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주님의 엉덩이(3)
“으으으… 머리야. 여긴…? 으헉!”
초점 없이 풀린 동공.
입가를 적신 침방울.
깜박임조차 없던 히나 공주의 눈동자에 다시 총기가 돌아온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이후였다.
제단 뒤편에 손발이 묶인 채, 현 상황을 파악 중인 그녀.
“뭐예요? 이, 이, 이건 대체 뭔데…!”
“정신이 들었군요, 헬레나 신도. ‘주님의 엉덩이’ 원액을 마시고도 깨어나다니, 양이 좀 부족했나 봅니다.”
마리아에 의해 환각제가 듬뿍 들어간 복숭아 주스 원액을 강제로 마셨던 히나 공주.
잠시 정신을 잃고 이제야 깨어난 그녀는, 평소와 다른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흰색 비단옷? 언제 이런 옷을 입힌 거지…?”
“아아, 그건 그냥 흔해 빠진 흰색 비단옷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히나 공주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가는 마리아.
잔뜩 상기된 표정의 그녀에게는, 평소의 엄한 모습 따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기에.
“오직 <주님의 동산>에 오를, 기름 부은 자만이 입을 수 있는 천국의 날개.”
히나 공주를 꼭 안아주더니,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이 맺힌 마리아.
마치 엇나가던 막냇동생을 타일러 옳은 길로 인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히나 공주에게 속삭였다.
“그간 정말 고생 많았어요. 오늘 재림 행사만 치르면 헬레나 신도는 저와 함께 구원받을 수 있답니다.”
“마리아? 지금 뭐라고…?”
“모든 것이 끝난 후, 그때는 저를 마음껏 미워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 히나 공주님.”
환각제 묻힌 손수건을 히나 공주의 입가에 가져다 댄 마리아.
잔뜩 비뚤어진 눈웃음과 함께,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를 지옥으로 한 걸음씩 인도하고 있었다.
“으으으, 눈앞이 또 빙글빙글 돌아….”
“주님께서 이끄시는 마지막 길. 고난의 언덕을 오르는 데에, 그 정도 십자가는 마땅히 짊어져야겠지요.”
장하다는 듯, 몇 차례 등을 토닥거리고는 히나 공주를 어깨에 둘러멘 마리아.
때마침, 타이밍도 시의적절했던 모양이었다. 장막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외치는 전도사의 모습.
“마리아 신도님. 이쪽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를 때마다, 마리아의 콧잔등에 기쁨의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맨 꼭대기.
히나 공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마리아는 광기 어린 진심을 담아 축복의 말을 내뱉었다.
그녀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만끽하기 위한, 마지막 과정을.”
* * * *
“북서쪽 울타리 돌파 완료! 전진! 전진! 멈추지 않고 앞으로 전진!”
왕년의 기갑부대 출신인 연구소장. 한번 머릿속 브레이크 부품을 빼주자, 그는 이택규 사단 출신답게 진짜 탄약 사나이가 되어 트럭과 함께 온몸을 내달리고 있었다.
“신났네. 신났어. 뭐, 연구소장 이 양반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저쪽 광신도 아저씨들도….”
그렇다. 연구소장뿐만이 아니었다. 맨 바깥 울타리를 지나, 경계선이 쳐져 있는 곳을 지나갈 때마다 울려 퍼지는 광기 어린 간증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와아아아아아! 주님의 엉덩이! 주님의 엉덩이!”
“믿음 있는 자에게 축복을! 달콤한 엉덩이 끝에 달린 채 달랑거리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제게 주소서!”
단 한 명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않는 자들. 아마 세뇌 영향이 크겠지.
“맛이 갔네, 맛이 갔어. 환각제 효과인가? 연구소장님. 저기서 우회전하세요.”
“다시 태어나! 무적 탄약대대!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이 헛되질 않게!”
이쪽도 맛이 간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나마 환각제 대신 과거의 영광에 취한 연구소장이기에, 그저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성의 끈은 다시 팽팽하게 만들 어질 수 있었다.
“하, 진짜 좀… 소장님!”
“아, 예…! 회장님!”
