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떠날 사람, 남은 사람, 혼돈(3)
한국에 전용기가 착륙하고 나서도, 나는 차마 내리지 못했다.
“…….”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얼음처럼 굳어버린 허벅지 위쪽과는 달리, 그 아래쪽은 반쯤 얼어붙은 사시나무라도 되는 양 연신 마구잡이로 떨리고 있었다.
췌장암. 그리고, 곧 다가올 할머니의… 죽음.
이미 어둠이 찾아온 저녁. 나는 창가에 비친 내 퀭한 모습을 바라보며, 메마른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하아… 이건, 이건 원래 미래에 없던 내용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본래 앞으로 몇 년은 더 건강하게 사셔야 정상인 할머니.
그러나, 내가 바꾸어 버린 인과율 때문일까? 할머니의 몸속에는 그 인과율이 뿌린 암세포라는 씨앗이 자라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회장님….”
내 옆으로 다가온 유세나 보좌관. 보다 못한 그녀는 내게 뜨거운 물수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지랑이처럼 솟아나는 수증기 아래, 흰 물수건에 얼굴에 파묻은 나.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주 조금의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유세나 보좌관에게 현 상황에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후우, 유세나 보좌관. 탄약 의료원 측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정확히 지금 어떤 상태인 건데요?”
“검사 결과, 췌장암 말기는 확진이 된 상태입니다. 종양 위치가 매우 이례적이라 큰 통증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른 암과 달리 큰 통증이 없이 지내셨다니, 불행 중 다행인 상황이라 해야 할까?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보고를 꾸역꾸역 삼키듯 들으며, 나는 뒤이은 생각의 꼬리를 이어나갔다.
그저 중병에 걸린 할머니를 걱정하는 손자로서의 생각이 아닌… 탄약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을 짊어진, 재벌 총수로서 해야 하는 생각의 꼬리를.
‘한화기 그 양반 말이여. 아무래도 가석방될 것 같다. 이사장님 가시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네.’
문득 생각나는, 김원철 아저씨와의 전화 통화.
이미 감정 정리가 끝나 있던 아저씨는, 내게 상황을 보다 냉정하게 보게끔 해 주었다.
이번 일이 그룹 경영권 차원에서 어떤 위험성을 내포하게 될지를 포함해서.
“후우, 이런 상황에서조차 아득바득 손익계산을 해야 하다니. 아무리 숙명이라지만 지나치게 잔혹한걸.”
내게 주어진 숙명.
그것은… 그저 슬픔에 휩싸여 목놓아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팎으로 그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 그게 내가 회귀까지 한 이유일 테니까.
“하긴, 김원철 아저씨도 좋아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야겠고.”
결심을 마친 나.
정신을 차려 보니 손아귀가 조금 따가운 것이, 물수건의 습기가 다 빠져나갈 만큼 꽉 세게 쥐었던 모양이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목에 메고 있는 넥타이를 바로 하고는 비행기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세나 보좌관, 지금 바로 이동합시다.”
“괜찮으실까요, 회장님…?”
“지금 괜찮든 안 괜찮든, 이제 앞으로는 괜찮아져야 합니다.”
그렇다.
감정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괜찮아져야 한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보시게 될 손주의 마지막 모습이… 절망에 빠져있는 어리석은 꼴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 * *
평창동 본가 저택까지는 순식간에 도착했다.
나는 현관을 지나서까지 구두를 벗지 못했을 정도로, 숨이 찬 상태로 1층 거실까지 그대로 내디뎠다.
“헉, 헉… 저 왔습니다.”
“서준아…!”
간만에 보는 엄마의 얼굴.
반가움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곧바로 할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
“할머니는? 지금 병원이 아니라 집에 계신 거예요?”
“서재에 있으셔. 병원 침대 위에서 억지로 살다 가느니, 차라리 익숙한 곳에서 단번에 죽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니 이를 어쩜 좋니….”
서재라… 역시 할머니답다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또 안도감이 들기까지 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겪어 왔던 서태후로서의 할머니가 미약하지만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이니까.
“아, 회장님 왔어? 어여 올라가 봐.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계셨어야.”
2층 계단에서 내려와 내게 인사를 건네는 김원철 아저씨.
여러 하고픈 말들은 많았지만, 일단은 할머니가 먼저다.
이어달리기하듯, 김원철 아저씨가 있던 계단 위로 올라가는데, 내 소맷자락을 붙잡는 아저씨.
“그, 잠깐만.”
평소 잘 보이지 않는, 진지하고 복잡한 감정이 칠해진 얼굴.
하기 어려운 말을 가까스로 토해내듯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김원철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가야 할 것이여.”
“무슨 말이신지…?”
“뭐랄까, 지금의 이사장님은 서태후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평범한 어머니의 나이 드신 모습이거든.”
* * * *
서재에 올라가 마주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수척했다.
겉으로는 애써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있었지만… 그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음이 눈에 보일 만큼.
“그래, 왔구나. 게 앉거라.”
“할머니, 지금 건강은….”
“뭘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고 그러는 게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건 정해진 것이거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추운 날씨에도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는 할머니.
서태후라는 별칭이 무색할 만큼, 야윈 모습의 할머니는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뭘 남기고 가는가.”
“…….”
“내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결국, 서준이 네게 숙제만 주고 관짝 속에 들어갈 것 같더구나.”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 내 눈 앞에 펼쳐진 가느다란 두 개의 손가락.
“지주사 전환. 그리고.”
