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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05화 (205/300)

205화 로마의 휴일(2)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로마의 총대주교이자,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인, 교황 레오 4세.

언뜻 보기에, 시골의 온후한 할아버지처럼 생긴 이 남자는 따뜻한 웃음 속에 냉철한 이성을 심어두고 있었다.

정치 요괴로 소문난, 한국의 대통령과 이해득실을 논함에 있어, 전혀 밀리거나 당하는 일이 없을 만큼.

“추기경. 잠시 이리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오벨리스크.

40여 년 전, 처음 사제 서임을 받던 그 순간부터, 교황은 이 오벨리스크에 적힌 문구를 암송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군림하시며,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악으로부터 만백성을 지키시나니.

“아무래도… 무리겠지요? 저 세속 국가에서 가톨릭의 부흥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기에는.”

항상 신앙이 세계만방에 널리 퍼지기만을 바라던 교황, 레오 4세.

그는 방금 일정을 마친 한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곱씹으며 추기경에게 물었다.

“너무 그 규모가 작지 않나 싶군요. 그렇지 않나요?”

“일종의 계륵 같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교황 성하.”

계륵.

동양의 고서에 나오는 표현답게, 지금 상황에 딱 적당한 말이었다.

굳이 저 멀리 한국까지 가, 해당국의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

“들이는 품에 비해 먹을 것은 많지 않다라.”

스스로 던진 그 질문의 답을 찾기에는, 그리 긴 고민을 요하지 않았다.

저 멀리, 대통령이 있던 자리를 눈에 담으며 결정을 내리는 교황.

“굳이 살코기도 뜯을 수 없는데, 불필요한 값을 치를 이유가 없을 터. 한국 쪽 일정은 당분간 잡지 않는 것으로 하지요.”

“예, 교황 성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방에서 추기경을 내보낸 후, 머리가 복잡했는지 곧바로 한숨을 내쉬는 교황.

큼지막한 유리병 안에 공기와 맞닿은 적포도주를 가득 부은 그는, 곧바로 첫 잔을 따라 마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유럽, 북미, 아시아 쪽은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 나무 서랍.

매주, 매달, 매년. 세계 각국의 성당에서 올라와 보고되는 신자들에 대한 모든 통계.

복잡한 수식과 화려해 보이는 도표가 가리키는 것은 명백했다.

가톨릭교회는 지금, 그 끝을 모르는 하향세에 접어든 지 오래라는 것을.

“남미 국가 몇몇을 제외하면, 주님의 어린양들이 자꾸 낙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군. 허어, 이를 어찌해야 좋을꼬?”

“저… 교황 성하.”

소심한 노크와 함께 문 바깥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추기경.

곤란한 내용이라도 전달해야 하는 걸까? 그는 조심스레 교황에게 다가가 품 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무슨 일이지요, 추기경? 이건 또 뭐고?”

“방금 한국 측에서 이런 서신을 보냈사온데, 꼭 확인하시고 답변을 달라고 하옵니다.”

“흠, 제가 분명 계륵은 원치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들어갈 품에 비해 삯이 박한 한국이라는 시장. 원래라면 이런 편지 따위 그저 추기경 선에서 마무리하라며 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읽어는 보겠다는 듯, 손을 내미는 교황.

“저쪽에서 하나님을 위해 크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터인데. 음…?”

그저 별생각 없이 펼친 편지지.

그곳에는… 참 희한하다 싶을 만큼 이제껏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 날 것 그대로의 표현으로 적혀 있었다.

“이, 이건…!”

바티칸의 영향력을 세계만방에 널리 펼쳐 보일 수도 있는… 기회의 광장,

서툴게 써 내려간 라틴어의 회랑 안쪽에 자리한 그 계책은, 곧바로 교황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추기경! 이 서신, 한국 대통령 측에서 보낸 것이라 했지요? 이 아이디어를 제안한 자가 누굽니까! 외교부 장관? 아니면, 청와대 안보실장?”

“그… 둘 다 아니옵니다, 교황 성하.”

외교부 장관. 청와대 안보실장.

이만큼 굵직한 선을 그리려면, 그리고 이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선을 현실로 구현해 내려면 꼭 필요할 직책.

그러나, 상식이라는 것은 때때로 통용되지 않는 법. 추기경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교황이 상정했던 범주의 완전한 바깥에 위치했다.

“그저 한국의 기업인이라고 하옵니다. 그, 일전에 있지 않았사옵니까. 이단자를 파문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던.”

“이단자? 그 <주님의 동산>? 그렇다면…!”

교황 또한 기억하고 있던, <주님의 동산> 사건.

전례 없던 창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예언가를 참칭하던 이단자를 벌하는 데에 앞장섰던 바로 그 남자.

특히나,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에 한 번쯤은 존재감을 피력하던 그자의 이름은 바로.

“탄약그룹 서준 한 회장. 모든 밑그림은 그가 그렸다고 하옵니다.”

* * * *

대통령과의 합의.

국정원 대북 정보, 특히 북한과 이란의 거래 내역을 내게 달라는 합의는 끝을 보았다. 긍정적인 쪽으로.

심지어, 그 너구리는 아예 교황 방한과 관련된 건을 내게 맡기고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한 회장이 책임지고 해 봐. 내가 볼 때, 어지간한 정부 외교·안보 라인보다 자네가 훨씬 나으니.’

망할 너구리.

대충 돌아가는 모양만 봐도 척하면 척이었던지, 골치 아픈 교황청과의 교섭마저 내게 떠넘긴 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교황 측에 즉석으로 전달한 내 편지.

