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쩐주(4)
-빠라바라바라밤!
8월 14일. 광복절 이브를 맞아 신나게 달리는 폭주족들.
오토바이에 인생을 바친 청춘들은 여의도 K 호텔 앞에서도, 자발적 묘기를 선보이며 경찰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그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10분여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VIP 라운지로 올라온 한서후.
“어! 왔어, 왔어? 이야, 무슨 이렇게 바빠? 얼굴 보기 힘들게.”
“후우, 닥치고 술이나 좀 줘봐. 아니, 김범호 너 말고.”
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한서후. 그는 술병을 잡은 김범호에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곧바로 손가락을 추켜올려 여자 하나를 가리켰다.
“단발머리 너. 옆에 좀 앉아서 따러.”
“오, 한서후 안 죽었네. 나이지리아 가서 순 거세당하고 온 줄 알았는데!”
“시끄러 이 새끼야. 건배! 짠!”
피곤했던 것인지, 쭉쭉 들이켜는 양주. 폭음의 전조증상을 유심히 지켜보며, 김범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놈의 성질머리는 즈 애비랑 똑 닮았어. 아니, 한서준도 독한 거 보면 탄약그룹 한씨 집안 특징인가?”
이래저래 탄약그룹과는 악연인 김범호.
한서후보다 좀 더 순한 술을 홀짝이며, 그는 얼마 전,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래서, 한서후한테 무슨 정보를 얻어내면 되는 건데?’
‘몇 번 같이 해보니까 확실히 이야기가 빠르네.’
툭, 탁자 위에 내려놓은 자그마한 네모난 금속 물체.
‘녹음기…?’
‘가서 다 녹음해 와.’
딱 봐도 어디 정보기관에서나 쓸 법한 전문 녹음기. 그 사용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에는 왜 간 건지, 가서 누구를 어떻게 만난 건지. 그리고… 조달할 자금 규모는 얼마만큼 클지까지, 전부.’
‘혹시 서후가 말을 안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말하게 만들면 되잖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까라면 까지, 뭔 말이 그렇게 많냐는, 전형적인 탄약 사나이 스타일 명령.
그 막무가내식 명령을 상기한 김범호에게는 투덜거릴 여유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곧바로,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대충 닦은 한서호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꺼내었으니까.
“크허, 그래도 일 다 끝내고 오니까 좋네.”
“중국 갔다 왔다며? 오늘 오후에 귀국했고.”
“아, 뭐… 그렇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김범호.
그다지 이야기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 같기에, 그는 세워두었던 Plan B를 꺼내 들었다.
김범호는 곧바로 한서후 옆에 앉은 여자에게 곁눈질로 지시를 내렸다.
“오빠, 많이 피곤해 보인다.”
갑자기 한서후 위에 올라타 그를 와락 끌어안는 걸그룹 연습생.
“아, 이년아 뭐 하는…!”
“그냥 이러고 있어, 오빠. 편하게. 응?”
나이지리아 정글에서 있었던 지난 4년간의 수도승 생활.
갑자기 훅 들이닥친 여자 살결 냄새에, 안 그래도 술에 취한 한서후의 자제력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크흠… 피곤한데 잠깐 이렇게 있어도 괜찮겠지.”
“착하다, 우리 오빠.”
그 자세 그대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 한서후. 다른 의미의 행복한 표정을 한 김범호가 잔에 술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이야, 예린이가 서후 너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시껌마.”
“아니, 진짜로. 사실 탄약그룹에서 너만큼 깡 있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나이지리아 오지에서 화려한 부활까지!”
“오늘 왜 이렇게 아부야? 뭐, 약 먹었어?”
“아, 그야 서후 너한테 희망찬 미래가 보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주섬주섬, 종이 쇼핑백 안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김범호.
곧바로 그의 손 위에 새하얀 얼음 결정 같은 것이 올려졌다.
“약을 안 하지는 않았고, 흐흐흐.”
“야, 야! 그거 진짜 마약…!”