첫 번째 손가락이 뜻한 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아직 순환출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탄약그룹. 그렇기에 외부 자본 세력의 공격에 취약하기 짝이 없는 경영권.
충분히 생각해야 할 숙제인 그 첫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너무나도 난해한 숙제였다.
“네 숙부. 아니, 내 작은 아들놈.”
“할머니, 그 건은 좀 더 깊게 생각해서 결정할 일이….”
“그만.”
그리고, 그 숙제를 주는 할머니의 태도는, 병자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단호했다.
어쩌면, 서태후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더더욱.
“내 서준이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미 탄약그룹의 회장으로서 너무나도 환하게 빛나고 있으니.”
“할머니….”
“그렇기에, 믿지 못할 것은 네가 아닌, 서준이 너를 둘러싼 그 상황이라는 놈일 터. 지금이 아니면, 네 숙부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
그럴 리 없습니다. 라는 거짓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동정심이라는 감정이 발을 들일 만큼, 탄약그룹 회장직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녀석이 들어간 지도 벌써 3년째. 이만하면 날개는 다 꺾였을 터. 마침 가석방 요건도 딱 맞더구나.”
가석방.
숙부가, 지난 생에서 나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창살 안쪽에 처넣었던 그 숙부가, 세상 바깥으로 다시 나오려고 몸을 풀고 있다.
먹먹해진 귓가.
조금씩 느껴지는 어지럼증에, 뒤이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잘 들어오지 않는 그때.
아까보다 훨씬 더 힘이 빠진 모습으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할머니.
“후우… 내 법무부 장관에 일러 일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니, 서준이 너 또한 이번 일에는 적극 협조를….”
“할머니? 괜찮으세요?”
툭, 거짓말처럼 의자 한쪽 팔걸이를 향해 맥없이 쓰러지는 할머니의 머리.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든 내가 곧바로 소리쳤다.
“할머니? 할머니! 밖에 누구 없습니까! 할머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아이고, 세상에나! 이를 우짜면 좋담!”
방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청주댁 아주머니. 급히 방 안으로 들어온 아주머니에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당장 주치의를. 아니, 구급차를 불러야 합니다! 탄약 의료원에 연락하세요. 지금 바로!”
* * * *
“사실, 진작에 입원하셨어야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최대한 연명 치료를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요.”
침통한 표정의 주치의.
탄약 의료원 암센터 교수인 그는, 내게 할머니의 MRI 검사 결과를 보고했다.
“암세포 전이 속도가 전혀 예측이 안 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언제 어떻게 일이 잘못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잠시… 자리 좀 비워주시겠습니까?”
뚝, 뚝. 눈물처럼 한 방울씩 떨어지는 링거 방울.
병실 안, 탁자 위에 놓인 가습기에서 나오는 뿌연 수증기 너머 할머니의 모습.
나는 앙상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는, 옆에 선 김원철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다.
“어쩌면, 저는 겉껍질로 칭칭 감싸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만을 봐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여?”
“서재에 올라가기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할머니는 서태후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어머니라고.”
더 깊이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오히려 이어진 침묵.
벽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이따금 귓가를 울릴 때쯤, 나는 김원철 아저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음을 던졌다.
“지주사 전환. 가능합니까?”
“시간은 좀 걸릴 거여. 사실 시간보다 중요한 건… 우리 회장님 지배력 자체고.”
지배력.
약간의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순환출자와는 달리, 좀 더 많은 지분이 필요한 지주사 구조.
지배력은 곧… 자금을 뜻했다.
“5조 원. 일단 대주주 한서준 개인으로서 필요한 예상 금액이여.”
“탄약그룹 사이즈가 워낙 커졌으니까요. 찾다 보면 길이 보이겠죠. 문제는 그걸 마련하는 동안의 위험 요소인데.”
푸른색 핏줄이 보일 만큼 얇은 할머니의 손.
결심을 마친 나는 김원철 아저씨를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어떻게든 감수해야지요.”
“하아, 한화기 그 양반이 무슨 일을 벌일지 예측이 안 되는디… 사실 계속 외부랑 소통은 하던 양반이잖어.”
교도소 안에서 휴대전화를 쓰던 숙부였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아마 바깥의 인맥은 유지가 되고 있을 터.
“다시 중국 쪽하고 연결될 가능성도 있고. 그게 제일 불안하지.”
“<상하이 캐피탈>은 당분간 괜찮을 겁니다. 제임스 왕 이사의 근신이 길어지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무엇보다?”
“마지막 가시는 길. 편히 보내드렸으면 합니다. 하나 남은 자식을 감옥 안에 두고 떠나시는 게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끄응….”
“이제, 겪으실 고통은… 육신에 박힌 암 덩어리만으로도 차고도 넘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혀, 그래. 회장님 뜻대로 하자고.”
두 손바닥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표하는 김원철 아저씨.
어쩌면, 아저씨 또한 나와 같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위험을 조금 더 무겁게 짊어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할머니의 마지막 뜻을 존중하자는 것.
김원철 아저씨는 자기가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며 휴대전화를 꺼내어 어디론가 통화를 시작했다.
“네, 장관님. 저 김원철입니다.”
아까 말했던 법무부 장관인 모양이었다. 논해지는 숙부의 가석방 건.
“저희 이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던 그거… 한화기 전 본부장 건 말입니다. 아무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종료된 통화.
그렇게, 모든 상황은 얼추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윤곽이 어떤 모양이든지 간에, 내가 짊어지고 가기만 하면 될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