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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21화 (274/300)

221화 Ransomware(5)

JL 저축은행의 젊은 대표, 조한철. 고작 서른하나의 젊은 나이의 그는, 대표라는 묵직한 직함에 걸맞은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럼, 삼촌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어허! 여 회사에서는 박 이사님이라고 부르라 했으요, 안 했으요?”

어설픈 모양새의 직함뿐인 대표.

호남 일대를 주름잡은 조직폭력배 수괴의 아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유약한 모습의 조한철. 그는 온몸에 용 문신을 한, 박 이사라는 남자에게 주눅이 든 채로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삼촌. 아니, 박 이사님.”

“에휴, 니미럴.”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닫힌 문.

험상궂은 인상의 박 이사는 소파에 걸터앉고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걸걸한 목소리의 충고 아닌 충고도 함께.

“어야, 한철아. 정신 바싹 차려야 혀. 큰행님이 핵교 가 계신 동안 느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니께?”

“그, 그렇지요.”

“우리 아직 완전히 양지 올라온 거 아니여. 룸빵 관리하던 좆밥 시절로 찌그러지지 않게, 한철이 느가 잘 해야 혀. 알겄제?”

거칠게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조금 걱정된다는 모습으로 방문을 나서는 박 이사.

탁, 둔탁한 나무문이 닫히고 나서야,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조한철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후우… 기가 다 빨리네. 삼촌들도 그렇고, 제일 심한 건.”

호남 최대 조직폭력단, 스노우파.

비록 JL 저축은행의 탈을 뒤집어썼으나, 그 거친 품성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밑에 간부급들뿐만이 아니라, 가장 위에 있는, 수괴인 조석구까지도.

“아버지….”

며칠 전, 조석구의 급한 연락을 받고 안양교도소를 찾은 조한철.

면회실 안, 누런 죄수복이 무색할 만큼 눈에 살기를 띈 조석구는, 그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을마 안 남았다야. 8월까지만 사고 안 치고 버티고 있으면 되는 것이여.’

‘아버지?’

‘광복절날 특사로 나갈 테니께, 그때까지 한철이 느는 시키는 심부름이나 잘하고 있으면 돼야. 빵꾸 내지 말고.’

반입해 온 위스키를 종이컵에 따르는 조석구, 황금빛 탐욕이 그의 목구멍 너머로 꿀렁거리며 넘어가기 시작했다.

‘크흐, 죽이네. 여하간에 가만히 기다리믄 사람 하나가 갈 것이여. 서울서 내려오는 높은 양반이니께 잘 모시고.’

‘서울에서요? 아버지, 도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불안한 아들의 목소리 따위는 코웃음으로 넘기는 조석구.

어느새 위스키 한 병을 통째로 비운 그는 벌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밑바닥 깡패 낙인. 인자 싹 벗어던지고 중앙 귀족으로 가야 쓰겄지 않겄냐?’

‘그래서 JL 저축은행을….’

‘촌 동네 토호로는 목마른 거이 해소가 안 되어부러!’

쾅!

거칠게 빈 병을 탁자에 내리치는 조석구. 주둥이를 잡은 손에 힘은 끝내 풀지 않으려는지, 유리병 아래 가장자리에 쩌걱쩌걱 소리와 함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신분째로 바꿀 것이여. 한철이 네놈 신분. 그리고, 곧 태어날 내 손주 놈 신분까지 전부.’

‘아버지….’

‘시뻘건 괴기가 눈앞에 누워 있는디, 못 처먹으면 그이 병신이다. 한철이 네놈은 아직 이빨도 못 돋았으니께.’

톡, 톡.

손톱 끝으로 앞니를 두드리는 조석구.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술에 취한 것인지, 욕망에 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취한 채로.

‘질긴 힘줄은 이 애비가 뜯어주마. 너는 받아서 목구녕으로 넘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여.’

그리고, 지금.

JL 저축은행 대표 집무실 안에서, 제 아버지와 있던 일을 상기하는 조한철.

“뜯어주는 것도 못 받아먹으면… 진짜 병신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

그는 아버지로부터 건네받았던 명함 한 장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선명한 붉은색의 불꽃 모양 로고. 그리고 노란색과 검은색의 열대과일 모양이 함께 적힌 그 명함의 주인은 바로.

“한서호, 한화기 고문의 첫째아들… 어쩌면 나랑 비슷한 놈일지도?”

그리고, 고개를 들자 조한철의 눈에 보이는, 창밖 너머의 한 남자.

자신과 비슷한, 야망에 찬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끼며, 조한철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올라오는 한서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한서호입니다.”

“조한철입니다.”

물론… 고작 대리인에 불과한 그들이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저희 아버지와 가볍게 말씀 나누시죠. 준비해 두었습니다.”

휴대전화에 연결된, 큼지막한 대형 모니터.

지직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가시고 나자, 점점 선명해지는 화면 속.

거기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실톱을 들고서 환하게 웃은 조석구의 얼굴이 비쳐 있었다.

-어따, 즈 아버지하고 똑같이 생겼네. 느가 한서호다냐?

-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용서해 주십시오, 조 선생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한서호.

핏물을 뒤집어쓴 조석구는 작업장 근처의 나무 팔레트에 걸터앉고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손을 잡을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자, 시간 없응께 후딱 이바구허고 끝내자고. 오늘 요놈 요거 엄지발가락 하나 싸게싸게 잘라부러야 하니께.

* * * *

“후우…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담?”