“정신 차리시고. 차분하게 지시 사항 수행하세요. 저기 저 언덕배기 보이십니까? 오른쪽에.”
손가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가리킨 나. 그곳에는… 대리석 타일로 만든 싸구려 제단 하나가 연기 속에 가려진 채 불을 밝히고 있었다.
“넵! 잘 보입니다!”
“핸들 꺾어서 그리로 직진하세요. 뒤쪽으로 접근합니다. 최대한 빨리. 풀 악셀로!”
“알겠습니다! 악!”
기합을 잔뜩 넣고 속도를 높이는 <주님의 엉덩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 탓에 연기가 가시자, 나는 곧바로 망원경을 꺼내 들고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교주 박금덕으로 보이는 뚱뚱한 50대 여성 한 명과 함께, 옆에서 몸을 못 가눈 채 휘청거리는 한 사람.
히나 공주가 있었다. 그것도 단검 하나를 든 채로.
“히나 공주! 이런… 조금 늦은 건가?”
“회장님, 거의 다 왔습니다만… 언제 멈출깝쇼?”
다행히 아직 제단에 묶인 유대인 두 사람의 몸에 피가 흐르거나 하지는 않는 상황.
“멈추지 않습니다.”
“네…?”
그렇다. 절대 멈추면 안 된다.
아주 잠깐이라도 속도가 늦춰지게 된다면… 저 단검을 든 손에 묻는 것은 단순히 피뿐만이 아닐 것이다.
평생 씻겨지지 않을, 죄책감까지 덕지덕지 묻은 채로 그녀의 남은 삶을 쫓아다닐 게 뻔하다.
“진짜 살인 나는 건 막아야 해. 무조건.”
결심을 굳힌 나.
나는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리려는 소장의 팔뚝을 잡고는, 진지한 눈으로 그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소장님. 기갑부대 나오셨다 했죠? 일반하사까지 하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또 에이스였지 말입니다. 워낙 조종을 잘해서 부대 간부들이 반강제로 지원서 쓰게 했습죠.”
“그때 그 감성 그대로 전진하세요. 장애물이고 뭐고 다 짓뭉갠다는 마인드로.”
“네…?”
혹시 몰라 허리춤에 차고 온 지휘봉. 나는 야밤에 안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끼고는, 그 지휘봉을 꺼내 들었다.
아주 근엄한, 세계 대전을 지휘하는 대원수라도 된 것처럼.
“진짜 때려잡아야 할 적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북한 돼지만큼이나 나쁜 녀석들이요.”
이 연출이 정통으로 먹힌 걸까?
아니면, 마지막에 덧붙인 북한 돼지 어쩌고가 통했던 걸까?
비장한 모습으로 내게 경례를 올리는 연구소장.
“탄… 약!”
부릉, 다시 거세지는 엔진 소리.
이 기세를 몰아 쭉 전진뿐이다.
설령 저 제단이 붕괴되고, 다소 다치는 사람들이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
광신에 휘말려 저지른 집단 살인 쇼보다는 그편이 더 나을 테니까.
공기를 한껏 들이쉰 나는, 날숨을 내뱉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진, 앞으로! 사이비 종교를 때려 부순다!”
* * * *
“전도사, 어서 성검을.”
“여기 있습니다. 예언가 어머님.”
대장간에서 대충 만든 5만 원짜리 철검. 하지만, 이곳에서는 신이 내린 성검 딱지가 붙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주님이 이 땅에 내려주신 성검이다!”
“죄 많은 민족 유대인들이여! 심장을 바쳐라!”
불빛에 반짝이는 성검을 보고서, 잔뜩 환호성을 지르는 광신도들.
만족스러운 표정의 교주 박금덕. 그러나, 곧이어 마리아가 데리고 온 히나 공주의 상태를 본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약을 과하게 썼군. 전도사, 어떤 상태인 거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입니다. 아예 거동 자체가 어려울 정도이니.”
그 모습이 박금덕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재림 행사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
자칭 성검을 한 손에 쥔 채로,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뭐, 상관없다. 내가 뒤에서 칼자루를 쥔 손을 잡고서 그대로 내리찍으면 그만이니까.”
