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준사마(3)
“하이고! 마, 일본 구원자 한서준 회장님 오셨십니꺼! 내도 딱. 여 와가 기다리고 있었어예.”
청와대에 들어가자마자 귓가에 꽂히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김 교수의 목소리.
아직 낮인데도 벌써 술을 한잔 걸친 모양이었다. 탁자 위에 일본 사케가 두어 병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구원자 딱지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아, 영웅 딱지도 사실 좀….”
“하긴예. 이미 준사마 타이틀 다신 분인데, 구원자니 영웅이니 죄 하빠리 아이겠십니꺼? 그렇제예, 우리 대통령님아?”
부담스럽다고 말을 해도 꼭 2절까지 하는 술주정뱅이 김 교수.
그나마 대통령은 술을 반주 삼아 마신 정도였던 것 같다.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추임새를 넣는 능구렁이의 모습.
“무슨 사마 어쩌고 하는 게 그 동네 왕족에 붙이는 칭호라지? 이쯤 되면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먼.”
“크흐, 여윽시 뭘 좀 아신다 아입니꺼. 내 친구 하나는 잘 두았어!”
두 사람이 고향 친구라고는 들었지만, 진짜 제법 친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막역한 사이임을 내게도 기탄없이 보이며 자기들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중년 아저씨 둘.
웃음소리가 적당히 꽃피고 나자, 대통령은 김 교수에게 넌지시 자리를 비워달라 요청했다.
“하하하. 나도 길게 이야기 나누고는 싶은데, 일정이 촉박해서 말일세. 김 교수는 잠깐 나가 있겠나?”
“왐뫄. 내가 눈치가 읎었네. 그라믄 두 사람 재미지게 이야기들 나누이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는지라, 순식간에 자리를 뜬 김 교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대통령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씨도 풀렸는데, 조금 걷지 그러나.”
“좋습니다.”
참 야외 활동을 좋아하는 대통령. 이 양반, 한겨울에는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건가 싶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잔디밭. 고무 공을 던져 복실이에게 물어오게 한 그는, 기지개를 켜고는 내게 말을 건네었다.
“곱씹을수록 대단하구먼. 한 회장.”
“하늘이 도운 것이지요.”
“이 사람, 겸손은. 생각 이상으로 잘 풀렸어. 한일관계 개선에 공주와의 스캔들에.”
“그 뒤에 건 좀 빼주시고….”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짓궂은 미소를 잃지 않는 대통령.
“사내로서 자랑거리지. 나이 들면 다 그런 추억을 곱씹으며 사는 게야.”
“아, 예.”
“아, 참. 그래서 말인데.”
그냥 일 이야기나 하지, 대통령은 쓸데없이 이런 쪽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주책맞은 아저씨에게 마음먹고 한마디 할까 고민하던 차에 들려오는 그의 달라진 목소리.
“음, 이건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에 그러는 건데 말이지.”
분위기마저 뭔가 살짝 바뀐 상황.
조금 난해한 퍼즐을 처음 받아본 아이처럼, 표정을 찌푸린 대통령은 내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 히나 공주와 그 수행원들 말일세, 따로 정보 들어온 게 있나? 특히 여자 수행원들.”
“왜 그러십니까?”
“사실은 말이지. 그게….”
말끝을 흐리는 대통령.
뒤이어 그가 내게 말한 내용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내게 다가올지는, 이때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 * * *
“자, 그럼 제군들! 출발!”
인천공항. 비행기에서 내려 신바람이 잔뜩 난 히나 공주.
극도로 엄격한 궁내 생활에서 벗어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느낀 그녀였으나, 함정 카드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세상에 감당할 수 없는 텐션이 있다면, 그것을 짓누르는 억제기도 있는 법.
“히나 공주님. 침착 좀 하시지요. 한국 가시면 최대한 행동거지에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잔소리 폭풍으로 히나 공주의 귀를 따갑게 만드는 여성 수행인.
이제 막 서른이 넘은 것처럼 보이는 나이. 큰 키에 은테 안경을 쓴 그녀는 차가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번 그런 식이더라, 마리아는. 너무 빡빡해.”