한 시간여 후.

JL 저축은행 본사 건물 바깥으로 나간 한서호. 그는 뒤돌아보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는 황급히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가 몸을 누였다.

“사람 발가락을 눈 하나 깜짝도 안 하고 토막 치다니!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미친놈과….”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열 개의 발가락.

그러나, 문득.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한서호. 기억에 박힌, 잘려 나간 발가락은, 이미 탄약그룹의 적장손이라는 지위처럼 바닥 위에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하긴, 저 정도가 아니면, 우군으로 삼을 수도 없겠지.”

길게 내쉰 한숨.

안전벨트를 평소보다 꽉 동여맨 한서호는, 차에 시동을 걸며 모니터 속의 조석구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느는 최대한으로다가 후딱 탄약그룹 지배구조를 찾아가 정리해 오라고잉. 순환출자 구조면 고리만 찾으면 되니께, 생각보다 돈도 적게 들 것이여. 어데 보자… 대충.

실톱으로 사람 발가락을 썰어대며 계산하던 조석구.

고통스러운 비명을 배경음악 삼아, 셈을 마친 그가 내렸던 결론은.

-1조 원 정도.

1조 원.

탄약그룹의 규모에 비해 다소 작은 규모가 아닐까 싶은 그 금액은, 아직 확증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희망이 보이게는 만들고 있었다.

자기 몸처럼 덜덜 떨리는 차 안, 한서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장갑을 끼워 넣으며 중얼거렸다.

“JL 저축은행 분식회계를 통해서 8,500억 원. 여기에 주괘율의 마늘밭 자금을 포함한 1,500억 원까지. 얼추 맞긴 하다. 이론적으로는.”

꼭 맞는 장갑 탓일까?

아니면, 어림셈으로 조금은 차분해진 머릿속 때문일까?

떨림이 잦아든 한서호의 양쪽 손.

“탄약그룹 회장이라는 왕좌를 물려받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거칠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

낡고 허름한 차 안에서, 한서호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4년 전, 저 잘려 나간 발가락처럼 토막 난 인생. 그에 대한 보상을 꼭 받아내고야 말겠다고.

“가질 수 없는 거라면, 아예 부숴버려서 부속품 값이라도 받아야겠지.”

* * * *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듯싶네. 여러모로.”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김원철 아저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리고, 뒤이은 보고를 들은 내 얼굴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의사 말로는 무리가 심하셨다네. 아마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으로… 후우, 그렇게 될 것 같어야.”

“하아, 일단 알겠습니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

분명… 저번의 마지막 병문안에서, 모든 심력을 다 소진하셨을 터다.

쓰러지는 그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는 막막함보다는 안도감이라는 감정이 조금 더 많이 비쳐 보였으니까.

물론… 그다음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겠지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다면, 아마 장례식 이후부터 사달이 난다고 봐도 되겠지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한화기 그 양반 반응대로라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그게 뭔지를 몰라서 답답한 거지만.”

숙부의 꿍꿍이.

분명 숙부는 독사처럼 교활하고, 또 누구보다 잔인하기에… 내게 가장 위험이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대충 알 것도 같습니다.”

“응? 어떻게?”

그 어떤 이도 홀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이루어낼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나는 떠올렸다.

회귀 이전,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보았던 숱한 사람들. 그들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더 지능적인 범죄의 길로 이끄는지를.

“괜히 교도소를 속어로 학교라 부르는 게 아니니까요. 아마도 숙부는.”

그리고 아마도.

숙부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일 터.

“거기서 기회를 엿보았을 겁니다. 나온다면, 나오게 된다면, 그다음에 어떤 방법으로 움직일지까지도.”

“흐음….”

“그리고, 보통 그 방법은 좀 더 불법에 가까운, 어두운 쪽일 테고요. 유세나 보좌관.”

나는 손짓으로 유세나 보좌관을 불러들였다.

미리 준비해둔 자료를 내게 건네는 그녀.

“회장님. 준비되었습니다.”

“고마워요.”

손에 쥔 얇은 종이 뭉치 하나.

거기에는… 안양교도소 3층에 수감된, 양지와 음지 모두의 거물급들에 대한 리스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제법 끗발 되는 사람들은 죄다 안양교도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 잠깐만, 잠깐만. 그렇다는 건…!”

문득 스쳐 지나가듯 번뜩이는 이름 석 자.

김원철 아저씨 또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기시감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음지의 거물. 그것도 숙부에게 협조할 만한 유인이 있는 그자의 이름은 바로.

“주괘율. 그자 또한 같은 곳에 있더라고요.”

“그 조폭 영감, 회수하지 못한 범죄수익이 더 있다는 건가? 도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단순히 주괘율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요.”

은닉한 수익이 많아 봐야 1,000억 원. 아주 많이 쳐 준다고 한들 2,000억 원.

이 정도로 탄약그룹을 뒤집기는 어려울 터.

그렇다면… 숙부에게는 다른 패가 하나 더 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 그리고 계속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측면에서 내 폐부를 찌를 것이 분명한 패가.

“그러니, 유세나 보좌관이 좀 도와줬으면 하고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세나 보좌관.

이런 어둠의 세계를 가장 잘 아는 자. 호남에서 올라와 명동에 자리 잡고, 지금은 양지의 사람이 된 지 오래인 그가 다시금 나를 도울 것이다.

이미 나와 운명 공동체로 엮인 지 오래일 테니까.

“이동합시다. 명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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