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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16화 (269/300)

216화 떠날 사람, 남은 사람, 혼돈(4)

법무부 장관은 생각보다 내게 호의적이었다.

애초에 대통령과 대놓고 찰떡궁합인 내게, 이런 사소한 일로 대립각을 세우기도 싫은 것이겠으니까.

“사실 저희는 사면 자체에 그리 큰 부담은 없습니다. VIP께서도 제게 일임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벼운 술자리에 곁들인 형식적인 대화.

사면과 관련한 몇몇 법률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던 법무부 장관은, 무언가 떠보는 듯한 태도로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조금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사면 자체가 한 회장님께 괜찮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할머니의 췌장암 소식은. 아니, 정확히는… 그로 인한 숙부의 사면과 탄약그룹의 경영권 위기 문제는, 재계를 넘어 정·관계에도 상당히 회자되는 일인 모양이었다.

스스로 민망했는지 미지근한 청주 한 잔을 목에 털어놓고는, 뒷말을 덧붙이는 법무부 장관.

“저야 뭐 지시하시는 그대로 따르는 입장이긴 합니다만, 괜히 차후에 예기치 못했던 불상사가 있으면 어쩌나… 크흠, 죄송합니다.”

겸연쩍은 듯, 내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

사실, 이런 식의 다소 무례하다고도 할 법한 반응이 나 또한 달가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탄약그룹 바깥의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모호하다고도 볼 수 있을 터.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이 무례함을 정공법으로 받아쳤다.

“괜찮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조금 의외라 생각했는지, 눈썹 한쪽을 찡긋 올렸다 내리는 법무부 장관.

그래, 상관없다.

바깥에서 어떻게 바라보든, 나는 이번 위기 또한 얼마든지 손쉽게 넘을 자신이 있으니까.

“예정대로 3.1절 특사에 내보내시면 됩니다. 그룹과 관련된 일, 그리고 저희 집안의 일은 제가 알아서 책임질 테니.”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태도에 오히려 본인이 겸연쩍어하는 법무부 장관.

더 민망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리려는 듯,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내게 물음을 던졌다.

“크흠, 이사장님께서는 어찌, 많이 편찮으신지요? 아무래도 병명이 병명이다 보니, 괜찮지 못하실까 염려됩니다만.”

괜찮냐고 묻는 그 질문에 즉답 없이, 그저 술잔에 비친 내 검은 눈동자를 바라볼 뿐인 나.

괜찮다라… 물론 말기 췌장암 환자가 괜찮을 리가 없긴 하다. 소리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끔찍한 고통은 몸에 괴로움의 발자국을 낙인찍어 버리니.

다만,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다른 쪽으로 괜찮았다.

정신. 얼핏 보았을 때, 흐려 보이던 정신은 그 누구보다 또렸했으니까.

호숫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슴처럼, 나는 이곳에 오기 전, 병원에서 할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

한번 크게 의식을 잃은 후, 가까스로 다시 눈을 뜬 할머니.

한번 생기가 몸을 빠져나가는 것을 억지로 붙들어서였을까?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혈색과 위태롭게 카랑카랑함을 유지하던 목소리는, 나이 든 병자의 모습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믿겠다. 너를, 그리고 내 둘째 아들놈을.’

‘할머니…?’

거추장스럽다며 산소호흡기를 거칠게 떼어 버리고는, 앙상한 손으로 내 손등을 꼭 쥔 할머니.

고개조차 간신히 돌릴 수 있을 정도의 몸 상태였으나, 자리에 누운 할머니는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감옥에서 나오더라도 조용히 살게끔 약조를 받을 것이야. 물론, 경영권에 일절 손도 대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쿨럭! 쿨럭!’

‘할머니, 어서 의료진을…!’

‘쿨럭, 쿨럭! 아니, 되었다. 지금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환자복 앞섶을 적신 붉은 피.

그와 동시에 요란한 기계음을 울리며 빨간 불빛을 연신 반짝거리는 의료기기.

