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방코 델타 차이나 뱅크(1)
“북한 비밀계좌에 들어 있는 자금. 대충 한화로 1조 원쯤 되는 그 돈. 그냥 중간에서 먹어버리죠.”
뭔가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한 걸까?
툭, 먹던 초콜릿을 바닥에 떨어트리고도 좀처럼 주울 생각도 않는 김원철 아저씨.
“잠시만, 회장님아.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나 상황 정리 좀 해도 되는 겨?”
“편한 대로 하세요. 얼마든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선 채로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던 김원철 아저씨.
대충 내면의 혼돈을 정리한 건지, 아저씨는 최대한 차분해지려는 모습으로 보드 마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한화기는 <상하이 캐피탈> 도움을 받고. 얘들이 돈이 부족하니까, 북한 비밀계좌에 있는 자금을 끌어다 쓴다는 거고.”
“그렇죠.”
탁, 타닥.
거대한 화이트보드 위에 그려지는, 여러 개의 동그라미.
각기 북한, 숙부, <상하이 캐피탈>이라 적힌 동그라미들에서 뻗어 나온 선이 거미줄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들이 모인 한가운데에 그려진, 내 이름이 적힌 동그라미 하나.
붉은색 보드 마커로 동그라미 가장자리에 연신 별을 그려대며, 김원철 아저씨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그 카운터로다가 우리 회장님은… 북한 돈을 꿀꺽하시겠다?”
“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여 방구여. 걔들 돈을 어떻게 꿀꺽할 건디?”
사상 최악의 독재 국가 북한.
그리고, 마카오 등에 여기저기 뿌려놓은 그들의 비밀 은닉자금.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들의 자금을 중간에서 가로챌 일도. 아니, 아예 북한 자체와 엮이는 일조차 없는 것이 정상일 터.
하지만.
“뭐, 이제부터 색칠해야 하긴 하는데, 일단 그린 밑그림은 이런 겁니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김정일이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북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조카, 그리고 앞에 종이호랑이를 내세우고 상왕 노릇을 하고픈 여우.”
김정은과 장성택.
고모부와 조카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초창기.
그 혼란을 잘 이용한다면,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를 터.
김원철 아저씨의 손에 쥔 보드 마커를 건네받은 나는, 곧바로 화이트보드 위에 동그라미 두 개를 더 그렸다.
김정은과 장성택이라는, 빨간 동그라미를.
“다 필요 없고, 오로지 여우만 노리면 됩니다. 영원히 상왕으로 남고자 한다면, 큰돈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나는 그 두 개의 동그라미 중 맨 마지막에 그린 것 위에 큼지막한 별 하나를 그렸다.
조만간 다가올, 이 사람의 마지막 운명을 조금 앞당길 법한, 비극의 별을.
“지금 곳간 열쇠는 그 고모부라는 여우가 쥐고 있거든요. 적어도 나중에 고사포를 맞고 처형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 * * *
같은 시각.
북한, 평양의 모 비밀 관저.
“미화 10억 불, 10억 불이라….”
경계가 삼엄한 지상을 지나, 콘크리트 벙커로 된 지하실에서 고심하고 있는 장성택.
<상하이 캐피탈> 측으로부터 제의받은 내용에 마지막 그의 결재만을 앞둔 상황.
바둑판을 앞에 둔 이처럼, 그는 손에 쥔 돌 두어 개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장고에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네까, 1호 동지?”
그리고, 보다 못해 장성택에게 말을 건넨, 북한 고위직에 오른 그의 사촌 동생 장철규.
“고 떼놈들. 말이야 일단 그럴듯허긴 합네다만, 돈 세탁 도중 미제 놈들한테 걸리면 골 깨지게 아프지 않갔십네까?”
“쯧쯧, 이 사람. 아직도 돌아가는 모양새를 잘 모르는구먼 기래. 그냥 돈 세탁 문제가 아니지비.”
“예…?”
