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사막은 언제나 맑은 뒤 흐림(3)
워싱턴 D.C 인근 군 공항.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사내들 사이에 점처럼 박혀 있는 양복 입은 두 남자.
국무부에서 파견한 직원인 그들은, 연신 손목시계를 힐끗거리며 타는 입을 침방울로 적시었다.
“이런, 이런… 이거, 곤란하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착륙 시간이 이렇게 꼬여서야, 원.”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 이스라엘 모사드 출신 최고 실세인 특명 전권 대사.
저 멀리 아라비아반도 한복판에서부터 벌어졌던 두 사람의 신경전은, 이곳 미국 상공에서도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같은 하늘 위, 서로 먼저 착륙하기 위해 몽니를 부리는 양측.
“어… 팀장님? 그냥 지금처럼 양쪽 다 한꺼번에 오는 게 차라리 편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비공식 방문이라 의전도 최소한인데.”
“멍청한 소리. 그것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웅장한 엔진음과 함께,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활주로에 발을 딛는 양측의 전용기.
곧바로, 너나 할 것 없이 비행기 앞쪽 문이 열리고, 각국의 최고 실세인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로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여기 이곳에서도, 충분히 얼어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살벌해라… 거의 무슨 한 대씩 칠 기세인데요?”
“물과 기름 같은 두 나라 최고 실세가 한 공간에 있으니, 당연히 살벌할 수밖에.”
“이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데… 진짜 중동 정세가 개판이긴 한가 봅니다. 뭐, 우리 미합중국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미합중국. 정확히는 양 웬리 국무장관이 뿌린 분쟁의 씨앗.
그 씨앗에서 돋아난 새싹은 눈 깜짝할 새 자라나 칡과 덩굴이 되어 서로를 얽매고 있었다.
먼저 힘을 푸는 순간, 곧바로 한낱 흙 속 양분이 되어 상대에게 고스란히 먹힐 것 같은 상황.
“후우, 누가 진정제 역할을 좀 해 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어어…!”
그리고, 그 순간.
항적 표시와 함께 저 멀리서 점점 가까이 다가와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색 비행기 한 대.
탄약그룹 특유의 큼지막한 불꽃 로고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바로 그때, 국무부 소속 팀장은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거, 빨리 좀 오지. 주인공 나으리가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오고 그러는지.”
“팀장님? 주인공이라면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굉음을 내던 엔진이 멈추고, 곧바로 비행기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오는 젊은 남성 한 사람.
뒤돌아선 채, 엄지손가락 끄트머리로 그를 가리키며, 국무부 소속 팀장은 부하 직원에게 말을 건네었다.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둬. 앞으로 국무부에서 예의주시할 요주의 인물 리스트 첫 페이지에 들어갈 사람이니까.”
오늘따라 유달리도 푸른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겨울 날씨는, 여름의 추적추적 내리던 장마와는 달리, 청명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기라도 하듯이.
“서준 한. 탄약그룹의 현 회장이자… 차기 노벨 평화상 후보자 되는 사람이지.”
* * * *
“불쾌하기 짝이 없군.”
드넓은 활주로 위의, 아랍 전통 의상을 입은 빈 살만 왕세자.
그는 의전을 위해 마중 나온 국무부 직원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불쾌함을 표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님…?”
“아주 모욕적이야. 당신들은 고의로 이런 것인가? 아무리 비공식 일정일지라도 실수라 보기 어려운 짓이거늘!”
손을 들어 이스라엘의 특사를 가리키는 빈 살만 왕세자.
그 신경전을 거절할 생각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양, 검은 양복 차림의 이스라엘 특사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찬탈자가 쓸데없이 말이 많군. 숫제 계집아이가 턱수염을 길렀다 해도 믿겠어.”
“뭐라!”
숫제 멱살잡이를 할 만큼, 훌쩍 가까워진 그들의 거리.
두 사내의 날 선 눈빛이 소리 없이 허공에 맞닿아 부딪힘과 동시에, 특사는 방금 전의 비아냥을 이어나갔다.
