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87화 (187/300)

187화 준사마(1)

결심을 마쳤으면,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터.

버튼 몇 개를 누르고 묵직한 레버 하나를 들어 올리고서야 열리는, 오른쪽 해치.

납으로 된 이중문이 열리고 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바깥을 향해 뛰쳐나갔다.

“크윽, 무슨 압박감이 이렇게나….”

열기 때문인지 방사능 때문인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묵직한 기분.

보호복 아래에서 주변의 모든 독소로부터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것.

“빨간색, 빨간색 선. 이거구나. 빨리해야겠다.”

나는 끊어진 빨간색 선 두 군데에 표식용 테이프를 감고는, 그대로 다시 장갑차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방사선 차폐가 되는, 납으로 만든 장갑을 칭칭 두른 차량이기에, 아직은 안전한 내부.

“후우… 들리십니까? 지금 마킹을 끝내고 장갑차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코쟁이 아저씨?”

-어? 회짱뉨 안 죽었따! 살아 있따! 내 말이 맞았따!

서양인 기술자 이 양반은 무슨 내 목숨으로 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손뼉을 치는 그의 모습은 가볍게 무시하자. 지금은 그저 닥친 현실에 집중할 때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죽는 게 기본값인 겁니까. 아무튼… 빨리 로봇팔 조작부터 진행합시다.”

-Okay! 거기 오른쪽 맨 위에 손잡이 땅긴다. 세 번째 칸까지 꾹 땅긴다!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살짝 정신이 혼미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무너진 골조로 인한 충격에 잠시 의식을 잃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아까 전 무리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부득불 장갑차 바깥으로 나갔다 돌아와서일까?

인중 아래로 흐르는 뜨거운 코피. 그 비릿한 느낌을 입술에 머금어도 좋다. 그저 지금은, 최대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더, 더, 더… 레버 더 위쪽으로! 회쫭뉨, Very nice!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접합되는 빨간색 전선.

카메라 너머의 영상에서 보이는, 무채색의 불꽃에 넋을 잃으려 하는 그 순간.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했다.

“끝이다. 내가 할 것은 전부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입 안 가득 머금은 핏물에서 올라오는 쇳내.

“하늘에 맡기는 것뿐인가….”

분명 입안만큼이나 붉게 충혈된 두 눈을 깜빡거린 나는, 이제는 흐릿해진 시야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며 말을 내뱉었다.

“냉각수 공급장치. 재가동시키겠습니다. 카운트다운 없이 바로 버튼 누릅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떨리는 손가락이 둥근 버튼 위에 놓였다.

왜 이렇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까? 몸을 기울이고 나서야 비로소 눌리는 버튼.

-한서준 회장님….

와타나베 소장의 우려하는 목소리.

잘 되어가는… 건가?

점점 정신이 몽롱해진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조금만 더….”

서서히 감기는 두 눈.

그러나, 점점 내 몸을 잠식하던 몽마(夢魔)가 잠시 뒤로 물러난 것은,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 굉음이 있어서였다.

사방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강한 물줄기 소리가.

-와아아아아아! 성공! 성공이다! 냉각수가 나오고 있다!

통신 기기 너머로 들리는 환호성만큼이나 벌겋게 달아오른 원자로.

원래대로라면 땅을 녹이고 품고 있던 방사선을 온 세상에 퍼트릴 뻔했던 그 원자로를 차디찬 냉각수가 식히고 있었다.

“성공… 했다.”

고열의 원자로에 닿아 순식간에 증발되어 미친 듯한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물줄기.

그 수증기 때문일까?

내 눈앞 또한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시야가… 너무 뿌옇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으로 움직이는 몸뚱이.

운전대를 꽉 쥔 채로 혼미해진 정신은, 덜컹거리는 진동에 온몸을 맡기며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디론가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바깥인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감기는 눈꺼풀.

환한 빛이 비추고 있음에도 눈을 뜨지 못한 나.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회장님! 한서준 회장님!

그리고,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긴 긴 잠에 빠지고 말았다.

“끝이다.”

* * * *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1억 3천만 일본인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한국인이 해내다니요. 안 그렇습니까, 교수님?

꿈인가?

제법 깔끔한 발음과 문어체에 가까운 어투 탓에, 어설픈 일본어 실력임에도 곧바로 해석되어 들리는 문장. 거의 아나운서들이나 할 법한 말투다.

-아무래도 한서준 회장, 그분의 결단은 참 시의적절했다. 정말 빠른 상황 판단 능력으로 전 세계적 대재앙을 막아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겠네요.

-만약 한서준 회장의 영웅적 행동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허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그려. 아마 일본 열도 전체의. 아니, 어쩌면 태평양을 둘러싼 전 세계에 파멸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조금은 낯부끄러운 찬사 때문에 조금씩 굳어 있던 몸이 움직이려고 한다.

잠깐만, 굳어 있던…? 도대체 얼마나?

-네, 그럼 여기에서 다시 당시 현장 상황을 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경찰과 소방 인력이 딱 도착하자마자, 모든 것을 끝마치고 장갑차가 나오는 모습이….

움찔, 한번 힘이 들어가자 드디어 움직이는 손가락.

신경계에 한 번 신호가 돌자 어둠 속에 있던 내 몸이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었다.

