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Ransomware(3)
“얼레? 한화기가?”
교도관으로부터 밀봉된 편지지를 건네받은 조석구와 주괘율.
오늘 아침, 가석방이 확정되어 3.1절 특사로 이곳 안양교도소를 떠난 한화기.
교도관은 이 편지가 일종의 ‘계약금’이라는 한화기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그 ‘계약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점점 탐욕스러운 미소로 입꼬리를 올리는 주괘율의 모습.
“말만 요란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로군. 조 선생, 이것 좀 보시오.”
“으데 보자잉… 웜머, 빼곡한 것 보소. 눈까리 아파가 보지를 몬 하겠네. 어야, 떡쇠야!”
옆방의 부하 조직원을 부르는 조석구. 곧바로 이름만큼이나 뚱뚱한 어깨 한 명이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예, 행님!”
“거, 가가 돋뵈기 좀 갖고 온나! 도수 쎈 걸로다가!”
콧잔등에 돋보기를 쓰고 나서야 비로소 조석구의 눈에 들어오는 편지 내용.
반쯤 이불에 누운 자세로, 그는 손가락으로 편지지를 튕기고는 입을 열었다.
“어따, 싹바가지 없는 도련님인줄 알았는디, 이 숫제 효자손이여라. 시원한 곳만 골라가 벅벅 긁어 싸네잉.”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구려. 조 선생 당신이나 나나 둘 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한때 조직폭력배 수괴 자리에 있던, 이 두 남자의 목을 매게 만든 한화기.
“하기야, 애당초 필요한 말은 미리 다 해 두었었지.”
이곳, 지긋지긋한 안양교도소의 철문을 나서기 하루 전.
다시 한번 교도소장의 집무실에 조석구와 주괘율, 두 사람을 부른 한화기는 탁자 위에 발을 걸쳐 두고는 그들에게 제안을 던졌었다.
‘지금부터 양팔 저울 위 바구니를 채워 보도록 하지. 가장 먼저.’
한화기의 까딱거리는 발목 끝이 가리킨 것은 조석구였다.
‘그래, 당신부터.’
‘하! 후딱 말해 보소잉. 귓구녕은 쫑긋 열어두고 있응께.’
어디 법원에서 단체로 맞추기라도 한 것인지, 가장자리에 올려진 정의의 여신 디케의 조각상.
눈을 가린 채, 양팔 천칭을 손에 든 그 조각상을 바라보던 한화기. 그는 천천히 조석구를 향해 저울 위에 채워나가야 할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왼쪽에 올릴 것은, 당신 소유 저축은행의 자금력 전체. 거기에 더해서 고객 예치금까지 전부.’
‘어따, 이 양반. 아주 껍따구도 안 벗기고 닭을 통째로 씹어 삼킬라꼬 허시네잉!’
자신이 가진 모든 자산을 거는 것도 모자라, 자칫 대규모 금융사기범 딱지를 달 것을 감수하라는 한화기의 제안.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분통을 터트리는 조석구의 모습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서, 한화기는 그저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갈 뿐이었다.
‘오른팔에 올려질 그 대가로는.’
어차피 그깟 불평 따위, 압도적인 보상 앞에 수그러들 것이 뻔했으니까.
‘<코코아>’
‘……!’
탄약그룹의 나머지 계열사를 골수째로 뽑아먹자는 원래의 계획과는 별개로. 아예 <코코아>를 통째로 조석구에게 떼어 주겠다는 한화기.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던 조석구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탐욕에 물든 얼굴을 하고선 한화기에게 물었다.
‘고것이 참말로 가능한 것이당가? 빈 살만인가 하는 아랍 모래두지 놈이 가만히 보고 있겄어?’
‘최대 주주는 한서준 그놈이니 경영권 자체를 빼앗는 데에는 상관없다. 사우디 쪽과의 남은 딜은 당신이 알아서 할 문제이고.’
‘흐미, 들고 있지도 않은 광으로 허벌나게 팔아 재끼고 다니네잉.’
못마땅한 조석구의 표정.
하지만, 그가 내릴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근디… 요 광을 사야지 손아구에 쥔 사쿠라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란 말이여.’
한화기가 흔드는 <코코아>라는 월광(月光)이 가장 환하게 빛날 때는, 조석구의 손아귀에 쥔 분홍색 꽃이 개화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라믄, 나는 삼팔광땡을 쥐고 호남서 올라와야 쓰겄네. 아무래도 지방 호족보다야 서울 귀족이 낫지 않겄어?’
파도처럼 흔들리던 조석구라는 저울의 수평은 산속의 고요한 암자처럼 흔들림 없이 평안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쪽 저울 하나.
‘주괘율.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필시 자유일 터.’
‘…….’
그리고, 그 저울의 수평을 맞추는 것은, 한화기에게 있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형기도 얼마 안 남은, 여기 조석구와 달리 당신은 거진 20년은 더 썩어야 하지 않던가?’
‘꼭 탈옥이라도 시켜 줄 수 있을 것만 같구려.’
‘못 할 것도 없지. 가장 쉬운 탈옥 방법이 버젓이 있는데 안 쓰는 게 멍청한 놈일 테고.’
탈옥.
가장 어려운 탈옥은… 말 그대로 남들의 눈을 피해 교도소에서 달아나는 것.
시도하기도 어렵거니와, 시도한들 금방 잡힐 게 뻔한, 그저 발버둥에 불과한 것.
그러나.
‘합법적인 탈옥을 시켜 주지. 교도소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탈옥을.’
합법적인 방식의, 가장 쉬운 탈옥.
재벌가의 일원이자, 한때 탄약그룹의 방향키를 손아귀로 꽉 쥐고 있던 한화기였기에, 그는 주괘율에게 그 쉬운 탈옥 방법을 가볍게 선물할 수 있었다.