“앉지 못할 자리를 억지로 비집고 앉았으니, 불쾌니 모욕이니 하는 배부른 소리나 지껄이는 것이겠지.”
“이 더러운 유대 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빈 살만 왕세자가 내지른 호통과 동시에 허리춤에 손을 가져대 대는 사우디 측 수행원들.
철컥, 순식간에 들려오는 둔탁한 권총 장전 소리. 이스라엘 쪽 역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자존심 강한 두 남자를 중심에 두고 순식간에 반원형 대열이 형성되었으니까.
“…….”
“…….”
군 공항 내의 미군 헌병마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진 긴장감.
누군가… 아주 가느다란 면도날로 이 끊어질 것 같은 실 위를 툭 하고 건드리는 순간, 눈덩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벼랑 끝을 향할 터.
침방울이 목젖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한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날 선 면도날 하나가 실 위에 올라가 닿았다.
“싸울 힘들이 남아 있으신가 봅니다.”
신기할 정도로 날카로운 말투.
하지만… 긴장으로 당겨진 실이 중간에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 남자의 등장만으로 팽팽하던 공간은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느슨해지고 말았으니까.
“각자 처하신 상황이 바람 앞의 등불이실 텐데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는 양국의 최고 실세를 번갈아 바라보는 남자.
그는 바로.
“서준 한 회장… 그게 아니라 말일세.”
“크흠, 이거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만….”
겸연쩍은 듯, 민망함으로 잔뜩 물든 얼굴을 한 빈 살만 왕세자와 이스라엘 특사.
조금 쳐진 그들의 어깨 위에, 모든 긴장을 해소할 중재자의 손이 차분하게 올라갔다.
“벌써부터 열을 내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목청을 드높이고 협박과 설득을 번갈아 하며 상대를 찍어 누를 곳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곧바로 들어 올린 한쪽 손이 가리키는 어딘가.
광활하고 너른 활주로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워싱턴 D.C의 상징인 오벨리스크 기념탑.
매끈하게 깎은, 미합중국의 심장 한가운데에 박힌 흰색의 돌탑을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들 가시죠. 그놈의 시뻘건 스테이크 핏물에 좋아 죽으시는, 양 웬리 국무장관의 식탁 앞으로요.”
* * * *
국무부 청사를 향해 가는 차 안.
내 옆에는 이제껏 함께 중동을 누비던 영혼의 짝꿍, 김원철 아저씨 대신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회장님. 보고 올리겠습니다.”
“아아, 유세나 보좌관. 어떻게, 한국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네. 김 비서실장님께서는 잘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사안이 중대해서 귀국하시면 보고드리겠다네요.”
갑자기 할머니의 급한 호출로 한국으로 떠난 김원철 아저씨.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내게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들썩이며 떠난 아저씨는, 한동안 연락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대타로 파견된 유세나 보좌관.
“뭐, 급한 일이라니 어쩔 수 없죠. 일단 여기 일부터 처리하고 봅시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한국에서 대충 인수인계는 받았겠지만. 한 번 더 말하자면, <예루살렘 계획>이란.”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차선을 나란히 달리는 두 대의 차량.
빈 살만 왕세자의 새하얀 롤스로이스와 이스라엘 특사가 탄 검은색 벤틀리.
참… 어쩌면 차량 취향도 저렇게나 자기들한테 딱 맞는 것으로 골랐는지 싶을 정도이다.
나는 검지와 중지로 각각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으르렁대는 차량 두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서로 못 잡아먹어 양반인 두 양반을 화해시키고, 양 웬리 국무장관까지 설득시키는 것.”
“가능… 할까요? 일단 국무부 장관 집무실까지 들어가는 것도 힘들어 보입니다만.”
“양 웬리 국무장관만 설득한다면, 저 말썽꾸러기 어른이 두 사람은 화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네?”
“어차피 이번 일을 해결할, 양 웬리 장관의 머릿속에 딱 들어맞을 키(Key)는…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어느새 성큼 앞으로 다가온 국무부 건물.