지금쯤… 추기경 선에서 보고 깜짝 놀라 난리가 났겠지.

“추기경 선에서 논할 문제는 아닐 겁니다. 제가 계획대로 그린 데생이 다 마무리되고 난 후에, 교황청은 물감이나 들고 오라고 하세요.”

로마 중심부의 모 고급 호텔 안.

통째로 빌린 스위트룸 한가운데에는 마침 포켓볼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큐 끄트머리에 파란색 초크를 바르면서, 정중앙에 모인 둥근 공을 겨냥하며 말했다.

“어차피 이 계획. 생각보다 난코스일 테니까.”

딱! 굴러간 흰 공에 맞아 경쾌한 소리를 내며, 꽃잎처럼 흐트러지는 열다섯 개의 공.

지금 중동 상황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포켓볼 대. 바로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원철 아저씨는 내게 음료수를 건네며 추임새를 넣었다.

“어후, 이런 아사리판에서 어떻게 넣어. 딱 보니까 하나 건들면, 전부 터지는 구도인데. 저어어기 기름 많고 모래 많은 동네처럼.”

“그러니까요. 이렇게 원래 구도는 개판이지만… 어디 여기 위에다가 이런 수를 두면.”

-쿵!

손을 뻗어 포켓볼 대 위의 흰 공을 집어 든 나. 공들이 뭉쳐 있는 곳에 강하게 프리볼을 던지자, 그 단단하던 성곽은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사방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동 또한 마찬가지일 터.

이란이라는 공공의 적. 국정원에서 만들어낼 그 프리볼은, 분명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세 나라 사이의 성곽을 허물어버릴 테니까.

“흐흐흐, 대통령에게 받기로 한 국정원 자료. 이걸로 판에 균열을 주자?”

“뭉쳐 있던 공들이 어디로 갈지 몰라 난리가 났지 않습니까. 자, 그럼 이제 큐를 들고 시원하게 때릴 시간이죠.”

툭, 달리 힘을 주어 밀치지도 않았거늘, 물을 타고 수영하듯 큐에 맞아 가볍게 흘러가는 공 하나.

서로가 서로에게 맞아 각기 사각형의 틀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세 개의 색깔 있는 공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에 구멍을 향해 얌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흐, 나이스 샷. 기가 막히네. 그럼, 이제 죽어라 싸우던 팀원들 셋이 화해할 일만 남았고?”

“정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세 나라가 어색하게 손을 붙잡아야 하는 그 순간. 마지막 화합의 상징이 필요하겠죠. 그게 바로.”

판 위에 마지막 남은, 숫자 8이 써진 검은색 공 하나.

나는 손으로 그 둥근 공을 들어 올려 창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곳으로.

“교황.”

“흐흐흐, 하나님 모시는 영감님이 말년에 큰일 하시겄어.”

“아주 상징적인 장소에서 상징적인 인물들이 한데 모일 겁니다. 자, 그럼 시작해 봅시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나는 들고 있던 큐를 벽 쪽에 세우고는, 옆의 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탁자 위, 방금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 몇 명이 가져다 놓은 서류 뭉치.

<국가정보원>이라는 글씨가 적힌, 나침반 모양의 상징물이 그려진 서류 뭉치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세 친구가 같은 편에 서도록 만들, 공공의 적부터 만들어야겠지요.”

* * * *

-우지끈!

워싱턴 D.C 인근의 공원.

대낮부터 공원 벤치를 발로 차 부수는 유대인 한 사람. 이스라엘 모사드 출신 특명 전권 대사는, 주변 눈치에도 불구하고 솟구쳐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 웬리! 저 간악한 독사의 자식 같은 놈!”

“특사님… 부디 진정하십시오.”

“진정은 무슨! 지금 상태에서 무슨 진정을 하나! 당장 내 나라, 내 국민이 모래알로 변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

분수 앞에 주저앉은 특사.

눈물인지 수돗물인지 모를 물방울은 화강암 바닥에 조금씩 흩뿌려졌다.

“어떻게, 어떻게 미국이 우리에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주먹 쥔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뒤를 돌아본 특사.

그곳에는 방금, 그가 반쯤 쫓겨나다시피 한 국무부 건물이 거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곳의 주인인 양 웬리, 그가 특사에게 대하던 그 자세 그대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상에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게 제 판단입니다.’

‘뭐, 뭐요…!’

아예 이스라엘을 넘어 중동 전체에서 발을 빼고 싶은 티를 대놓고 내던 양 웬리 국무장관.

외교상의 관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 앉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그는 곧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지긋지긋한 광신도들 틈바구니에서 미국이 중재를 서느라 골치를 썩이는 일은, 이젠 영원히 없었으면 합니다. 나가주시죠.’

핏물.

고기 조각에서 흘러 내려와 하얀 도자기 접시를 적시던 그 시뻘건 핏물은… 특사에게 있어 송아지의 것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게 버림받은 이스라엘 국민은, 조만간 저 조그마한 접시를 채우고도 남을 핏물을 흘리게 될 것이기에.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영원히 끝이다.”

“특사님….”

결심을 마친 특사.

고개를 든 그는 옷소매로 얼굴을 훔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총리께 연락하도록. Plan B를 가동해야 한다고.”

“……!”

Plan B.

미국이 정말 이스라엘을 버리게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수.

메말라 죽기 전에 발톱이라도 먼저 세워 보자는 그 수는, 팽팽하게 당겨진 중동의 긴장감을 한순간에 임계점으로 끌어올릴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우디 남부의 반군. 아국 정규군도 합류해 함께 전투를 치른다. 먼저 선수를 쳐 이스라엘의 안전을 확실히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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