수표까지 써가며 눈앞에서 흔들든, 그는 망부석이라도 된 양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환장하겠네. 이 양반 어떻게 방법 없겠습니까?”
“팬티에 오줌까지 싼 양반인데, 뭘 더 바라겄어. 냄새나 안 나게 방향제 뿌리는 게 최선이지.”
대충 지진이 난 공항에서 오줌을 싼 채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는 김원철 아저씨의 후속 설명.
이래서는 답이 없다. 유일하게 로봇 팔 조종 기술을 아는 양반이 이래서야 아무것도 못 할 노릇이니.
김원철 아저씨도 이 상황이 곤란한 건 매한가지인지, 뒤통수를 긁으며 내게 제안을 던졌다.
“일단 요 코쟁이 아저씨는 트렁크에 넣어두고… 미셸 사장더러 오라 하던가 해야지 않을까?”
“미셸 사장은 로봇 팔 조작 방법을 안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돌이니까.”
“흠.”
급히 한국에 건 전화.
그러나, 미셸 사장과 뭐라 뭐라 통화를 마친 김원철 아저씨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 일단 미국에서 원천 기술 가진 회사에서 교육받은 사람 아니면 못 한다네.”
“하아,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이야.”
손목시계를 보니, 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 냉각 장치를 손 쓸 수 있는 때에 빨리 진입하지 않으면, 원자로 노심이 미친 듯한 열을 내뿜으며 모든 것을 붕괴시킬 테니까.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약간의 물리적인 대화였다.
“Hey, Listen. 아니, 그냥 성질나니까 한국말로 할게요. 어차피 당신도 알아듣는 거 아닙니까?”
“…놔 한쿡말 좔 몬하는대.”
“지금 보니까 잘만 하시네.”
어설픈 한국어 발음이 뭔가 더 사람을 열받게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연락하자마자 곧바로 이리로 올라온 유세나 보좌관. 나는 그녀에게 이 코쟁이 아저씨가 탄약그룹과 맺은 용역계약서를 받아 낭독하기 시작했다.
“자, 지금부터 내가 계약서 내용을 읽을 거예요. 귀 쫑긋 세우고 똑바로 들으십쇼. 코쟁이 아저씨.”
“무슨…?”
“만약, 을(乙)이 상기에 열거되지 아니한 부당한 사유로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 갑(甲)에게 계약 총금액의 10배를 보상한다.”
“…….”
“김 비서실장님, 우리 원래 계약이 얼마였죠?”
‘남의 불행은 곧 나의 구경거리’를 신조로 삼는 김원철 아저씨의 얼굴에 함박웃음 꽃이 피었다.
거의 자동 반사 수준으로 탁, 하고 나온 대답.
“한화로 5억 원. 크흐, 이 양반 일당이 어지간한 임원 연봉이여.”
“그렇죠? 자, 10배 곱하면 50억 원. 코쟁이 아저씨, 이거 배상하시겠습니까? 당신 안 하면 파산이야.”
울상을 지은 채, 고심하는 코쟁이 아저씨.
아직 채 마르지 않아 지린내가 진동하는 바지춤을 손으로 부여잡은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놘 몬 해요. 파산이 죽음보다 좋은 거다.”
“누가 죽으라고 합디까.”
“죽는다! 저거 안에 타면 위험하다!”
도저히 못 하겠다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
이래서야 안 된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겁 많은 코쟁이 아저씨의 기술을 쓸 수 있으면서, 원자력 발전소 안에 장갑차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이.
“그러니까, 직접 저 소형 장갑차 안에 안 들어가면 된다는 거네요?”
“응? 그건… 그렇기는 하다.”
어리둥절한 모습의 코쟁이 아저씨.
나는 고개를 돌려 유세나 보좌관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이 있는지에 대해서.
“유세나 보좌관. 그때 썼던 그거, 있습니까? 히나 공주랑 검도할 때 쓰던.”
“제 가방 안에 있습니다만. 회장님, 설마…?”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제가 유세나 보좌관더러 원자로 중심으로 가라고 하겠습니까?”
뭘 생각한 건지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유세나 보좌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끼는 부하직원을 사지(死地)로 보낼 생각은 없다.
“크흐, 역시 우리 회장님이야! 대타로 들어갈 백업 기술자가 있었구나!”
환희의 탄성을 지르는 김원철 아저씨. 뭐, 결과적으로 보면 비슷한 내용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거 없습니다.”
“응? 그럼… 잠깐만. 설마?”
과정이 좀 다르다는 것이 현재 상황일 뿐.