차에서 내린 나는, 아직도 서로 눈싸움을 하는 새 나라의 어른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이제 곧 마주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게걸스레 씹어먹는 양반을 함께 상대해야 할 테니까.
“자, 그럼. 들어들 가시죠. 어디 입맛 까다로운 양반에게 새로운 조리법으로 미각을 일깨워 봅시다.”
* * * *
시곗바늘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 이틀 전 국무부 장관 집무실 안.
“장관님, 이번 비공개 방문은 어떻게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양 웬리 국무장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건네는 비서.
심기가 퍽 불편해 보이는 양 웬리 장관. 아무런 대꾸도 없는 그에게 비서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의전 관련해서 만찬은 어떻게 진행할지, 그리고 환영 인사는 누구로 해야 할지 같은….”
“지금 그딴 사소한 것이나 물으러 내 시간을 빼앗은 건가?”
와락, 읽고 있던 보고서를 신경질적으로 구겨대는 양 웬리 장관.
언짢은 표정의 그는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 비서에게 성의 없는 대답을 내뱉었다.
“어차피 저쪽이 제멋대로 오겠다고 지껄인 것. 그럼 이쪽도 제멋대로 쓸데없는 의전 따위 집어치운들 아무런 상관도 없겠지.”
“저… 장관님?”
“그 진절머리 나는 사막 모래밭에서 또 무슨 개짓거리가 벌어진들, 이제 미합중국의 이익에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만찬 일정은 어찌해야 할는지….”
만찬이라는 말에 이상한 스위치라도 눌린 모양이었다.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집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양 웬리 장관.
“하! 그딴 놈들에게 만찬은 무슨.”
그는 지갑에서 아무렇게나 잡히는 대로 지폐 몇 장을 쥐어 비서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냥 햄버거나 하나씩 사다 줘! 연회장 따위는 잡을 필요도 없고, 그냥 저번에 했던 것처럼 하라고!”
저번에 했던 것.
만찬에 쓸 시간조차 불필요하다 여긴 상대에게, 그는 이곳 국무부 집무실에서 괴팍한 형식의 환영 인사를 해 주곤 했다.
상대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채로, 홀로 스테이크 한 접시를 먹어치우며.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식사하는 동안 잡담이나 몇 마디 나누면 그만이니까.”
“…알겠습니다. 아, 참. 이번 비공식 회담에 한 분이 더 오신다고 합니다.”
“하! 두 놈도 골치가 아픈데, 하나가 더 온다고? 도대체 어디서!”
모래 지옥 같은 중동 문제에 더는 관여하기 싫은 듯,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양 웬리 장관.
그러나, 뒤이은 비서의 대답에, 그는 아리송한 얼굴을 한 채 반문했다.
“한국? 사우스 코리아? 그 장사꾼 놈들은 또 왜 중동 일에 끼는 건가?”
“정식 외교 사절은 아니고, 저번에 한 번 만나셨지 않습니까. 탄약그룹의 서준 한 회장이라고.”
“서준 한? 그 기업가 친구가 어째서…?”
“내부적으로 확인을 거치느라 보고가 늦었습니다만,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탄약그룹 측으로부터 전달받은 USB 하나를 건네는 비서.
딸깍, 전달받은 자료 화면 오른쪽 스크롤을 마우스로 내리는 양 웬리 장관의 표정이 점점 예술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또 무슨 거지 같은 일이… 음? 이, 이건!”
아주 엄정하게 위치가 잡힌 선이 굵은 정물화에서, 피사체조차 가늠하기 힘들 만큼 제멋대로 발산하는 현대미술 조형물로.
잠시 찾아온 침묵 끝에 양 웬리 장관이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당장 연회장 일정을 잡지.”
“장관님?”
자신이 생각했던, 이제껏 쭉 두어왔던 수를 처음부터 갈아엎어야 함에,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로.
“그날 하루는 국무부 연회장을 통째로 비우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