도청 방지 장치까지 갖추어진 지하 벙커 안이었지만, 행여나 있을 수도 있는 듣는 귀를 막기 위해 이중문을 굳게 걸어 잠근 장성택.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사촌 동생 장철규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상왕 노릇을 하는 나. 그리고 우리 장씨 가문에 속한 자네. 구름 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야. 그렇지 않간?”
“부정하지는 않갔시오. 그런데 그거이 지금 돈세탁 건허구 무슨 상관이 있습네까?”
“답답한 친구. 왜 상관이 없난? 구름 위를 걷는다는 건, 발이 푹 꺼지는 순간 그대로 땅바닥 흙탕물 우에로 떨어져 뒤진다는 것인데.”
이중 문 바깥을 지키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비병의 모습.
차렷 자세를 한 이 경비병을 수족처럼 부리는 장성택이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백두혈통. 그 타고난 핏줄의 소유자가 손가락 하나만 놀리는 순간, 자신은 이곳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신세로 바뀔 수 있음을.
그렇기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장철규에게 경고의 말을 토해내는 장성택.
“자네를 포함해서, 내 등에 타고 있는 모든 동지들 전부가.”
“…….”
틱, 틱.
지하 벙커를 순식간에 가득 메우는 매캐한 담배 연기. 깜빡거리는 전등불에 비친 독한 회색빛 연기 사이로, 장성택의 굳은 표정이 반짝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은이가 칼집에서 칼을 뽑기 전, 미리 비빌 언덕을 만들어 놓아야 하디. 그러려면.”
“그러려면…?”
“바깥에 묶어둔 장군님 비밀 자금. 그것부터 티 안 나게 스리슬쩍 호주머니에 넣는 기야.”
치이이익, 재떨이 위로 거칠게 꽁초를 비벼 끄는 장성택.
결심을 마친 그가 장철규에게 지시를 내렸다.
고사포라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시곗바늘을 더 빨리 돌리는 선택임을 알지도 못한 채로.
“방코 델타 차이나 뱅크. 거기 있는 충성자금, <상하이 캐피탈> 측으로 보낼 준비하라우.”
* * * *
같은 시각.
각각 가석방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조석구와 주괘율 두 사람.
“어따, 오래간만에 바깥 공기가 참으로다가 시원하구마잉.”
죄수복을 벗고 창살 바깥으로 나간 그들이 행한 곳은, 가족의 따뜻한 품이 아니었다.
오직 사냥터. 자신들이 찍은 먹잇감을 물어뜯기 좋은 사냥터를 향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콧구녕에 들락날락하는 꿉꿉한 냄새가, 꼭 도야지 창시 가르는 도살장 냄새랑 똑같어. 안 그라요, 주 회장?”
“어디 돼지만 잡겠나, 사람도 잡아도 될 냄새지.”
저축은행 건으로 실질적인 손실을 본 두 사람.
그들의 넘쳐흐르는 분노는, 반드시 어딘가를 향해 표출되어야만 했다.
물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적당한 선에서.
“하긴, 일 처리가 시원찮은 놈은 사람이 아니라 돼지 새끼나 다름없긴 할 터. 크게 구분 지을 필요조차 없겠습디다.”
“으허허허. 거럼, 거럼. 사람이나 도야지나 썰어놓으면 다 괴깃덩어리라니께.”
그리고, 그 분노가 표출될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자, 그라믄. 어디 우리 한화기 고문님이 사람 새낀지 도야지 새낀지 사이즈를 한번 봐야 쓰겄어.”
한화기. 조석구와 주괘율, 자신들을 이 판에 얽은 사람에게.
그러나, 광복절. 가석방이 되던 이날 오전까지, 한화기는 그런 분노 따위야 사소한 일이라는 양 심드렁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닥쳐라. 주제를 알아야지. 네깟 놈들이 기고만장할 상황이 아니다.’
‘뭐, 뭐여…!’
‘일그러진 일에는 대안이 있는 법. 모든 것은 바로잡아 두었으니, 출소하거든 오후께 내 자택으로 오도록.’
그렇게 지금, 한화기의 강남 자택을 향해 이동 중인 주괘율과 조석구 두 사람.
