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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22화 (275/300)

222화 Ransomware(6)

명동, 유태촌의 자택.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 이제는 희미한 빛줄기만이 남은 할머니. 그리고, 그 마지막 유언으로 가석방된 숙부와 함께 유배에서 풀려난 한서호, 한서후 형제까지.

다시금 탄약그룹을 노리고 있는 숙부 이야기를 들은 유태촌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허어, 이 고얀 것들을 봤나! 천하의 찢어 죽일 놈들! 제 목숨줄 끊지 않은 은혜도 모르고!”

이미 나와 같은 배를 탔기에, 이제는 탄약그룹의 존망에 자신을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유태촌.

거기에 더해, 이제는 한층 깊어진 주름과 푹 팬 나이의 흔적이 그의 마음을 울리기도 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유언에 유태촌 자신도 공감하는 바가 있었겠지.

“후우. 거, 이사장님께서 많이 편찮으셨나 보구먼.”

“아마 이번 주나 다음 주 중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듯합니다.”

“끄응, 그렇구려. 내 부모 된 마음이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나를 적극적으로 돕는 유태촌.

거기에 나름 비공식 원로 역할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흰 도화지 위에 붉은색으로 가위표를 치기 시작했으니까.

“어디 봅시다. 검찰 쪽 라인은 이미 쓰기 어렵다 하였고.”

직, 직. 검찰이라고 쓰인 검은 글씨 위에 덧칠해지는 붉은색.

일단 법무부에 가 있는 박은지 검사 카드는 더 쓰기가 어려워졌다. 저번 <주님의 동산> 건 이후로 윗선에서 통제하기 어려웠다 느낀 건지, 아예 해외 연수를 보내버렸으니까.

“개인적으로 아는 그 여자 검사뿐이 아니라, 검찰 조직 자체가 쉬이 움직이기 어려울 터.”

“바로 보셨습니다.”

심지어는 그 위쪽,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같이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을 일으켜 세우기도 어려운 상황.

이제 여덟 달쯤 남은 대통령 선거. 정권교체 시기를 앞에 두고서, 검찰 조직 전체가 이런 재벌 사건에 나서기 어려울 타이밍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칼을 뽑기도 어려운 시기이고.”

같은 이유로, 대통령의 힘을 빌리기도 어려운 상황.

“야당 눈치가 보일 겁니다. 탄약그룹 특혜 이슈가 도마에 오르면, 숙부보다 그게 더 골치가 아플 거고요.”

“그리하겠지. 허면, 바깥 도움은 받기 어려울 터이고.”

결국, 청와대라 쓰인 검은 글씨 위에도 큼지막한 붉은색 가위표가 그려졌다.

다른 모든 권력기관에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경우의 수가 마땅치 않음을 확인하자, 고개를 들어 내게 물음을 던지는 유태촌.

“해서, 내 도움이 어떻게 필요해 찾아온 게요?”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엽차 향 너머 내 눈을 바라보는 그는, 짧은 단문만으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결국, 다른 방안을 궁리해 온 것 아니겠냐고. 괜히 늙은이 궁금하게 변죽만 울리지 말고 어서 이야기해 보라고.

그리고,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곧바로 그 물음에 응답했다.

“학교 아니겠습니까, 교도소를 부르는 은어가.”

툭, 탁자 위에 내려놓은 사진 두 장. 거기에는, 안양교도소 3층 복도 왼편에 똬리를 튼, 뒷세계의 두 거물의 모습이 각각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 숙부와 쿵짝이 맞을 것 같아 보이더군요.”

“주괘율이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분명 그리할 것이고. 이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을 한쪽 사진을 바라보던 유태촌.

드문드문 떠오르는 과거의 조각이 긴가민가했던 건지, 아니면 잊고 살았던 이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인지. 잠시 낮은 신음을 토해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허어, 이거 조 선생이로구먼.”

“조 선생…?”