기겁하는 한서호를 보며 김범호는 생각했다.
어차피 탄약그룹에 개 목걸이 걸린 인생,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단도리를 쳐서 한서준에게 신임을 얻는 편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에라 모르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했지? 난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툭, 알갱이 하나를 반으로 쪼개, 혀 밑에 넣고 살살 녹이는 김범호.
곧바로 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새사람이 된 것처럼 황홀한 미소가 입가에 가득 퍼져갔다.
“오케이, 기가 막히네… 이게 부작용도 별로 없는데 리프레시 하기 딱 좋다니까. 생각보다 멀쩡하지?”
“그, 그렇네…?”
“환각제가 아니라서 그래. 오히려 정신이 확 드는 게 제대로 각성한 느낌이라니까, 특히.”
툭툭,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다리 사이를 가리키는 김범호.
“남자한테 참 좋은데, 이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
흥이 동했던 건지, 김범호는 자기 옆에 앉은 모델 출신 여자의 허리춤을 감싸 쥐었다.
“그럼, 예린이랑 잘 노시고. 거, 약 남은 건 알아서 쓰던가 하고.”
끼익, 닫혀버린 문.
마약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가만히 눈으로 바라보던 한서후.
4년간 쌓여 왔던 모든 욕구가 한 번에 팽팽함을 잃고 끊어져서일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비닐봉지로 손을 뻗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머, 오빠. 할 거면 나랑 같이하자.”
그러고는, 곧바로 한서후가 들고 있던 마약을 가로채 입 안에 털어 넣는 걸그룹 연습생.
주머니에 녹음기를 집어넣은 그녀는 곧바로 한서후에게 입맞춤을 하며 녹아내려 끈적해진 마약을 한서후의 혓바닥으로 흘려보냈다.
“천국을 보여줄게. 구름 위에서.”
* * * *
다음 날, 광복절 저녁. 인천공항.
“어우, 골 아파.”
입국장 앞에서 양복 차림으로 대기 중인 한서후.
“그래도, 확실히 이 정도면 부작용이 덜하긴 해. 살짝 필름이 끊겨서 그렇지.”
<상하이 캐피탈>의 옌룽을 기다리는 그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어제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내가! 중국에서 1조짜리 사업을 끌어올 사람이야, 내가!’
조각조각 잘려 나간 기억.
‘옌룽 실장하고 술도 먹고! 제임스 왕 이사랑 사우나도 가고! 다 했어!’
마약에 취한 채, 여자 앞이라고 분명 중요한 키워드를 거침없이 내뱉었던 한서후.
“쓰흡, 허세 좀 떨었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말도 좀 했던 것 같고.”
걱정이 조금 되긴 했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천하게 여기는 딴따라 계집. 심지어 마약까지 같이 한 상태이니, 별로 기억나는 것도 없을 터였다.
그녀의 바지 뒷주머니, 녹음기의 존재가 없었다면.
“에휴, 됐다. 일단은 새로운 주인님들이 먼저지. 어어… 나온다.”
그리고 그때.
스르르 열리기 시작한, 공항 입국장 게이트 자동문.
도드라진 광대뼈, 가로로 째진 눈. 검은 양복을 입은 짧은 머리의 사내는 한서후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어서 오십시오, 옌룽 실장님! 모시러 왔습니다!”
“한화기 고문께서는?”
“자택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타시지요. 아, 저쪽 분들은…?”
옌룽 뒤편, 험악하게 생긴 중국인 수십여 명.
흉터와 문신으로 온몸을 장식한 그들을, 마치 집에서 기르는 사냥개를 대하듯 바라보며, 심드렁한 어투로 답하는 옌룽.
“한 고문께서 걱정이 많으시다지? 한국 조폭들을 끼어서 하는 일이니.”
“아아…!”
안전.
가석방된 조폭들의 위협에서 이제는 온전히 안전해진, 한화기·한서후 부자.
내심 이번 일이 잘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채로, 옌룽은 차에 올라타 명령했다.
