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쩐주(1)
석 달이라는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탄약그룹의 저축은행 연합체에 대한 대규모 대출 신청. 그리고 그 파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금융감독원 측의 위험도 조사 착수.
판을 크게 벌이고 무대 위에서 조명을 강하게 내리쬔 그 결과는, 딱 내가 의도한 대로의 연출이 나오게 되었다.
바로 지금, 회장 집무실 한쪽 벽에 걸린 TV 속 화면에 나오는 뉴스 방송처럼.
-탄약그룹 측에서 신사업 동력 확보를 위해, 지난 5월 전국 저축은행 연합 측에 제시한 수십조 원 단위의 대출.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튼튼한 신용을 자랑하던 저축은행이 사실은 부실한 껍데기뿐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강해린 기자 연결합니다.
곧바로 바뀌는 화면.
마이크를 쥔, 아기고양이를 닮은 기자가 쇠사슬이 걸린 채 굳게 잠긴 빌딩의 대문 앞에 서 있는 모습.
-전남의 JL 저축은행 본사 앞입니다. 자금 관리를 가장 부실하게 한 저축은행 중 하나입니다.
하도 언론에 시달려서인지, 본사 자체를 걸어 잠근 모양인 JL 저축은행.
뒤이어, 목소리 변조에 모자이크까지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조한철 대표로 보이는 남자의 인터뷰로 화면이 바뀌었다.
-아이, 참. 아니라니까! 그냥 일시적인 겁니다, 일시적인!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 JL 저축은행의 조한철 대표.
곧바로 화면은 다시 처음 스튜디오로 돌아와 앵커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번 사태의 방아쇠 역할을 한 탄약그룹 측에서 입장표명이 있었다고요?
-예,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은 이번 사태에 대해 저축은행 측에 큰 유감을 표하며,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삑, 삑, 삑. 갑자기 리모컨을 쥐더니 볼륨을 세 칸이나 높이는 김원철 아저씨.
“어어, 나온다. 나온다.”
괜히 호들갑을 떨면서 키득거리는 모습이, 참 순진무구하다고 해야 할지, 장난꾸러기라고 해야 할지.
곧이어, 나오기 시작한 내 인터뷰 영상.
-대단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축은행이 부실이라니요.
“캬, 입에 침도 안 마르고. 우리 회장님 탈랜트 해도 되겄어.”
“아이 참, 탈랜트가 뭡니까. 요새는 다 배우 아니면 연예인이라 하지.”
뭐…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참 잘한 인터뷰이긴 하다.
최대한 신뢰가 갈 수 있게끔 정돈된 외양을 하고 정돈된 메시지를 던졌으니까.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희 탄약그룹으로 인해 더 큰 부실로 이어지기 전에 싹을 잘랐지 않습니까. 금융 당국 측에서 엄정한 대처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마지막 자화자찬을 끝으로 마무리된 인터뷰.
더 들을 것도 없다. 나는 다시 김원철 아저씨에게 리모컨을 빼앗고는, 곧바로 화면을 꺼버렸다.
“얼추 마무리되었네요. 호남 조폭들이 장난칠 위기는 지나간 모양입니다.”
“근데, 일을 너무 키운 것도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래도 될라나 몰러?”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항암제 비슷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에게 있어, 그리고 탄약그룹에 있어 암세포나 다름없는 숙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계속해서 내 목을 조여오는 숙부를 상대하려면… 아주 강한 항암제가 필요한 것이 당연할 터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는 속담. 그런데, 그 빈대가 꼭 잡아야만 하는 빈대라면? 잡지 않는다면 내가 물려 죽는 빈대라면?”
“음, 그럼 곤란하지.”
“그때는… 초가삼간을 태워야 합니다. 마치 항암제가 암세포를 잡느라 다른 세포들까지 죽이는 것처럼.”
그렇기에 조금 과하게 태워버린 저축은행이라는 초가삼간.
거기에 과감히 불씨를 댕길 수 있는 이유도 있다. 어차피 내 회사도 아닌걸.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내 집도 아닌데, 빈대까지 잡고.”
“흐흐흐, 그건 맞지.”
“이제 그냥 강 건너에서 불구경만 하면 됩니다. 방만하고 부실한 저축은행들이 시원하게 훨훨 타오르는 모습을.”
털썩,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오늘의 조간신문 1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나.
거기에는, 이번 저축은행 부실 사태에 대한 기사가 큼지막한 헤드라인과 함께 적혀 있었다.
회귀 전, 이맘때쯤 내가 교도소에서 봤던 신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어차피… 터질 일이기도 했고.”
광주의 명문, 제현고등학교.
그 학맥으로 끈끈하게 뭉친, 검은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던 금융 엘리트들.
분명 그때도 그랬다.
당시 내가 교도소에 있었을 때, 방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났으니까.
‘어야, 한 회장님아. 저기 신입으로 그쪽하고 동종업계 양반들 온 것 같은디. 안 봐도 되겄어?’
‘동종업계 사람들이요?’
‘거, 뭐냐, 무슨 부산인지 광주인지 저축은행 가지고 크게 해먹은 놈들이라드만.’
수갑을 찬 채, 포승줄에 묶여 호송 차량에서 내리는 신입 수감자들.
창살 너머로 보이는 금융 엘리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저축은행 사건을 다루는 신문 기사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갔었다.
‘분식회계에 횡령에 아주 가지가지 했네요. 저기 지방 쪽 저축은행 말고도 여럿 잡혀 왔다면서요?’
‘그 광주에 제현고등학교였나? 거기 출신 금융 먹물들끼리 거하게 해 먹은 것 같은디. 나는 무식해서 그런 거 잘 모르겄어.’