나는 유세나 보좌관의 가방에서 헤드셋을 꺼내 쓰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스스로도 조금…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바타 놀이. 이번엔 제가 직접 합니다. 까짓거 코쟁이 아저씨 오더에 목숨 한번 제대로 걸어 보죠.”
* * * *
“어… 잠깐만. 그러니까, 회장님이 직접 들어간다고? 저기 원전 속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통신으로 이 코쟁이 아저씨가 말하는 대로 회장님이 직접 조종한다고? 보호복 입고서?”
“그렇다니까요.”
머릿속이 복잡해진 듯한 김원철 아저씨. 당황함에 살짝 침도 흘리는 모습이 오늘따라 영 지능이 낮아 보일 정도다.
“어어….”
“김 비서실장님! 어어는 무슨 어어예요! 당연히 안 되지!”
그리고 이 멍한 침묵을 깬 것은 단연 유세나 보좌관이었다.
“회장님, 이게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것, 알고 계시기는 하시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째서…!”
잘 알고 있다마다.
방사능 샤워가 위험하다는 건 나도 익히 아는 바이다. 그걸 선호하는 이상 성욕도 있지 않고.
그러나.
“저 말고는 적임자가 없으니까요.”
“적임자가 왜 회장님 하나인 건데요!”
“원자력 발전소 내부를 아는 사람. 소형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로봇 팔 기술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도를 가진 사람.”
“…….”
“저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약간 울먹이는 듯한 유세나 보좌관.
그녀의 감정선이 한계를 넘을락 말락 할 때, 김원철 아저씨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니, 잠깐만. 나도 셋 다 포함되는디.”
“키가 너무 커요. 지나치게.”
“아차…!”
납으로 된 떡장갑을 두른, 소형 장갑차. 그 조종석은 딱 170cm 정도의 사람이 엎드릴 만한 공간만 있었다.
제아무리 다리를 접고 온몸을 웅크려도 180cm 초반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한계인.
“솔직히 김 비서실장님 학창 시절 별명이 자벌레 아니었습니까. 키는 186cm라 크긴 큰데, 허리는 너무 길고 다리는 또 너무 짧다고.”
“아픈 상처지. 그래서 첫사랑 그녀에게 고백했다 차였고.”
“이해합니다. 남자로서 로맨스 한 조각은 가슴에 품는 법이죠.”
남자들의 슬픈 첫사랑 이야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뿔이 난 채 언성을 높이는 유세나 보좌관.
“지금 첫사랑 얘기할 때예요? 다른 대안을 찾아야죠! 도쿄에서 군경이 올라오면 그쪽이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고요!”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갑니다.”
“네…?”
“일본은 보신주의 문화가 강합니다. 관료는 더 그렇고요. 재난 컨트롤 타워의 수뇌부가 나까무라 사장 같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도 요정에서 깨어날 생각을 않고 꿈나라에서 체류 중인 나까무라 사장.
내가 알기로는 이 나라 관료들은 소방이나 군경이나 비슷했다. 보신주의에 절어 있다는 것이.
“물에 옷이 젖을까 무서워 노도 저을 생각이 없는 사공들. 그런 치들이 많으면 산은 고사하고 우주로 안 가면 다행이겠네요.”
-쿠구구궁!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울려대는 굉음. 아무래도… 슬슬 파멸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진짜 시간이 없네요, 이젠. 진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코쟁이 아저씨?”
“뇌 이룸 코쟁이 아뉘다.”
내 대화를 한참 듣고 있던 코쟁이 아저씨. 자신이 장갑차에 타지만 않는다면, 아바타 게임 정도는 할 의향이 충분한 모양인가 보다.
그는 내가 건넨 통신기기를 받아 들었다.
“됐고요. 일단 통신은 휴대전화로 합니다. 만약 신호가 끊기면 무전기로 하고요.”
“그거까지 끊기묜, 그때는?”
“운명에 모든 걸 맡겨야겠죠.”
“God, damn it!”
그래. 진짜 갓뎀이다.
나라도 좋아서 이 짓을 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이 최악의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라면, 그저 묵묵히 나아갈 수밖에.
방사능 차폐복을 입고 소형 장갑차 안에 온몸을 구겨 넣은 나는, 핸들을 잡고 시동을 걸었다.
“시작합니다. 와타나베 소장님, 발전소 보안 장치 전부 오픈해 주세요. 바로 들어갑니다.”
“오케이!”
-철컹!
기계음과 함께 열리기 시작하는 원전 출입구.
아찔한 수증기가 소형 장갑차 앞 유리를 가렸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 눈에 내부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원자력 발전소였던 것의 풍경이.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