마스크 아래 텁텁한 기운이 싫었는지, 곧장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

“쿨럭! 쿨럭!”

“어? 일어났다! 한서준 회장! 괜찮아? 말 좀 해 봐!”

TV 소리가 묻힐 정도로 대성박력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누군가의 모습.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 그리고, 반강제로 나를 일으켜 세운 그 사람은 바로.

“히나 공주님…?”

“살았다! 한서준이 살았어! 의사 양반! 빨리 이리로 와 봐요!”

분명 병원이건만, 방사능 보호복을 입고 있는 히나 공주. 뒤따라 들어온 의료진 또한 마찬가지로 단단히 중무장한 상태였다.

도대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거람?

“잠시만 진정해 주십시오, 공주님. 일단 생명에 이상이 있는지 검사부터 해야 합니다.”

아예 검사 장비를 병실 안으로 옮겨, 이런저런 검사를 몇 시간 동안 해나가는 의료진.

한낮의 해가 서산 너머로 걸려 오렌지색 노을을 창가에 드리우고 나서야, 모든 검사가 마무리되었다.

“다행입니다. 방사선 자체에 피폭이 안 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 심하지가 않네요.”

정말 다행이었다. 목숨을 건 도박치고는 판돈이 제법 싸게 먹혔으니까.

뒤이은 의료진의 보고는 나로서도 제법 한숨을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백혈구 수치, 적혈구 수치 모두 조금 낮긴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정상 범주 이내입니다.”

“그럼, 다른 문제는 없다고 봐도 될까요?”

“정밀검사를 하긴 해야겠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약물치료만 짧게 하면 될 정도로요.”

의료진이 나가고 나니, 그제야 풀린 긴장감.

“어찌어찌 살긴 살았나 봅니다.”

“뭬야?”

딱딱한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 했건만, 오히려 성을 내는 히나 공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아니지, 질문을 바꿔서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은 나고?”

그녀는 내가 정신을 잃고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통제를 잃고 바깥으로 질주해 아름드리나무에 처박힌 장갑차. 차량 외부에 묻은 방사성 물질 탓에 곤란했던 구조 작전.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져 근 열흘 가까이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던 것까지.

“…난리가 났긴 했네요.”

“진짜, 당신 죽을 뻔했어. 방사능 사고 전문 소방대원 말로는, 보호복이 조금이라도 찢어졌으면 바로 사망이었다고 했으니까.”

어지간히… 위험한 작전이기는 했다.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하늘이 돕긴 도왔나 봅니다.”

“지랄하네, 진짜 말 주접은… 아무튼.”

갑자기 지퍼를 열고는 보호복 상의를 벗기 시작한 히나 공주.

“후, 이제 좀 살겠네.”

더웠는지 땀에 젖은 머리칼을 흔들며, 그녀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그거 벗어도 됩니까? 저 피폭 환자인데요?”

“아, 의사 양반이 괜찮다잖아. 피폭도 적게 되었다며. 그리고, 당신한테 줄 것도 있고.”

“줄 것이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잡고 얼굴을 붉히는 히나 공주.

“…….”

뭔가… 이 사람. 머릿속 회로 하나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대뜸 내게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하는 그녀.

“그, 공주님?”

“닥쳐봐, 지금 부끄러우니까. 내가 보일 수 있는 성의는 이게 다라는 것만 기억해.”

진짜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눈을 감고 금붕어처럼 입술을 내미는 히나 공주.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올려 방어막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성의는 됐고요. 뒤를 좀 보시죠. 뒤를.”

“뒤…? 끄악!”

잠시 머리 위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별이 보이는 것만 같은 히나 공주.

그녀의 뒤통수에 정의의 알밤을 먹인 사람은 바로… 일전에 나와 만났던 그 남자, 일본의 총리대신이었다.

“내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주님. 이 무슨 추태입니까.”

“아, 진짜. 아저씨!”

서로 친분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약간 뭐랄까, 말썽꾸러기 조카와 엄격한 삼촌 관계 같은?

“꼴에 총리대신 달았다고 아주 잔소리는…!”

“반성하시고, 잠시 나가 계십시오. 덴노께서 이번 일을 아시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약아빠진 늙다리.”

축객령과 함께 병실 바깥으로 쫓겨난 히나 공주.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총리대신이 내게 말을 건네었다.

“한서준 회장님?”

그러고는, 아까 히나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방호복 상의를 벗는 총리대신.

“아, 예… 그런데 그, 방호복 마스크는 어째서 벗으시는 건지…?”

뭔가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1분도 안 되어 다시 덮쳐오는 건 사양이다. 그것도 이런 아저씨라면 더더욱.

“은인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면, 마땅히 예를 갖추어야 하니까요.”

“네?”

다행히도, 내 우려와는 달리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는 총리대신.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라 허리도 포함이었다.

숫제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예를 표한 그는, 내게 다소 오그라들지언정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를 내뱉었으니까.

“1억 3천만 일본 국민 전원을 대신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회장님께서는 최악의 재앙을 막으신, 일본의 영웅이십니다.”

“네…?”

갑자기 하루아침에 획득한, 팔자에도 없는 ‘일본의 영웅’ 타이틀.

아직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던 그때까지는, 나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퇴원하고 난 후, 귀국길에… 일본 자위대 군악대가 공항까지 도열해 국빈 대우를 해주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