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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32화 (285/300)

232화 방코 델타 차이나 뱅크(3)

다시 찾은 국가정보원.

이름 없는 별이 박힌 석판 앞에서, 내 옆으로 다가온 국정원장이 내게 말을 건네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한서준 회장님.”

충성스럽고 우직하지만, 일정 규범 바깥의 일을 행하려면, 꼭 명분과 타당함이 필요한 이 중년의 사내.

거친 손바닥으로 석판에 음각된 별을 쓰다듬는 그를 보며, 내가 대답했다.

“예루살렘 선언 때 이후로 거의 반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회장님은 북한 관련 정보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는 국정원장.

“또다시 사익을 위해 공익이 이용되는 것 같군요.”

그는 내게 묻고 있었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의 제공.

석판에 별이 되어버린 이들의 핏값에 걸맞은, 다른 가치를 내가 한국에 줄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런 그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에 일절 망설임 없이 대답을 주는 나.

“꼭 무 자르듯 그렇게 판단하실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나는 몸을 틀어 국정원장을 향해 마주 보고는 하던 말을 연이어 나갔다.

“골 때리는 이슈들이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거든요. 어쩌다 보니, 탄약그룹 경영권 다툼이 그 중심에 서게 되었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카오에 있는 북한 통치자금 말입니다. 그게… 한국으로 흘러들어 와 기업사냥의 종잣돈 역할을 할 성싶습니다.”

국가안보라는 충분한 명분과 타당함.

물론 애당초 거절이라는 선택지 자체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오긴 했건만, 내가 말한 것은 의외로 국정원장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시종일관 유지되던 중후한 모습을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갑작스레 붉어진 얼굴로 포효하기 시작했으니까.

“이런, 찢어 죽일 북괴 놈들이!”

“저… 국정원장님?”

“요사이 공작원 파견 좀 안 했다고, 그새 또 개 같은 짓거리를 하려 들다니! 이 천하의 역겨운 놈들이!”

방방 날뛰는 국정원장.

국정원 내부 출신 인사라 그런지, 조직의 철학이 곧 개인의 철학과 일치된 모양이었다.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저놈들 헛짓거리만 못 하게 막을 수 있다면, 내 국가 기밀 정보도 다 드리겠습니다!”

“음… 기밀까지는 필요는 없고요. 두 가지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굳이 국가 기밀씩이나 알 필요는 없겠지.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이번 일을 해결할 핵심 키워드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해외에 있는 북한 비밀계좌의 실시간 자금 흐름. 그리고.”

방코 델타 차이나 뱅크로 대표되는 북한의 해외 은닉자금.

그리고… 이 은닉자금을 불리고 깨끗하게 세탁하는 그 방법은 바로.

“일본, 일본 쪽 마약 유통 현황.”

“일본이요? 북괴 놈들 정보가 필요하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일본. 마약 유통.

물론 단순히 회귀 전 기억만 가지고 추론해낸 것은 아니다.

“이건 일종의 예지 같은 것입니다만.”

우연이 여러 번 겹쳐 만들어진 필연.

지금도 여의도 K 호텔 꼭대기 층에서 해롱거리고 있을 김범호를 생각하며, 나는 국정원장에게 두 번째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놈들 어쩌면, 일본에서 마약 장사로 신나게 돈세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거든요.”

* * * *

며칠 전, 여의도 K 호텔.

한동안 한서후에 대한 정보 보고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제아무리 한서후가 여기저기 쏘다니며 괴팍한 성질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회포를 풀 만한 곳은 이곳 김범호가 있는 방 말고는 딱히 없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유세나 보좌관과 함께 그 방에 도착한 나는, 정말이지 못 볼 꼴을 보고야 말게 되었다.

‘오우야, 나 죽어….’

‘오빠, 나도 같이 죽어….’

며칠이나 씻지도 먹지도 않았던 걸까?

움푹 팬 양 볼, 눈 밑을 검게 물들인 다크서클.

금단증상으로 떨리는 손은 그 순간에도 약봉지 끄트머리를 잡고서, 어서 다음 쾌락을 내달라며 생떼를 부리고 있었다.