반쯤 혼수상태에 빠진 히나 공주. 의식이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박금덕은 웃음 지었다.
“자, 헬레나 신도. 아니지, 히나 공주. 이번 건만 잘 넘겨 보자고. 당신이 꼭두각시 외과 의사 노릇만 제대로 해내면.”
그리고, 바로 옆. 역시 환각제 탓에 정신이 나간 채로, 제단에 나란히 누워 있는 유대인 두 사람.
곧이어 피를 볼 것이라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박금덕은 탐욕의 눈빛을 칼날에 비추었다.
“일본. 그 막대한 종교 시장을 내 <주님의 동산>이 죄다 먹어 치울 수 있으니까 말이야.”
제단 아래, 연신 할렐루야를 외쳐대는 신도들. 눈으로 그들을 스윽 훑어본 박금덕은, 그녀의 전공인 심리학에 근거한 판단을 내렸다.
지금이 바로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흥분도는 이만하면 충분하고… 집단 최면도 거의 걸린 모양이로군. 좋다.”
몇 차례 가벼운 헛기침을 끝낸 후, 마이크 없이 생목으로 함성을 외치기 시작한 박금덕.
신도들의 몽롱한 눈동자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면서, 그녀는 권위가 담긴 목소리로 연설을 토해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유대인 사탄 두 마리의 심장을 주께 바치고 난 후, 구원 방주에 올라타리라! 바다 건너 동쪽 세상에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와아아아아아! 아멘! 아멘!”
충분히 달아오른 분위기.
이제… 결행의 순간이다. 피로 쌓아 올릴 그녀만의 왕국을 단단하게 세울 바로 그 순간.
“전도사, 히나 공주를 앞으로. 애가 괜히 쓰러지지 않게 조심해. 잘못해서 제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면 다 나가리야.”
“그, 예언가 어머님. 밑에 신도들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만…?”
“뭐라고?”
바람 빠진 공처럼 턱 풀려버린 군중의 긴장감.
환각제, 세뇌, 집단 최면, 심리학적 기법까지. 모든 제반 준비는 완벽했을 터.
이건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외부의 개입이 없이는 절대로 일어날 수도 없는.
“뭐, 뭐야! 왜 집중이 깨졌지? 집단 최면 상태가 풀릴 리가 없을 텐데?”
“예언가 어머님! 저기 뒤쪽에!”
그 순간, 제단을 뒤흔들 것만 같은 굉음.
뒤쪽 언덕에서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 생생한 분홍색을 띤 그 거대한 괴물은 신도들의 마음마저 흔들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설마… 설마, 저게 바로 <주님의 엉덩이>?”
“분명, 성경 외경에 쓰여 있는 그대로야! 분홍빛의 거대한 복숭아가 대지를 박차고 그대 백성에게 향기를 흩뿌릴지니.”
신앙심 가득한 한 신도가 자칭 성경 외전에 적혀 있다는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분위기는 한층 더 후끈 달아올랐다.
“이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참된 구원이어라! 그러니 너희는 두려움도 의심도 없이 오직 주만을 따를 것이니라!”
“오직 주만을 따를 것이니라! 아멘…!”
제단 아래의 신실함으로 가득 찬 풍경과는 달리, 당혹감과 분노로 손발이 떨리는 제단 위쪽.
반쯤 넋이 나간 박금덕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도사에게 감정을 배설하는 것뿐이었다.
“뭐, 뭐야! 저 괴물 같은 복숭아는! 경계를 어떻게 했길래 저런 게 여기까지 오나!”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어서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어서!”
-끼이이이익!
거센 마찰음과 함께 제단 바로 코앞에 멈춘 복숭아.
미리 적재해 둔 것일까?
복숭아의 널찍한 등판에서는 분홍색 폭죽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오… 믿습니다! 아멘! 아멘!”
신성한 모양으로 터지는 폭죽. 그 모습을 기적이라 여긴 신도들이 무릎을 꿇자, 복숭아 안쪽에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대 어리석은 이 땅의 백성들은 눈을 감고 들을 지어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의 엉덩이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