“주님의 어린 양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규율은 생활과도 같은 법입니다.”
“윽, 광신도….”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 마리아.
종교 세가 약한 일본에서는 조금 특별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나, 히나 공주의 수행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나마 히나 공주가 말을 들어먹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에.
“잊은 건 없으니, 이만 출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주님.”
“거봐, 괜히 과잉보호라니까, 마리아는.”
“저는 끝까지 공주님을 보호할 겁니다. 세상의 위험이든 세상 외의 위험이든 모두.”
“응? 뭔 소리여, 그건.”
머리 위에 자그마한 물음표 하나를 올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히나 공주.
마리아는 그 물음에 즉답 대신 소매 속 묵주만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 알 수 없는 미소만을 입가에 건 채로.
“마리아?”
“떠날 시간입니다. 늘어지지 마시고, 어서 바삐 움직이십시오.”
“알았어, 잔소리는 진짜.”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공항 바깥으로 걸어가는 히나 공주.
새로운 세상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공주의 뒷모습을 본 마리아.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해서는 안 될 뒷말을 이어붙였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약속의 그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 * * *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대통령 때문에 귀국하고서도 본가에도 못 들르고 곧바로 일부터 하게 되었다. 뭔가 일복이 자꾸 터지는 것이,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운명인가 싶다.
“흐음… 딱히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아까 전, 청와대 잔디밭에서 곤란한 듯 말끝을 흐리던 대통령의 모습.
나는 뭔가 촉이 와도 단단히 왔다는 티를 내던 그 정치 요괴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때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그쪽 공주 말일세, 히나 공주. 조금 희한하단 말이지.’
‘그건 너무 당연합니다. 일종의 공리(公理) 비슷한 거라고 해야 하나요. 수학 공식처럼.’
히나 공주가 희한하다니, 그게 뭔 당연한 이야기란 말인가.
그 또한 납득이 간 모양이었다. 곧바로 세부적인 정정을 가하는 대통령.
‘아니, 아니. 히나 공주가 왈가닥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주변 사람들.’
‘주변 사람들이요? 같이 한국으로 딸려온 수행원들?’
‘그렇지. 국정원 조사로도 밝혀진 바가 전혀 없어. 그렇다고 남의 나라 VIP 수행원에게 심문이나 조사를 한다는 건, 뭐랄까.’
‘거하게 싸우자는 거겠죠. 외교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통령.
내가 만든 평화 분위기에 편승한 그는, 아예 이를 업적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글러브에 들어간 고무공을 힘껏 던진 대통령은 내게 그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일관계가 개선되고, 그걸로 선거 콘셉트를 잡아 두어서 불필요한 마찰은 꺼리고 싶더군. 이게 다 한 회장이 만든 인과율이고.’
세상에, 설마 이걸 내 탓을 하겠다고?
기가 차서 입을 벌리고 있는 와중에, 내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는 대통령.
역시 얼굴에 이 정도 철판은 깔아야 국가원수도 해먹는 건가 보다.
‘그러니, 한일관계의 교두보이자 일본의 구원자, 준사마께서 좀 유의 깊게 봐 주게.’
‘아니. 제가 왜.’
‘대관절 그 수행원들이 뭐 하는 친구들인지, 뒤에 켕기는 게 있는지 등등. 사고 안 터지게 관리하란 말이야.’
‘대통령님. 그러니까, 그 말씀은 지금 저더러 감시를….’
민간인 사찰, 그것도 외국인 공주 수행원에 대한 리스크를 굳이 내가 짊어질 이유는 없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거절하려는 그때.
‘아, 원자력 관련 규제 해제와 수출입은행 자금 지원은 2분기 이내에 끝마쳐 줌세. 한일교류기금 사용승인은 이미 해 두었고.’
이유가 없다면 이유를 만들어 준 대통령.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특혜였다.
너구리 같은 정치 요물 같으니.
‘제가 꼭 해야지요. 그 감시.’
‘역시 한 회장이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핵심을 잘 알아듣는구먼.’