참 아이러니하다. 그때와 달리 나는 여기 있는데, 저축은행으로 사고 쳤던 사람들은 결국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때를 생각하니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그런 내 모습이 의아했던 모양인지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를 띄우는 김원철 아저씨.
“어… 회장님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재밌는 게 생각나서요.”
쭉 켜는 기지개.
나는 한쪽 벽에 그려진 탄약그룹 조직도를 향해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본사 조직 바로 옆, <코코아>라고 적힌 별도 법인의 감사직에 있는 한서호를 생각하며.
“일단 그러면 쓰임을 다한 쥐새끼부터 좀 잡으러 갈까요?”
“하이고, 출소한 지 몇 달 안 되었는데, 금방 다시 들어가게 생겼네. 서호 금마는.”
* * * *
그리고, 같은 시각.
“어째서…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침을 질질 흘리며 얼빠진 모습을 한 한서호.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어야 해….”
한화기의 자택, 서재.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한서호는 귀를 막은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제 아버지가 조폭 수괴와 통화하는 것을 애써 듣기를 거부하며.
-지금 무슨 초대형 사고가 났는지 참말로 이해를 못 하시나 보네잉! 믿고 맡기는 큰아들이라믄서, 이것 하나 감지를 못 혀서 우짜라꼬!
서재가 떠나가라 쩌렁쩌렁 목청을 높이는 조석구.
저축은행 부실 사태의 직격탄을 얻어맞은 그는 한화기를 향한 격노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죄 긁어서 1조를 맹그러놨더니만! 인자 쓸 돈이 내 돈 2,000억에 주 회장 돈 1,500억 합쳐가, 꼴랑 3,500억으로 작업 쳐야 한다, 이 말이여!
그리고, 조석구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러나 날카로운 살기를 띤 주괘율의 목소리.
-한 고문님.
“…듣고 있다.”
-귀는 안 먹으셨나 보군. 차라리 귀에 쇠꼬챙이라도 꽂혀 있었으면 더 나았을 것을.
마치 맹수가 그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겁박을 주기 시작하는 주괘율.
마늘밭 지하 창고에 묻혀있던 최후의 은닉자금까지 꺼낸 그는, 조석구만큼이나 이 상황에 분노했다.
-내 돈 1,500억 원. 일단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무조건 굴려야 합니다. 중간에 이놈 저놈 눈독 들이다 날아가기 전에, 무조건!
그리고, 미리 둘이서 합의라도 한 듯, 전화를 바꾸어 화제를 돌리는 조석구.
-한 고문님요. 8월 15일, 광복절 특사. 인자 2주 남은 것 알고 계시당가?
“…잘 알고 있다.”
-그라믄, 여 주 회장허구 같이 나가서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그때까지 무슨 말이든 나가 고개를 끄덕거릴 대답이 있었으면 혀요. 알긋제?
“…….”
뚝, 대답조차 듣지 않고 곧바로 끊어버린 통화.
그 질 낮은 협박에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한화기.
쨍그랑! 그는 손에 마구잡이로 잡히는 명패를 내던지며, 구석에 쪼그려 앉은 한서호를 향해 소리쳤다.
“이 버러지 같은 놈! 무슨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는 것이냐!”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코코아> 감사로 있으면서 그깟 장부 하나 제대로 못 보고, 이 무슨 쓰레기 같은 추태야!”
뱀처럼 가늘게 뜬 두 눈.
이 눈이 나온다는 것은… 완전한 손절을 의미했다. 설령 그 대상이 핏줄로 이어진 관계라 할지라도.
“아, 아버지! 제발 진정하시고, 제 말 좀…!”
“쓸모없는 놈! 늘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놈! 네놈 핏줄에 흐르는 피가 아깝다!”
결국, 내려지고야 만 축객령.
“꼴도 보기 싫다. 꺼져라!”
복도에 울리는 한서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갈 때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분을 삭인 한화기.
“후우, 미쳐버리겠군. 한서준… 애당초 이걸 노린 거였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서?”
이번 저축은행 건, 그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어차피 책임이야 쓸모없는 큰아들에게 모두 덮어씌우면 그만일 터.
그에게 있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번 일로 인해 부족해진 자금의 확보였으니까.
“대책을 찾아야 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으실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은데요. 아버지.”
그리고 그 순간, 문가에서 들리는 목소리.
제 형이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 것을 보며 살며시 웃음 짓던 한서후였다.
“서후? 네 녀석이 여길 어떻게…?”
“에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막 공항에서 오기라도 한 것인지, 쓰던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넣는 한서후.
4년 전, 사고뭉치나 다름없었던 그는 훌쩍 성장한 모습으로 제 아버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다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저는 누구처럼 쓸모없는 인간이 될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여기저기 좀 뛰어다녔걸랑요.”
“서후 네가 말이냐?”
“예. 1조 원에서 모자란 6,500억 원. 어디서 구할 건지 말입니다. 특히나.”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춘 한서후.
곧바로 한화기가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조폭 놈들이 감히 날뛰지 못하게 딱 중심 잡아줄, 그런 쩐주가 어디 있는지 말입니다.”
“…일단 앉거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한화기.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움직임 소리가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는 제 둘째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말이 타당하다면, 서호 그놈이 받을 몫을 전부 서후 네게 주마.”
“약속 감사드립니다. 역시 아버지이십니다.”
말없이 턱 끝을 조금 올린 한화기. 어서 그 쩐주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 것인지 묻는 그에게, 약간의 뜸을 들인 한서후가 이렇게 말했다.
“그 힘 세고 돈도 많은 쩐주는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