“아아, 조석구의 별칭이 조 선생이요. 그렇다고 이치가 현명하거나 해서 붙은 별명은 아니고.”

물론 그가 떠올린 조석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남 쪽에서 하도 잔인한 것으로 유명해서 말이지. 발가락을 전부 잘라내면, 제아무리 콧대 높은 놈들도 선생님이라 부른다나?”

“…….”

“거기에, 저축은행을 먹어 치운 다음부터 지역 토호 흉내까지 내니, 조 선생이라는 칭호가 맞아떨어지기는 할 게요.”

뒤이은 조석구라는 이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

호남 조폭 출신에 몇 년 전 저축은행 두어 개를 인수했다던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거물급 인물인 모양이었다.

나름 경기 남부에서 자리 잡았다던 주괘율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그럼, 조석구가 가진 자금력이 얼마나 됩니까?”

“공식적으로는 여유 자금이 2,000억 원이 조금 안 될 거요. 공식적으로는.”

“비공식적인 뭔가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비공식적인 무언가.

얼핏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유태촌의 입을 빌어 듣게 된 그것은… 참 뒷세계의 인물이 돈과 권력을 쥐면 저렇게 되는구나를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고객 돈. 대규모 예금 횡령 말고 달리 방법이 있겠소?”

“그러면… 최대한 무리해서, 놈이 배가 터지도록 부풀릴 수 있는 자금 규모가 얼마쯤으로 보십니까?”

“음….”

잠시 고민하는 유태촌.

머릿속으로 바로는 떠오르지 않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방문에 대고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봐! 밖에 누구 있나? 지하 금고에서 장부 좀 가지고 오너라!”

쿵, 쿵, 쿵.

열쇠를 건네받은 사용인이 묵직한 장부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

“세간에서는 잘 모를 게요. 고작 촌구석 저축은행 따위가 뭘 하겠냐 싶겠지. 검은돈의 흐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발걸음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엽차로 입을 적신 유태촌이 내게 말했다.

“자, 잘 보시오.”

툭, 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노란색 종이 뭉치.

갈색 노끈을 풀어 헤치고서야 보이는 안쪽 내용. 그것은 과거 수십 년 동안 조석구라는 사람이 어떻게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는지를 내게 여실히 보여 주었다.

“지하경제에서 끌어올린 돈다발이 모이게 되면, 그게 얼마나 큰 강줄기가 될는지를.”

계산기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유태촌의 손가락.

낡은 회계장부 위에 적힌, 여러 숫자를 더하고 빼고를 반복하자, 마침내 숫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규모의 금액이.

-[추산 금액] 8,500억 원.

“주괘율의 은닉자금 1,500억 원과 합친다면, 총 현찰 1조 원짜리 공격. 어찌… 막아내실 방법이 있겠소?”

* * * *

“빈 살만 왕세자는 안 되야. 이미 투자금액이 법정 한도액을 꽉꽉 채웠어. 합법, 편법 싹 다 포함해서 말이여.”

실탄 1조 원짜리 공격.

사실 1조 원이라는 폭탄에 대비할 가장 좋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사우디 큰형님, 빈 살만 왕세자에게 손을 벌리는 것.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지갑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김원철 아저씨.

“여기서 투자금이 더 들어온다? 그러면 탄약그룹은 사우디 회사가 되는 것이여. 거기에 방산업체 외국인 투자 제한 규제도 있고.”

“뭐, 괜찮습니다. 중동 큰형님에게 손 벌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어미 새가 물어다 주는 것만 받아먹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나 역시 이를 반기지만은 않는다.

이 정도 위기는 외부에 싫은 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혼자서 헤쳐 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빈 살만 왕세자가 내게 주었던 황금 권총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어미 새 없이도 폭풍우를 뚫고 나갈 자신도 있고요.”

“어…? 그런데, 명동에서도 뾰족한 수가 안 났다고 하지 않았나?”

며칠 전, 대략적인 상대의 실탄 규모만을 확인하고 마무리된 유태촌과의 만남.