‘미쳤네.’

‘윽, 역겨워요.’

그리고, 반쯤 나체로 그 광란의 현장에 널브러진 김범호와 여자 연예인 한 사람을 바라보며,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유세나 보좌관.

나는 코를 틀어막으며 그녀의 감정표현에 동의했다.

‘마약 냄새가 좀 역겹긴 합니다.’

‘아뇨, 그거 말고. 김범호라는 인간 자체가 더 역겹습니다, 회장님.’

뭔가 좀 핀트가 다르긴 했지만… 어쨌거나 매우 역겨운 현 상황.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김범호를 일으켜 앉히고는, 양 뺨을 가볍게 때리며 말을 걸었다.

‘한서후 감시나 계속하고 있으라니까, 아예 약쟁이가 다 되었구만. 김범호, 일어나! 눈 떠!’

‘어어, 한서준… 같이 할래?’

입가에 흐르는 침.

만취한 사람처럼 좀처럼 가누지 못하는 몸뚱아리.

그 며칠 사이, 생각보다 김범호의 마약 중독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 다른 약에 손을 대었겠지.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이러면 나가린데… 일단 해독제부터 좀 먹여 보죠.’

혹시 몰라 동행시킨 탄약 의료원 주치의.

약 몇 개를 조합해 강제로 입에 쑤셔 넣고 기다리길 30여 분.

마침내 눈이 조금 돌아온 김범호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어우, 죽겠네. 머리통 아파. 어? 한서준 회장님 왔어?’

‘정신 차려라, 좀.’

떡이 진 머리를 긁적이는 김범호.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는 벽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한서후 관련 보고. 한동안 왜 안 들어오나 했더니, 이래서였던 거냐?’

‘아니, 그… 이게 약도 약인데, 한서후가 요새 막 쏘다닌단 말이야. 얼마 전에 중국 갔다가, 또 뭐라더라? 일본 들러서 귀국한다던데.’

‘일본?’

이젠 아예 들었던 정보조차 까먹었다 기억했다를 반복하는 김범호.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그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가자고 했더니, 아! 생각났다. 일 때문에 가는 거라고 했다.’

‘하아… 그걸 왜 보고를 안 한 건데. 아니지, 그래서 그다음에 뭐라 했는데?’

‘꺼지라고 하더라고. 나 같은 뽕쟁이 끼고 놀러 가는 거 아니라고.’

김범호를 끼지 않았다면… 분명 일 때문에 간 것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서후의 움직임이 전혀 예측되지 못했던 상황.

그러나.

‘애초에 내가 자기한테 준 뽕이 일본에서 산 건데, 그것도 모르고.’

‘마약을 일본에서 샀다고…?’

‘아, 모르는구나? 정확히는.’

여기, 내 앞에서 헤실거리는 마약 중독자 김범호.

그의 입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온 한마디 말은… 그동안 빠져 있던 사건의 연결고리를 단단히 동여매는 역할을 해 주었다.

‘메이드 인 노스 코리아. 북한산이여. 품질이 기가 맥힌다니까?’

‘북한산 마약의… 일본 유통?’

‘내가 그거 직구해 오느라 관세청 말단 애들한테 얼마나 손바닥을 비볐는데. 뽀찌도 꽤 찔러줬어. 진짜 나는 21세기 문익점이여.’

밀수 썰을 자랑하듯 푸는 김범호는 잠시 무시하고, 나는 멱살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세게 주며 말했다.

‘마약, 있는 거 다 내놔봐. 어디다 놨어?’

‘저기 두 번째 선반… 으흐흐흐, 역시 우리 한서준 회장님도 스트레스가 많기는 한가 봐? 웬일로 마약도 다 찾고.’

선반을 헤집다 보니 금세 나오는, 비닐봉지 하나를 가득 채운 분량의 마약.

