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떠날 사람, 남은 사람, 혼돈(1)
강남, 탄약 의료원 소속 암센터.
백의를 입은 노교수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침통한 목소리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사장님.”
말없이 주치의를 바라보는 서태후의 안광.
비록 실권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서태후였으나, 그 위압감만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주치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췌장 쪽에… 원인불명의 종양이 있습니다.”
“……!”
“양성인지 악성인지는 정확하게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이 정도 크기로 봐서는 아마도.”
주저하는 주치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서태후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말하게.”
“그… 조금 어려운 길을 가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잠시 도둑처럼 찾아온 침묵이라는 어색한 공기.
벽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만이 가득 찬 방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서태후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무에 있나. 늙은이가 갈 때가 되면 가야 하는 것을.”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설령 최악의 경우라도 항암 치료를 이어나간다면…!”
“그만.”
미동조차 없는, 오로지 눈빛만으로 주치의의 말을 끊은 서태후.
평소보다 조금은 힘이 빠진, 약간은 앙상해진 팔로, 그녀는 큰 화면에 띄워져 있는 자신의 췌장 사진을 가리키며 단언했다.
“뻔한 이야기는 되었네. 그리 많지도 않은 여남은 시간. 할 일이 많으니, 자네와 입씨름할 여유는 없어.”
* * * *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 흔한 욱신거림조차 없이, 그저 침묵을 지키던 그녀의 췌장. 그러나, 그 조용함은 그저 시한폭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주치의의 입에서 나왔던 뒤이은 설명은, 그 폭탄이 터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후우….”
차 안. 창밖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는 서명희 이사장.
뿌연 김이 서려, 흐릿해진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모습 뒤쪽으로, 바깥의 줄지어 선 가로수가 하나씩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여남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눈치 볼 것 없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군.”
운전석 룸미러 너머로 느껴지던 시선이 신경 쓰였던 모양인지, 운전기사에게 가볍게 말을 붙이는 서태후.
벌써 눈치를 챈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떠날 그녀가 남은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 예. 이사장님.”
“서준이 녀석은? 아직도 예루살렘에 있는 게야?”
“워낙 노벨 평화상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의 일이다 보니… 며칠 더 있겠다 하셨습니다.”
“녀석, 일 벌이는 재주는 누굴 닮았는지 원.”
피식, 가볍게 웃음 짓는 서태후.
자랑스러운 손자, 라는 수식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이미 나아가야 할 길을 큰 보폭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그녀의 후계자.
호기로운 모습으로 전 세계를 누비던 손자의 얼굴을 떠올린 서태후는, 문득 인제는 고인이 된 큰아들의 얼굴을 거기에 겹쳐 보았다.
“그래, 내 큰아들놈하고 똑 닮았지. 서준이 그 녀석은.”
먼저 떠난 큰아들. 그 유지를 잇는 손자. 탄탄해진 정통성은 이제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드는, 연민 섞인 복잡한 감정.
-끼익
잠시 신호에 걸려 멈춘 차량.
어젯밤 바람이 여간 세게 불었던 모양이었다. 도로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곁가지.
거목(巨木)의 줄기가 되지 못한 그 곁가지를 본 서태후의 눈에서, 마치 누군가가 생각난 듯 작은 이슬방울 하나가 맺혔다.
“허어, 정말 갈 때가 되었나? 밟혀서는 안 될 아이마저 눈에 밟히는구먼.”
“이사장님…?”
“자네, 바로 집으로 가지 말고, 차 좀 시원하게 몰아 봐. 바깥 풍경 좀 보고 싶으니.”
“예, 어느 쪽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진자처럼 주기적으로 좌우로 오가는 와이퍼 움직임.
차갑게 내리는 겨울비. 결정을 내릴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신호등 색깔이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바뀌기 바로 직전에서야, 비로소 마음을 굳힌 서태후.
“남쪽, 안양교도소 쪽 한 바퀴 돌고 가자고,”
“…알겠습니다.”
안양교도소.
주로 범털이라 불리는 경제 사범들이 들어가 있는 그곳. 그리고… 서태후의 둘째 아들인 한화기가 갇힌 곳.
높다란 교도소 담장 주변을, 쉬지도 않고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도는 차량.
한참을 그렇게 철조망 안쪽을 바라보던 서태후는,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손주. 그리고, 작은 아들놈이라… 이거 혼자서는 안 되겠군. 놈팽이 놈 하나가 있어야겠지.”
교도소 정문 앞, 양 갈래 길에 놓인 차량.
깜빡이를 켠 차 안에서, 서태후는 운전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네, 김원철이 잠깐 한국 좀 들어오라 하게.”
“이유는… 뭐라 하면 되겠습니까, 이사장님?”
“이유, 이유라… 그렇지.”
전조등에 비친 교도소 정문.
거기에는 문구 하나가 적혀 있었다. 보는 이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 주는 것과 같이.
-다시 돌아올 가족을, 따뜻하게 품을 그날까지.
“떠날 사람이 남은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하면 알아들을 게야.”
* * * *
연락을 받은 김원철은 다급했다.
이역만리 타국에 있는, 자신의 어린 주군을 그대로 둔 채로 최대한 빨리 귀국했을 정도로.
“마귀할멈… 아니, 이사장님이?”
서태후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건 운전기사.
평창동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서, 불안감이라는 안개에 휩싸인 김원철은 연신 중얼거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양반이 설마… 진짜라면 큰일인디.”
직감.
김원철의 머릿속을 수직으로 통과하는 그 직감이라는 놈은, 팔뚝 위에 난 잔털을 삐쭉 서게 할 만큼 위험하고 또 치명적이었다.
“아직 순환출자 구조도 못 벗어났고, 지주사 전환도 한동안은 절대 불가능인데.”