“출발하지. 탄약그룹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준비를 하러.”
* * * *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내 앞에 차렷 자세로 선 김범호. 녹음된 파일을 듣기 시작한 나는, 이어폰을 귀에 깊게 꽂고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뒤처리할 규모가 커져 버렸기에.
“후우, 큰일 날 사람이네. 우리 서후 형님.”
내쉰 한숨에 이어, 들려오는 한서후의 맛이 간 목소리.
‘제임스 왕 이사가 당장은 돈이 달린다네! 그래서, 진짜 이대로 조폭 칼 맞고 아부지랑 같이 죽나 했는데!’
내가 저축은행을 폭파해 버린 후로 타격이 크긴 했던 모양이었다.
말라버린 자금줄. 심지어 <상하이 캐피탈>조차 재건된 지 얼마 되지 못해 현금이 부족한 상황.
그러나.
‘북한 돼지 놈들 비밀계좌, 끄윽! 그걸 좀 빌려 쓸 수 있다고 그러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
북한 김씨 일가의 마카오 비밀계좌. 그들은 뻗어서는 안 될 곳까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조선족이랑 조총련이랑 해서… 사모펀드로다가, 흐흐흐흐.’
지지지직, 배터리가 다 된 건지 버벅거리는 녹음 파일.
그래도…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와 적대하는 모든 이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내 목에 칼끝을 들이밀 것인지를.
녹음 파일을 모두 들은 나는 앞에 선 김범호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이거, 더 아는 사람은?”
“나랑 예린이 둘밖에 없어. 진짜야. 맹세한다니까!”
경망스러운 몸짓으로 결백을 주장하는 김범호.
나는 그에게 10억 원이 든 카드 한 장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건 추가 수고비,”
“땡큐!”
“예린이였나? 그 걸그룹 연습생은 핵무기 엔터 통해서 정식 데뷔 조건 거는 게 더 혹하겠네. 아무튼, 이번 일.”
카드를 받아든 김범호를 노려보며, 나는 입술 위에 검지손가락 하나를 추켜올렸다.
“틀어지면… 알지?”
“에이, 난 감옥 가긴 싫어. 나이지리아는 더 싫고. 오래오래 망나니 하다 가는 게 소원이여.”
그렇게 싱글벙글한 얼굴로 도망치듯 건물 바깥으로 나간 김범호.
이 모든 장면을 옆자리에서 바라보던 김원철 아저씨는,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고는 내게 말을 건넸다.
“김범호가 월척을 낚았네. 웬일이래?”
“그러게 말입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네요. 마약까지 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다시금 귀에 꽂은 이어폰.
맛이 간 한서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생각보다, 골치가 여간 아픈 게 아닌데.
“대충 키워드만 봐도 어떻게 할지 알겠네요. <상하이 캐피탈>의 부족한 자금, 북한 정권의 비밀계좌, 그리고 사모펀드라.”
“끄응, 골치 아프게 생겼어. 그나마 다행인 건, 바로는 못 할 거라는 거?”
“깨끗하게 세탁 좀 돌리는 데 몇 달은 들 테니까요. 자금 추적하면 대충 공격 타이밍도 알 거고.”
“그때까지가 데드라인이여. 그 전까지는 방어할 자금이 있어야 한다니까.”
한서후가 말한 키워드 중, 조선족과 조총련이라는 단어.
아마 그들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마카오에 있는 북한 김씨 일가 비자금을 세탁하겠지.
거기에 대통령과 연줄이 있는 나를 공격해야 하기에, 그 타이밍으로는 아마… 대선쯤일 터.
12월. 12월 전까지 약 5조 원의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5조 원, 북한… 북한?
“어어… 뭐여? 생각난 게 있는 겨?”
내 표정을 읽었는지, 왕방울만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원철 아저씨.
이게 가능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나, 혹시나 모른다.
이제 갓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얼치기 최고존엄 김정은에게는 이 수가 통할 수도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내가 입을 열었다.
“북한 하니까 떠오른 건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