일부 샘플로 쓸 것을 몇 개 제외하고, 나는 나머지 마약 전체를 봉지째로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우리 한서준 회장이랑 예쁜 청소 누나랑 나까지. 이렇게 셋이서 같이 사이좋게 나눠 써도 한 달은 너끈할 양이라… 어어!’

그리고, 곧바로 그 쓰레기통에서 올라오는, 푸른색 불꽃.

순식간에 재로 변하는 마약. 쓰레기통 앞으로 달려간 김범호가 울부짖으며 내게 물었다.

‘내 애기들! 뭐야! 왜 그러는 건데!’

‘김범호. 내가 지금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약 끊어. 단순히 네가 중독되는 게 걱정되어서가 아니야.’

‘그게 뭔 개똥 같은 헛소리를…!’

반항하는 김범호의 손에 들어있던, 개미 눈물만 한 힘.

그 미약하게나마 있던 힘조차, 뒤이은 내 말을 듣자 끓는 물 속의 녹는 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탄약그룹 관련한 이번 일 전체. 그 핵심에 휘말리면, 네 인생 그냥 뽕쟁이로는 안 끝나. 최소한.’

마약 중독자마저도 감당하기 힘든 중압감. 그 숨이 턱턱 막히는 중압감이 뒤이은 말 한마디에 분명히 담겨 있었으니까.

‘국제 돈세탁과 마약 조직, 국가보안법까지. 검찰 공안부와 특수부까지 덕지덕지 붙어서 연루자들 인생 전체를 파멸시켜 버릴 테니까.’

입을 벌린 채,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린 김범호를 남겨두고 떠난 나.

매캐한 연기와 함께 마약 타는 냄새를 맡으며, 나는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했던 말을 덧붙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숙부를 포함해서, 전부.’

* * * *

“빨리하라! 빨리 좀 하라!”

동해, 북한과 일본 사이의 공해상.

“금방 끝나니 재촉 좀 그만하시오, 박 동무.”

“뭘 금방 끝내니? 저번도 환적하다가 왜놈 순시선에 걸릴 뻔했는데.”

낡은 목제 어선을 가장한, 마약 운반선.

일본 요트에 딱 붙어 마약이 든 짐을 옮길 것을 지시하는 두 명의 북한 관리자.

얼추 일이 마무리되자, 하급자는 장갑에 묻은 먼지를 털며 상급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후우, 고생 많으셨습네다. 박 동무.”

“일 없다. 그나저나, 대금 결제 방식이 좀 바뀌었다지?”

“1호 동지께서 조총련 쪽 아들 통해 돌리라 하지 않으셨습네까? 그 사모펀드인가 하는 걸로.”

“그래, 그랬었지.”

장성택을 지칭하는 1호 동지라는 표현.

북한 관리자 두 사람은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1호 동지의 그늘에서 계속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이번 일을 순조롭게 진행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그 감정에 화답하듯, 일본 요트에서 북한 어선으로 올라타 악수를 청하는 야쿠자로 보이는 사내.

“확인 끝났습니다. 수량 이상 없습니다. 품질이야 늘 그렇듯 최상일 테고요.”

“우리 북조선에서는, 적어도 그 약만큼은 허접쓰레기같이 아니 만든다. 외화벌이로 최고인데.”

“하긴, 요새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니까요. 물량을 더 늘리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북한 상급자.

그는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펼쳐 보이며 호기롭게 답했다.

“최소 다섯 배. 공장 사정 봐가 열 배까지도 가능하디.”

“역시 장성택 부부장인가… 뭐,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부르릉! 선박 엔진음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양측.

그렇게 서로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지자, 일본 요트에 탄 야쿠자 사내는 갑자기 가발을 벗어 던지더니, 가슴팍에서 위성 전화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국화 1호입니다. 북한 외화벌이 부서 측과 접선 마무리했습니다.”

야쿠자로 위장한 국가정보원 블랙 요원.

요트 안쪽, 가득 쌓인 마약 상자를 바라보며, 그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한서준 회장의 예측이 맞았습니다. 이놈들… 일본에 대규모 마약 공급으로 벌어들인 조 단위 자금을 사모펀드로 세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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