간신히 반석 위에 올려놓은 탄약그룹이라는 거대한 성.
그러나, 한 꺼풀 감추어진 베일을 조심스레 들추어 보면, 그 실상은 모래 위에 지은 성이나 다름없었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기본 수십조 단위로 불어나는 사업 규모, 그 성장만큼 껑충껑충 뜀뛰는 주가, 그럼에도… 여전히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자연인 한서준의 그룹 보유 지분.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아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묻어두었다.
자칫… 바깥에서 큰 폭풍이 몰아친다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내일로, 모래로, 언젠가 찾아올 그날로 미룬 채로.
“하아… 제발이고 부탁이니 한화기 그 양반만큼은 가둬 놓아야 된단 말이여.”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걱정되는 것. 혹시 모를 분란의 방아쇠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
철의 여인 서태후. 그녀 또한 인간이자 한 사람의 어머니이기에… 마지막 모정이 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김원철.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내며 평창동 저택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서태후의 며느리, 김성혜가 김원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철 씨…!”
“아아, 제수씨. 이사장님은요?”
위쪽을 가리키며 고개를 떨구는 김성혜.
이미 그늘진 그 표정만으로도 김운철은 돌아가는 상황을 곧장 알 수 있었다.
“하아… 맞나 보네. 생각했던 그게.”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머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일단 올라가 볼게요. 아, 그리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올라오는 검지 하나.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에는 평소의 가벼웠던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거 아는 사람은 운전기사, 제수씨, 그리고 청주댁. 이렇게 세 사람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성혜.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김원철은 뒤를 돌아 다시금 당부의 말을 남겼다.
“입단속. 꼭 좀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아무 염려 마세요.”
오래간만에 눈에 들어오는 복도는, 오늘따라 김원철의 눈에 어색하기만 해 보였다.
“제발, 우리 얼음 여왕 서태후께서 마지막 순간에 감성적으로 변하지 않아야 하는디.”
마치… 이제 곧 그가 마주할 탄약그룹 여제의 모습을 미리 고지하기라도 하듯이.
똑똑, 방문에 부딪힌 둔탁한 노크 소리가 그 어색함을 더욱 돋구었다.
“접니다. 들어갈게요!”
* * * *
“하아, 이게 뭔 일이랍니까, 진짜로.”
“호들갑 떨 일 없다. 본래 늙으면 몸뚱이가 고장이 나는 법이고, 고치다 고치다 안 되면 죽는 게지.”
“고장은 났는데, 지금 고칠 방법이 없는 게 문제 아닙니까.”
일부러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이라도 하는 걸까?
겉으로 보기에 서태후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저 안색이 조금 나쁠 뿐.
물론… 앞으로 주어진 3개월 남짓한 시한부 선언은, 그 괜찮아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반대되었지만.
“곧 가겠지. 갈 때가 되었으면 가야 하는 것이 이치인 게고.”
“아, 제발 좀!”
“시끄럽다! 목청은… 늙은이 창자가 문제지 귀는 아무 문제 없으니, 핏대 올릴 필요는 없어!”
“아, 그럼 지금이 살갑게 귓속말 속닥거릴 때유? 얼렁 방법을 찾아야지!”
그간 투닥거리며 쌓인 정만 수십여 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김원철.
서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아들만큼이나 가까웠던 김원철과의 관계였기에, 오히려 혈육보다 더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그녀였다.
“죽고 사는 것이야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허면, 남은 사람들은 편히 살아야겠지.”
툭, 탁자 위에 던져진 서류 뭉치 한 다발.
종이 가장자리를 손톱 끝으로 긁으며, 김원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 설마 궁리도 안 허고 김원철이 자네를 불렀을까.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보고 검토나 좀 해 봐.”
첫 장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서태후 유고 시를 대비한 비상 계획들. 지주사 전환을 시작으로 경영권 방어를 위한 계획들은, 제법 알차게 짜여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김원철이 말했다.
“지주사 전환은 저도 맞다고 봅니다. 빈 살만 왕세자 자금에 대통령 비호가 있으니 가능했던 것이지, 지금의 순환출자 구조는 너무 위험해요.”
“자네가 소요 자금 산정해서, 좀 알아보고. 그리고 다음.”
그리고… 문제의 다음 페이지.
서류 다발을 든 김원철의 손이 파르르 떨리었고, 목젖 너머로 침방울이 굴러떨어졌다.
“하아, 이건 좀… 그, 꼭 해야 합니까? 지금 같은 때에?”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는 영영 못 허니 그렇지.”
“지주사 전환 끝나고 해도 되지 않습니까.”
명백한 찬반이 갈리는… 한화기 석방 건.
어느새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 서재 안. 그 팽팽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것은 서태후의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말 한마디였다.
“서준이 녀석은 할 마음이 있어도, 김원철이 자네는 없다는 것, 다 앎세.”
“…….”
“그만허면 이제 되었어. 날개를 죄 분질러 두었는데, 그 녀석이 뭘 더 하려 하겠나?”
한화기.
김원철이 모시는 어린 주군의… 가장 큰 숙적이었던 자.
그리고, 지금.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둔 한 어머니가 마치 유언을 남기듯이 세상 밖으로 다시 풀려나오려 하고 있었다.
“내 진행하는 걸로 알겠네. 부탁허지.”
김원철의 한쪽 손을 꼭 잡은 서태후의 앙상하고 주름진 양손.
서재 바깥으로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김원철은 그 전례 없는 서태후의 부탁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환장하겄어. 정말로.”
언제 온 것인지 바깥에 소복이 쌓인 함박눈.
산자락을 하얗게 뒤덮은 그 눈발을 바라보며, 김원철이 한숨과 함께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거… 제발 한화기 그 양반이 좀 얌전히 굴어야 할 텐데 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