“주둥아리 하나는 국보급으로 놀리시던디… 제발이고 부탁인 것이 혓바닥 놀린 값을 해주셔야 쓰겄어.”
그들은 지금, 겉껍질로 써오던 사업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시뻘건 속내 그대로, 자신들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조직폭력배의 모습을 한 주괘율과 조석구.
손도끼 하나를 허리춤에서 뽑아 든 조석구가 웃으며 말했다.
“안 그라믄, 요놈이 자꾸 발가락을 토막 내고 싶어질 것이니께. 읏차.”
“저 보이는구먼. 주 회장, 임자 쪽 얼라들은 준비되었고?”
“말해 무엇합디까.”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 룸미러를 바라보는 주괘율.
뒤따라오는 승합차 안, 거기에는 험상궂은 근육질 사내 십여 명이 탑승해 있었다.
언제라도 한화기의 기를 꺾어버릴 수 있도록.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주도권을 잡으려면, 조금 거칠게 날뛸 필요도 있는 법이니 말이요.”
그렇게 보이는, 강남 한복판의 전원주택 밀집 지구.
차에서 내린 주괘율은 뒤따라온 승합차 문짝을 두들기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차! 빨리빨리 내려, 이 새끼들아! 들어가자마자 한화기 그 도련님 놈 기선부터 제압한다!”
* * * *
“허어….”
“우째서 이런 짱깨 놈들꺼정…!”
그리고, 그들의 어설픈 기선 제압은 수포로 돌아갔다.
“멍청한 놈들. 역시 밑바닥 천한 본성은 그대로인가 보군.”
회칼로 무장한 중국인 수십 명을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한화기.
“큰일을 하다 보면, 일이 틀어지는 것은 부지기수인 법. 고작 이 정도 인내심으로 나와 탄약그룹을 갈라 먹으려 했다니.”
현저히 달리는 쪽수.
거기에, 조석구가 보았을 때 저 옌룽이라는 남자는 보통이 아닌 듯해 보였다.
저깟 삼합회 조폭들 따위야, 죽어버린다면 다시 얼마든지 보충해 낼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불안한 상상 속,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그 긴장의 끈은 한화기 쪽에서 먼저 놓아버렸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지. 하지만.”
“……?”
“네놈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감정으로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법.”
툭, 바닥에 던져진 종이 뭉치 두 부.
“변경된 계약서다. 보다시피 저쪽, <상하이 캐피탈> 측 지분까지 들어간.”
데구르르 굴러가는 계약서.
당초 교도소에서 했던 약속과 전혀 다른 내용에, 그들 조석구와 주괘율은 항의를 시작했다.
“허어, 이건….”
“크흠, 한 고문! 이 조정액은 조금 과하지 않응교!”
그리고,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불만을 쳐내는 한화기.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놈들이 달리 방법이 있나?”
“후우… 딱 칼 뽑아 들기 직전꺼정 사람을 몰아붙이네, 우리 한 고문님.”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각보다 조폭들의 저항은 그리 거세지 않았다.
“<코코아> 소매금융 파트. 적어도 그것만은 내 입구녕에다가 쑤셔 넣어야 하요. 아시겄소?”
“그 정도쯤이야.”
핵심 이익만이라도 챙기려는 조석구의 제의와.
“좋소. 차라리 중국 쪽 자본이 들어가면 안정성이라도 더 생기겠지.”
일의 안정성이라는 새로운 측면에 집중하는 주괘율.
드디어, 모든 새로운 합의가 마무리된 상황. 서명된 서류를 바라보며 한화기가 입을 열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이 작전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타이밍 또한 맞춰야 하지.”
조선족과 조총련을 통한 자금 우회가 필요한 계획. 거기에 한국 정치판 또한 고려해야 하는 상황.
모든 것을 종합해 검토한 한화기가 차분한 어조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앞으로 넉 달 후, 12월. 대통령 선거로 수사기관과 금융기관의 손발이 묶인, 바로 그때.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다. 모든 것을 걸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