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88화 (188/300)

188화 준사마(2)

공항으로 가는 차 안.

도쿄 하네다 공항에 이르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길가에 늘어선 일본 육상 자위대 군악대원들의 모습이었다.

“일동! 받들어 총!”

“총!”

알록달록한 색옷을 입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그들.

심지어 무슨 내가 국가 원수도 아니고, 아예 차량 자체도 위가 뻥 뚫린, 선 채로 사열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자동차였다.

이런 게… 최고 존엄의 느낌?

북한 돼지 김정은은 어떻게 이 부담스러운 열기를 받으면서 매번 좋아할 수 있는 거지?

-빰! 빰! 빰! 빰!

타악기와 관악기 합주를 가까이서 듣자니 귀가 아플 지경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어지간히 재미있는 모양인지, 옆자리에 앉아 킥킥거림을 멈추지 않는 김원철 아저씨.

“크크크, 세상천지에 외국인이 집에 가는데 자국 군악대가 환송식 치러주는 데는 또 없을 것이여.”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심지어 사우디 쿠데타 당시에도 이 정도 대접까지는 못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그쪽은 이런 정성 어린 사열 대신 빳빳한 현찰 다발을 내게 흔들었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거고.

“와아아아아아! 준사마! 준사마!”

간신히 군악대가 있는 지역을 빠져나왔나 싶더니만, 이건 또 뭐람.

내 쪽을 향해 달려오는 무수한 일본인 아녀자들.

그들의 손에는 살짝 미화된 내 모습이 그려진 피켓이 들려 있었다.

“아니, 잠깐만요. 저기, 저 준사마 어쩌고 하는 또 뭡니까.”

“아아, 병원에만 있었으니 몰랐겠구먼. 우리 회장님, 지금 일본 여자 인기투표 1위라네. 그래서, 그 왜 있잖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저 표정.

일본에 최초로 한류를 불어넣은 그 드라마 이름을 언급하며, 김원철 아저씨는 이 앙증맞은 소동에 대한 해설을 이어나갔다.

“욘사마에 이은 준사마. 하여간, 이렇게 여복이 터졌으니 탄약그룹 후계 문제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을 것이여.”

“…환장하겠네요, 여러모로.”

그렇다. 환장할 노릇이다. 정말로.

차에서 내려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데도, 자석에 붙은 철 가루처럼 계속 나를 따라오는 수백여 명의 군중들.

“준사마! 준사마! 사랑해요 준사마! 히나 공주님과 예쁜 사랑을!”

나를 사랑한다는데, 왜 히나 공주와 예쁜 사랑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이 상황 자체도 모르겠으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영업용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는 것뿐이겠지.

“하하… 감, 감사합니다, 일본 국민 여러분.”

“와아아아아아! 준사마가 나를 보고 웃었어! 꺄아아아악! 여기도 손 흔들어 줘요!”

괜히 했다. 더 가까이 몰려드는 군중의 열기와 함께, 1초 만에 찾아온 후회.

이 유사 슈퍼스타 체험은, 내가 출국장을 넘어 전용기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종료되었다.

“후우, 이거 쉽지 않네요. 팔자에도 없는 한류 스타 꼴이라니.”

“흐흐흐. 내가 볼 때, 이건 팔자에 확실하게 있는 거 같은디? 이제까지 전적이 워낙 화려하잖어, 읏차.”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전개하는 김원철 아저씨.

내가 무어라 반박을 하기도 전에, 아저씨는 위스키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대화 주제를 바꿔버렸다.

“그보다, 총리대신 그 양반이 선물 보따리를 한가득 안겨 주었다고?”

“아아, 그랬지요. 대충 규모로만 따지면… 당분간 탄약그룹에 일본만 담당하는 계열사 하나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요.”

그때, 병원 VIP실에서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숙연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건네던 총리대신.

비행기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총리대신의 말을 곱씹었다.

‘일본국 정부는 한서준 회장님께. 아니, 회장님 개인을 넘어 탄약그룹 전체에 충분한 사례를 하고자 합니다.’

* * * *

그리고, 그의 말에 한참을 뜸을 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연 나.

‘일단, 과찬에 가까운 그 말씀은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총리대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나는, 최대한 그의 표정에 숨은 저의를 읽어내려 애썼다.

단순한 호의로 꾸며진 것 너머의 다른 것을 보기 위해서.

‘마냥 인간적인 감정만 담기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총리대신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지금 계신 자리의 문제 때문에 말입니다.’

‘이야기가 빨리 통할 것 같아서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마음에 듭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으시니.’

못 당하겠다는 듯, 양쪽 어깨를 으쓱이던 총리대신.

그는 병실 바깥을 향해 목청을 높이어 보좌진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이봐! 그것 좀 가지고 오게.’

‘예, 총리대신 각하.’

총리대신의 취향에 맞게 정갈한 비단 커버로 장식된 두툼한 문건.

그 맨 앞표지에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로도 적힌 제목은…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안전관리 총괄 프로젝트

‘이건…!’

‘먼저 유쾌한 선물 보따리부터 푸는 것이 불쾌한 청구서를 보이는 것보다 낫겠지요.’

청구서고 나발이고 일단 선물 보따리부터가 우선이다. 너무나도 영롱하게 황금빛을 뿜어대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 무려 20여 기의 발전소를 새로 짓고 기존 노후 원전을 모두 교체하는 대형 사업.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시 진정시킨 나는 곧바로 페이지를 넘겨 숫자로 가득한 마지막 장을 펼쳐 보았다.

‘25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에 안전관리 총괄 부분 사업비만 1조 엔…?’

‘선지급 30%에 나머지는 단계별로 지급하게 될 걸세. 이런 파격도 없지.’

1조 엔.