개떡 같은 요구를 해 놓고서 어찌어찌 그걸 관철시키니 좋단다.
굳이 이 양반 생각을 더 하자니, 머리통만 아플 뿐이다. 나는 앉은 채로 핑그르르 의자를 한 바퀴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망할 너구리.”
그냥 엔터 회사 숙소에 집어넣고 신경 끌 생각이었건만, 자꾸 A/S 요구가 여기저기서 빗발친다. 어쩔 수 없는 팔자인가 보다.
“뭐… 그래도 수행원들 조사는 좀 해야겠지. 일단 히나 공주를 한국에 불러들이고 아예 신경 끄고 살 수도 없으니까.”
-똑, 똑, 똑.
그 순간, 내가 결심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타이밍 맞게 울리는 노크. 휴가 중인 유세나 보좌관을 대신해 다른 비서실 직원이 내게 말을 건넸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아, 바로 준비해 주세요.”
새롭게 만들어질 엔터 회사 주인장이 되실 엄마.
살면서 경영은 처음 해 보시는 것일 텐데, 일단 진득하니 이야기나 좀 해 봐야지.
* * * *
몽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두컴컴한 교회 안.
시골 마을 한적한 곳에 떨어진 그 교회에서는 야밤의 통성기도가 열리고 있었다.
“마귀들의 세상에서 고통받으시는 형제님들, 그리고 자매님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 중인 사이비 종교, <주님의 동산>.
그리고, 이 사이비 종교의 교주 박금덕. 신도들을 갈취해 음반 회사 여러 개를 가진 그녀는 대외적으로는 중년 사업가의 탈을 쓰고 있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의 대리인을 참칭하는 이단에 불과했지만.
“거룩하신 주께서 내려주신, 이 손바닥 안의 눈! 오로지 이 눈에만 보이는 심판의 날! 이제 저는 이 눈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 할렐루야!”
향에 무언가 약물 비슷한 것을 섞은 모양이었다. 심장을 울리게 하는 음악에 더해, 일종의 최면 비슷한 상태로 빠져든 사람들.
사이비 교주 박금덕은 한 남성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
“형제여! 그대 가슴 안에 든 영혼은 심판 앞에서 당당한가?”
“믿습니다! 주여!”
눈물을 흘리는 남성.
반쯤 게거품을 문 여성의 어깨를 꽉 잡은 박금덕이 외쳤다.
“자매여! 그대 마음속 사탄을 복음의 쇠사슬로 칭칭 묶어두었는가?”
“아멘! 아멘! 아멘! 아멘!”
방바닥 위에 널브러져 집단적 트랜스 상태가 된 신도들.
그들 가운데 우뚝 선 박금덕.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통성기도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다.
“이제 곧! 그날이 오게 됩니다. 심판의 날, 방주에 올라타 멸망하는 세상! 그 위에서 새로이 시작할 우리 <주님의 동산> 신도들이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믿습니다!”
그녀가 장막 뒤로 모습을 감추고서도 한동안 통성기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간 후에야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는 박금덕.
“후우, 멍청한 가축들. 하여간, 주기적으로 저렇게 조련하는 것도 일이야.”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녀.
이제 막 첫 번째 연기를 내뿜는 박금덕에게, 마흔 정도의 남성이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 예언가 어머님.”
“아아, 전도사. 무슨 일이지?.”
“일본 쪽에서… 으뜸 신도 연락입니다.”
으뜸 신도.
그 말에 피우던 담배마저 꺼버린 박금덕.
“으뜸 신도? 마리아 자매가? 어서 이리 주게!”
종이 서너 장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보고서. 그 정도 정보량은, 박금덕을 웃음 짓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흐흐흐… 그래, 히나 공주가 드디어 온다 이거로군.”
탐욕으로 벌게진 두 눈.
그녀는 갖고 싶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사이비 종교 세계교. 어지간한 재벌 부럽지 않은 그 막대한 교단을 뛰어넘는 종교 단체를 만드는 것을.
그리고, 그 첫 단추로 쓰일 희생양으로 지목된 자가 바로 히나 공주였고.
“자,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할까? 공주 포섭 작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