멀리서 의료진이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길게 한숨을 내쉰 할머니가 말했다.

‘후우… 어쩌면 내 눈이 흐린 것일 수 있을 게다. 아니, 아마 잔뜩 뿌옇게 된 상태가 맞겠지.’

‘…….’

‘만약, 나중에라도 내 판단이 그른 것이라면, 그때는.’

육신의 고통이 아닌 마음의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껏 눈을 찡그리고 괴로운 감정을 얼굴에 그리던 할머니는 참담함이 담긴 뒷말을 연이었다.

‘녀석이 끝내 그룹 경영권을 탐내면, 그때는 온전히 끝을 보거라.’

‘……!’

최악의 경우에는 숙부를 다시 지옥으로 몰아넣어도 괜찮다는 당부.

서태후로서 내리게 된 그 당부는, 나이 든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의 연민과 함께 묶여 내게 다가왔다.

‘다만, 그 전까지는 그 아이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서준이 네가 약속을 꼭….’

그러고는,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것처럼 다시금 눈을 감은 할머니.

긴급한 의료진의 움직임과 무심하게 울리는 의료기기 기계음 속에서, 그렇게 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 * * *

모란산에서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는, 새벽이 지나 환한 낮이 되었건만 여전히 어둡게도 울려 퍼졌다.

그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와 가장 가까운, 안양교도소의 3층 복도 왼편.

햇빛조차 드문드문 들어오다 말기를 반복하는 그곳에서, 주괘율은 듬성듬성 돋아난 회백색 턱수염을 쓸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조 선생. 한화기 말이요. 저 독사 같은 인간이 무슨 생각을 허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디까?”

피비린내 나고 어두운 응달. 그 잔혹한 곳에서 한 가닥씩 이름을 날리던 거물급들만 한데 모은 맨 끄트머리 방.

다른 방들보다 유독 넓은 방 안. 가장 상석에 누운 이는, 주괘율의 물음에 심드렁한 듯 보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허어. 주 회장, 이 사람아. 그리 현명하던 사람이 빵 왔다고 벌써 감을 잃어부렀당가?”

호남 토착 조직폭력배, 스노우파의 수괴 조석구.

속칭 조 선생이라 불리는 그는, 산적처럼 우악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실제로는 불법 사금융 쪽의 대부로서, 매우 영민한 자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작은 파편들을 모아서, 큰 그림의 생김새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무슨 말이요?”

“나는 첨에 한화기 저 양반 눈깔 하나가 읎는 줄 알았어야. 아, 왼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는 것이, 순 애꾸 새끼인가 싶었다니께. 크흐흐.”

애당초 재벌가의 사람이었던 한화기였기에, 그는 교도소 내에서조차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복도 너머, 왼편의 흉악범들은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격이 떨어진다는 듯한 태도를 지닐 정도로.

그러나, 지금.

3층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왼편을 향해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한화기.

“부잣집 되련님이 우덜 같은 밑바닥 허벌창들을 찾는다. 고것은 즈그 오줌발이 영 아쉽다, 이 말이여라. 주 회장헌티 원하는 것이 있다고.”

“원하는 것이라면…?”

“으따, 이 사람. 벌써 까묵어부른 겨? 자네 여 학교 입학시킨 그 핏뎅이 애새끼!”

“한서준…!”

울컥, 자기도 모르게 솟아오른 분노에 얼굴이 주홍빛으로 변한 주괘율.

앞으로 죽기 전까지는 평생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자신을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든 장본인인… 한서준.

그리고 공교롭게도, 복도 너머 오른편의 남자 또한 제 조카인 한서준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

그렇다면, 한화기가 주괘율 자신을 찾는 이유는 한 가지일 뿐.

“즈그 조카놈 뒷빡을 쇠망치로 후두려 깔 껀덕지가 있응께, 저 주접을 떨어 싸는 것이 분명혀. 흐흐흐.”

“한서준, 그 찢어 죽일 놈을 칠 수 있다라….”