옛날부터 쌓인 검은돈의 규모나 그쪽 뒷세계의 역사 같은 것을 알기에는 유태촌이 제격이기는 했다.

그러나, 현업에서 떠난 지 제법 오래된 사람이라서일까? 현재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른다던 유태촌.

그래서인지, 목소리에 불안감이 담긴 김원철 아저씨.

“아닌 말로, 저번에 SKC 그룹에 공격 들어왔던 거 말이여, 사모 펀드 애들. 걔들이 그때 쓴 자금이 얼만 줄은 알지?”

“2,500억 원. 꼴랑 실탄 2,500억 장에 재계 5위 대기업 반쪽이 잘려 나갈 뻔했지요.”

“그치. 근데 이번에 공격해 올 놈들은 총알이 1조 장이라니까? 최신 정보가 있어야… 어어?”

내 입꼬리가 실룩대는 것을 보기라도 한 걸까?

곧바로 따라서 미소를 짓는 김원철 아저씨.

“얼렁 말하쇼.”

“하, 이제는 얼굴만 봐도 다 알 정도입니까?”

자신감이 담긴 내 모습을 보고는 대답을 재촉하는 김원철 아저씨.

그렇다.

조석구라는, 총 1조 원의 총알을 가진 뒷세계의 거물을 상대할 수 있는 최신 정보.

그 최신 정보를 가지고 있을 법한 사람은… 사실 뻔했으니까.

“호남 쪽 불법 세계. 최신 정보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나주를 중심으로 전남 쪽 사정을.”

“나주…! 잠깐만, 설마?”

나주.

몇 달 전, 나와 함께 주님 앞에서 찐한 예배를 드리고, 시원하게 교단째로 폭파당한 나주의 사이비 교주.

지금은 이미 1심 선고를 받고서, 청주여자교도소로 주소지를 옮긴 그 사람은 바로.

“<주님의 동산> 사이비 교주. 아무래도 박금덕 씨 보러 교도소에 면회 좀 가야겠습니다.”

* * * *

“하아, 박금덕 이 개 같은 년아. 아직 감이 잘 안 잡히나 봐?”

한때 신의 대리인이었던 박금덕.

가장 하늘에 가까웠던 그녀는 지금, 교도소 변기에 머리를 처박힌 채 울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변기통은, 막내가, 빡빡, 쳐, 닦는, 거라고.”

“읍, 읍! 읍읍…!”

말 마디 마디마다 끊어서 수세식 변기에 박금덕의 머리를 박아대는 선배 재소자.

“왜 말귀를 못 알아 쳐드세요! 조지는 년 마음 아프게!”

포악한 모습으로 잔뜩 텃세를 부리는 그녀 앞에서, 박금덕은 지금 누구보다 땅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야야, 고만해라. 괜히 목매달고 뒤져버리면, 밥 먹을 때 시체 냄새 때문에 골 아프다.”

“에이, 방장 언니. 금덕이 이년이 죽긴 왜 죽습니까? 꼴에 영원히 산다는 년인데. 구원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년은 맘대로 뒤지지도 못해요.”

“하! 그것도 그렇네.”

형식상으로나마 말리는 시늉하던 방장마저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동조하는 상황.

“그럼 어디 계속 족쳐봐. 혹시 몰라? 잘못해서 뒤지면 다시 부활이라도 할지.”

“흐흐흐, 알겠습니다. 박금덕 개년아 너 딱 대.”

그렇게, 교주 박금덕의 머리통은 변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읍, 읍! 읍읍!”

갑자기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있기 전까지는.

“죄수 번호 2303! 2303!”

“헉!”

언제 나타났는지,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교도관의 목소리.

흉측해진 박금덕의 몰골을 바라본 교도관. 그는 텃세를 부리던 여성 재소자와 방장 쪽을 노려보며 눈치를 주더니, 이내 중요한 일이 있다는 양 박금덕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특별 면회다. 바로 목욕하고 준비되는 대로 나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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