‘탄약 의료원에는 아직 내 힘이 닿고 있다. 제아무리 건장한 청년도 병자의 모습으로 꾸밀 수 있는 힘이.’
‘허어…!’
‘질병으로 인한 형 집행정지. 그걸로도 자유를 얻을 수 있을 터. 이만하면 주괘율 당신 또한 만족할 수 있겠지.’
복수에 이은, 되찾게 될 자유.
거절할 수 없는 이 제안에, 주괘율이 간을 보는 일은 없었다.
‘…반대급부는?’
‘뻔하지 않은가.’
그저 막대한 반대급부가 적힌 청구서에 표정이 일그러졌을 뿐.
‘미처 세탁하지 못한, 일정파의 1,200억 원여의 현금 다발.’
‘……!’
‘마늘밭에 묻어 두었다던 소문. 그게 그저 풍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익히 들었지.’
탄약그룹 사냥을 위한 자금으로 남아 있는 검은돈을 전부 동원하라는 한화기.
회백색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주괘율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게 모든 것을 걸라고 하는구려.’
‘걸지 않으면 어차피 잃을 모든 것이니까.’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성립된 거래.
조석구와 주괘율. 두 보스의 협조를 약조 받은 한화기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팔 저울은 얼추 기울기가 맞는 것 같군. 그럼, 나는 미리 나가 있도록 하지.’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창문 안쪽을 향해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창가의 커튼을 걷으며, 한화기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곧바로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겠다. 다시 보는 그날까지.’
그리고, 지금.
그때의 한화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계약금 조로 전해진 편지지를 바라보는 조석구와 주괘율.
“으허허…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보겠구마잉.”
“정말이지. 이건 계약금이란 말이 딱 알맞군.”
뜻밖의 선입금에 웃음을 감추지 않는 그들.
곧 다가올 전쟁의 카운트 다운은… 8월 15일, 광복절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광복절 특사 추가 편입 명단] 수형 번호 4747, 조석구.
-[탄약 의료원 정밀 신체검사 대상자] 수형 번호 1214, 주괘율.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누운 조석구.
편지지를 반으로 접어 소매 안에 넣은 그는, 주괘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화기가 승리하면 얻게 될, 막대한 전리품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흐흐흐, 대충 여름께쯤 나가서 다시 보자고잉. 한화기 그 양반까지 해서 세 명이서.”
* * * *
생각보다 한서호는 정신 수양이 덜 된 모양이었다.
“한서준, 너…!”
울컥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다짜고짜 내게 삿대질하는 한서호.
그리고, 그런 형의 추태와 비교되는 동생 한서후의 차분해진 모습.
“한서준 회장님, 간만에 뵙겠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깍듯하게 나를 대하는 한서후.
비록 그 속내가 겉과는 다르다는 사실쯤은 이미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알았으나, 이전의 망나니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쨌거나 회장 자리에 앉으셨으니만큼, 지위에 대한 존중은 있어야 하겠지요. 그게 사적인 자리에서라도.”
“편한 대로 하시죠. 마음 편하신 대로.”
“예, 회장님.”
그리고, 그런 동생의 모습에 조금 민망했던 것인지, 헛기침과 함께 내게 말을 높이는 한서호.
“크흠, 그럼 나도. 아니, 저도 존대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의로 가득 찬 사촌 간의 만남.
대충 랜섬웨어로 쓸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은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할머니를 뵈러 들어가기 전, 인사이동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곧바로 발표되는 인사이동 내역.
<코코아> 감사에 한서호가, 중국 담당 전무에 한서후가 임명될 것이라는 소식에,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모습이었다.
“……!”
“어째서…?”
벌써부터 들리는, 눈알 굴러가는 소리. 각기 처한 환경에서 손익계산을 하느라 바쁜 그들에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두 분, 제 결정에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막내 여동생 밑에 계시기 곤란하실 텐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탄약그룹의 회계장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코코아> 감사.
그리고, 외부의 적을 끌어들일 수문장 역할의 중국 담당 전무.
내게 겨누어질 것이 분명한 두 개의 칼날. 그 손잡이를 쥔 그들은 환히 웃는 낯으로 내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열심히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잘 부탁합니다.”
그래도 비교적 속이 환히 보이는 한서호와.
“크흠, 감사합니다. 회장님. 능력보다 과분한 직위를 맡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과분할지 아닐지는 일단 앉고 나서 생각하시죠.”
조금은 꿍꿍이를 감출 줄도 알게 된 한서후까지.
물론 그들은 모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다 내 손바닥 안에서 벌어지게 될 일이라는 것을.
팔을 돌려 손목시계를 바라본 나.
금색으로 칠해진 손목시계 배경에는, 칠흑 같은 검은색 시침이 숫자 7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그럼. 10분만 있다가 할머니께 인사드리러 들어갑시다. 오실 분이 하나 더 있으셔서요.”
“오실 분…?”
오실 분.
지금 이 순간에 오지 않으면 섭섭할 사람이 하나 더 있지.
“깜짝 선물 같은 건데, 아마 한서호 감사님, 한서후 전무님도 반기실 분일 겁니다.”
꽁꽁 얼어붙은 서태후의 심장이 죽음의 문턱 앞에서 녹아내려, 손발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풀려 버린 남자.
그는 바로.
“지금, 한화기 전 본부장님. 아아, 이제는 한화기 고문께서 여기로 오고 계시니까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병실 문.
간만에 바라 보는, 그 살모사 같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내밀며 건네는, 한마디 인사말.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악수. 맞잡은 두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의 힘이 서로를 겨누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한 고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