“으허허허. 우리 주 회장, 눈까리가 다시 옛날맹키로 돌아와부렀어. 어흐, 살벌한 거 보소. 아주 부하 손가락 회 치던 시절 생각나네잉.”

-뻐꾹! 뻐꾹! 뻐꾹!

바깥의 까마귀 울음소리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기괴하고 을씨년스러운 뻐꾸기시계의 알림 소리.

세 번의 울음이 오후 3시를 알리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주괘율.

옆에서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조석구에게, 주괘율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슬슬 가십시다, 조 선생.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찍 바깥 공기 냄새를 맡을 것 같구려.”

* * * *

“어으… 죽겠네, 진짜. 아니, 서후 너는 이 지옥에서 어떻게 버틴 거지?”

“형, 여기 지옥인 거 이제 알겄수?”

나이지리아, 다이아몬드 광산.

한화기의 두 아들인 한서호와 한서후. 녹색 지옥이나 다름없는 정글 속에서, 형제는 탄광 입구에 주저앉아 손수건으로 땀방울을 훔쳤다.

“차라리 깜빵 있던 시절이 훨 나았다 싶지? 반군에 더위에 독충에… 끼고 놀 계집도 없어! 쌩 유배지여, 유배지!”

“여자는 있잖냐. 현지 흑인 여자.”

“옘병, 에이즈 걸려서 콱 뒤지라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버텼는데.”

물통 뚜껑을 돌려 목을 축이고는, 절반쯤 남은 물을 머리 위에 부어 더위를 식히는 둘째 한서후.

물방울인지 땀방울인지, 아니면 눈물방울인지 모를 후회를 흘려보내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하여간, 이게 다 한서준 그 썩을 놈 때문이여. 그놈 때문에 아버지가 빡 도셔서 날 이리 보낸 거 아니겠냐고. 거기에.”

제 형인 한서호를 바라보는 한서후.

“이제 막 빵 갔다 온 형도 바로 이리로 보낼 줄이야.”

징역 3년을 살고 만기 출소한 한서호는 곧바로 동생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실 서태후의 승낙과 김원철의 관리하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나도 그놈 생각만 하면 아주 잠을 못 잔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놈! 어떻게 혈육에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어!”

“피가 천해서 그렇겠지. 선대 회장이 딴따라 년한테 홀라당 빠져서 낳아 온 자식이잖어.”

“그래… 그랬었지. 본성이 천한 놈.”

하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뻗은 나뭇가지.

그 녹색 지옥 사이로 회색빛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한서후가 푸념하듯 입을 열었다.

“후우, 다시 돌아갈 기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몰러. 일단 아버지부터 빵에서 나와야 하는디.”

“6년이나 더 남았단다, 지독하게도… 어어?”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서 한서호, 한서후 형제를 향해 달려오는 누군가.

나이지리아 현지 직원 중 가장 직급이 높은, 뽀꿀롬 소장이었다.

“써호! 써후! 즐거운 소식 왔따! 당신들 행복하다!”

“뭐라는 거야, 뽀꿀롬. 한국말 좀 똑바로 하라니까.”

어설픈 한국말을 나름 자유자재로 써가며 손짓, 발짓하는 뽀꿀롬.

엄지와 약지를 쭉 펴는 동작과 함께, 그는 연신 호들갑을 떨어대었다.

“전화 왔따! 한쿡 본사. 너네 아빠 이제 나온다!”

“뭐라고…! 정말이냐!”

메마른 가뭄에 손님처럼 찾아온 빗물이 이런 것일까?

두 형제에게 찾아온, 제 아버지인 한화기의 가석방 예정 소식.

그리고, 뒤이은 뽀꿀롬의 말은, 한서호, 한서후 두 사람이 쾌재를 부르며 서로를 얼싸안게 만들기 충분했다.

“써후, 써호 다시 한국 간따. 무서운 할망구가 오라고 말했따. 얼른 짐 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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