2011년 지금 시점 환율을 기준으로, 한화 12조 원에서 13조 원 사이의 막대한 규모.

정말이지 사업가라면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는 규모다.

그러나.

‘일단…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물론 이런 초대형 먹거리를 그냥 줄 리는 없을 터.

침착한 눈으로 돌아온 나는 총리대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 정도 규모의 사업. 자국 기업이 아닌, 외국에 맡기기에는 심히 난감하실 텐데요.’

빙그레 웃음 짓는 총리대신.

그는 즉답 대신 더 말해보라는 턱짓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려야겠지.

‘기술 개발 기회를 잃는 것, 혹시 모를 보안 위험이 생기는 것, 거기에 더해서.’

아니지, 이런 이슈들은 실무 관료들에게 중요한 내용일 터.

총리대신. 일국의 국가원수급이, 그것도 민주정 시스템 하의 지도자가 가장 신경 쓰일 부분은 바로.

‘정치인의 생명인 지지율 이슈까지도.’

정답을 맞힌 모양이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총리대신.

‘바로 보셨습니다. 물론 앞의 두 가지 부분은 저희 쪽에서 추가로 조치를 할 것입니다.’

‘그야 이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건은. 글쎄요, 한 회장님께서 고려하실 부분이 아니긴 하겠습니다만.’

어물쩍 넘어가려는 이 남자.

하지만, 뻔하다. 정치가가 이런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보통.

‘…반대쪽 정파가 밥줄로 삼는 것이 원자력 쪽 비즈니스군요.’

‘역시 일본의 영웅답게 기민하십니다. 훌륭한 판단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되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내가 굳이 일본 정계에 더 깊숙이 관여할 생각은 없다. 내 나라도 아닌걸.

어차피 이런 거대한 사업권도 의도치 않게 가져오게 되었으니, 저쪽 집안 사정이야 알아서 하게 두면 그만이다.

‘아, 한 가지 더.’

‘네?’

‘선물입니다. 가시는 길, 꼭 비행기 안에서 펴 보시길.’

보좌진을 시켜 상당히 고풍스러운 족자(簇子) 하나를 가져오게 한 총리대신.

금박으로 수놓은 분홍색 비단을 칭칭 말은 그 두루마리 족자에는 뭔가 묘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회장님께서 히나 공주 때문에 엔터 사업에 손을 대신다지요? 이것도 나름 엔터에 속한답니다. 아주 옛날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가 뜬 다음 열어본 두루마리.

거기에는… 뭐랄까, 상상도 못 할 만한 것이 그려져 있었다.

총리대신, 이 양반의 머릿속을 한번 해부해 보고 싶을 만큼.

* * * *

“으흐흐, 이 양반 취향도 진짜 어마어마하네. 역시 문화강국의 최고지도자다워.”

“조용히 좀 하세요, 제발. 히나 공주가 들으면 또 쓸데없는 난리가 납니다.”

춘화(春畫).

총리대신이 서예와 그림에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지워지지 않은 먹물이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옛날 풍의 그림까지 그려댈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나와 히나 공주가 주인공인, 19금까지는 절대 아니고 한 17금 정도 되는 야리꾸리한 그림을.

“딱 보니 주책맞은 영감님이 젊은 친구들더러 예쁜 사랑 하라는 거잖어. 흐흐흐.”

“…예쁜 사랑인 건 모르겠고, 위장 사랑인 것쯤은 총리대신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건 영원히 봉인이다. 집안 금고에 두고 영영 기억에서 잊어야 할 정도로.

술맛이 올랐는지 콧노래를 부르는 김원철 아저씨. 안주로 나온 하몽을 멜론에 싸 먹으며, 이 대머리 술꾼은 다시 화제를 일로 돌렸다.

“뭐, 그래도 제대로 얻어는 왔네.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안전관리 프로젝트, 설마 그걸 떼어 줄 줄은 몰랐는디.”

“아예 이번 재난을 기회 삼아 당내 반대파를 날려버릴 생각인 듯합니다. 자금줄 말리는 김에 어부지리로 얻어걸린 셈이죠. 거기에.”

거기에 추가로 달린 혹 하나.

일본 쪽 사업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는 한국 쪽에서 해야 할 사업.

탄약그룹과 평생 연이 없어 보이던 그 사업은 바로.

“팔자에 없던 엔터 사업까지도.”

“흐흐흐. 아무래도 작은 사모가 고생 좀 하게 생겼어야.”

“집에 오래 계시니 몸이 찌뿌둥하다고는 들었습니다. 거기에, 계속 할머니하고 같이 붙어있는 것도 좀… 코드가 안 맞는달까요?”

엄마와 할머니.

아무리 요사이 사이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서로 한 성격 하는 분들이니만큼, 가끔 충돌이 있다고는 들었다.

특히나, 할머니가 실무에서 손을 떼고 거의 은퇴를 한 후로부터 그 빈도가 조금 더 늘어났고.

그리고 그 모든 걸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는 김원철 아저씨.

“아무리 사이가 나아졌다 한들 마귀할멈 성격 받아치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여. 날 봐.”

“그건 본인이 자꾸 할머니에게 맞을 짓을 골라서 하니까 그런 거고요. 아무튼.”

도쿄에서 인천까지 2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거의 다 왔네요. 별로 마음에는 안 들지만, 집보다 먼저 가야 하는 곳도 있고 말입니다.”

“아아, 그 능구렁이 아저씨?”

“마지막 보고는 해야죠. 그래도 나름 일본 특사단 일원이었으니까.”

푸른 기와집에 들어앉은 능구렁이 아저씨. 대통령은 안 그래도 아주 잔뜩 신이 난 듯, 내게 빨리 귀국하라고 주책을 떨고 있었다.

또 무언가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뭔지는… 일단 돌아가고 나서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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