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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34화 (287/300)

234화 장성택을 만나보자(2)

도쿄, 일본 총리 관저.

검은색 자갈돌이 깔린 중정(中庭)길을 걸어, 미닫이문 앞에 선 자민당 간사장.

문가에 비친 그림자를 본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총리대신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린 문.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선 채로 가만히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총리대신.

“각하…?”

“역시 묵란(墨蘭)은 흥선대원군 것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실질적 상왕 노릇을 했던, 흥선대원군이 그린 난초 그림.

검은색 묵으로 그린 난초는, 섬세함보다는 야생적인 면모를 돋보이며, 그 존재를 스스로 뽐내고 있었다.

“거침없이 길게 뻗은 잎, 굵고 탄탄한 심지, 거칠게 휘갈겨 쓴 글씨에 무심하게 찍은 낙관(落款)까지.”

말허리를 중간에 끊고, 자민당 간사장을 향해 뒤돌아선 총리대신.

방 한쪽에 놓인 화로. 그는 한지 몇 장을 집어 들고는 화롯불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무릇 상왕 노릇을 하려는 자라면 이래야지요. 조금이라도 먹이 종이 위에 번지게 된다면.”

그을음을 내며 불타는 한지.

순식간에 타오른 불꽃은 곧바로 종잇조각을 걸신들린 듯 먹어 치웠다.

마치 권력을 탐하다 스러져 간, 역사 속 수많은 실세들의 모습처럼.

“이렇게 흔적도 없이 타 버릴 운명이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북조선의 장성택… 말씀이신지요?”

쇠막대로 화롯불을 휘적거리는 총리대신.

회색빛 잿더미 속, 아직 살아있는 붉은 불씨를 모두 꺼트리고 나서야, 그는 자민당 간사장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

“분명 마약 유통 속도가 빨라졌고, 조총련의 움직임이 수상한 것은 인지했지만, 거기에 평양의 중앙정치가 연관되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다다미 바닥 위 놓인 보고서 하나를 집어 든 총리대신.

그 보고서의 제목은 일본어로 되어 있지도, 일본 정부의 표준 서식으로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걸 알려준 것은 내각조사실 보고서가 아닌, 탄약그룹의 한서준 회장이었고.”

붉은색 불꽃 모양이 수놓인, 탄약그룹 정보실 로고.

그 불꽃 모양을 홀린 듯 가만히 지켜보며, 일본의 총리대신은 며칠 전 걸려 온 전화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일본 내에 유통되는 마약. 최소 다섯 배 이상은 늘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한 회장?’

분명, 히나 공주 이야기로 시작했던 소소한 대화. 그러나, 분명 가벼웠던 대화는 어느샌가 어둡고 묵직한 주제로 금세 흘러갔다.

탄약그룹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 조직폭력배의 검은돈과 JL 저축은행 사건. 그리고… <상하이 캐피탈>과 북한의 해외 비밀계좌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자락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일본의 뒷골목이었다. 북한산 마약이 대규모로 판치는, 평소보다 유달리 어두운 뒷골목.

‘서울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니, 상하이와 평양을 거쳐 도쿄에 태풍이 불게 되었다라.’

-도쿄에 마약 태풍이 불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해결책 아니겠습니까?

말투가 바뀐 것을 순식간에 알아챘는지 눈썹 한쪽을 씰룩거리는 총리대신.

‘꼭 해결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굳이 일본 수사기관의 행정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행여나 자민당 의원 중 하나가 일본 내의 마약 유통 조직을 맡는 야쿠자에게 상납을 받았다면 곤란할 테니까요.

이미 자민당 내부 속사정까지 알고서 신경 쓰는 모습에 총리대신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 웃음만큼 올라가는 기대감.

-깔끔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외과수술을 하듯이 아주 정교하게, 표적만 정확히 제거하는 식의.

그 기대감에 부응하듯 내놓은 해결책.

그때 그 전화 통화 말미에 툭 던지듯 언급했던 그 해결책을 회상한 총리대신. 화롯불을 뒤적거리던 그는 아직 다 타지 않고 남은 자그마한 종잇조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북조선의 상왕은 잿더미로 사라질 운명인 듯싶군.”

“총리대신 각하…?”

툭, 그러고는 자민당 간사장에게 무심하게 던져 준 보고서 뭉치.

첫 페이지부터 예사롭지 않은 그 보고서에는 익숙한 한 사람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신분이 된.

“2주 뒤, 남·북·일 공동 경제협력단에 사람 하나가 더 들어갈 겁니다. 최중요 인물이니 각별하게 신경 쓰시도록 하십시오.”

“기무라 와치루? 아니, 이자는 설마…!”

그 놀란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본 총리대신.

벽에 걸린 묵란(墨蘭) 그림을 바라보며, 총리대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서준, 이 남자가 앞으로 어떻게 일을 풀어나갈 것인지, 가만히 지켜보고 싶으니까.”

* * * *

같은 시각. 한화기의 자택.

“예! 예,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한서후.

“무슨 일이냐?”

그 가벼운 모습이 영 못마땅한지 틱틱거리며 묻는 한화기.

그러나, 한서후는 그런 아비의 눈치 따위 일절 보지 않은 채로, 호들갑스럽게 대답했다.

“아버지! 지금 막 북한 쪽 자금이 <상하이 캐피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뭐라…!”

“심지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들어왔습니다. 10억 달러, 한화로 무려 1조 2천억 원입니다!”

못마땅하던 감정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한화기.

꽉 쥔 주먹. 그는 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입술을 떼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군.”

하늘이 돕는 일.

그도 그럴 것이, 한화기는 불안했다.

옌룽이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 계속 걸려 오던 조석구와 주괘율의 협박 전화 때문에.

‘그란디 말이여라. 만약 이번에 그 짱깨 놈들이 돈뭉치 들고 안 왔으면, 우리 한 고문님은 우짜실라고 그랬을까잉?’

은연중 <상하이 캐피탈>의 자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겠냐는 조석구의 가정법과.

‘허허허, 다시 잘해 봅시다. 나도 사람 죽이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대놓고 서슬 퍼런 말을 꺼내는 주괘율의 너털웃음까지.

“그 빌어먹을 조폭 놈들, 드디어 아가리를 닥치게 할 수 있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지. 중국 가서 죽어라 빌다 온 보람이 있지 말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이 지옥에서 꺼내준 둘째 아들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는 한화기.

“잘했다. 어설픈 네 형과는 궤를 달리하는구나.”

“아버지….”

“4년 반 전, 내 너를 나이지리아로 유배 보낸 것은, 다 이렇게 성숙해지라 보낸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한화기의 말을 들으며, 기가 막혀 하는 한서후.

‘지랄도 풍년이네. 꼰대 영감이 입 터는 재주 하나는 전국구 급이여.’

그러나, 굳이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는 법이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견뎌냈지요.”

“그래, 장하구나. 아아, 위스키나 한잔해야겠군. 앉거라.”

“예…?”

적당한 말로 대충 넘기려 했던 한서후였으나, 갑자기 찾아오는 불편한 술자리.

‘옘병. 꼰대하고 같이 마시면, 속이 뒤틀린단 말이지.’

그렇기에, 한서후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진중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안 됩니다, 아버지. 일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절대 느슨해지지도, 풀어지지도 말기로.”

“허어….”

“그러니, 저는 계속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맨정신으로요.”

물론 속마음은.

‘술 마실 거면 김범호한테 가야지. 간만에 계집년 하나 끼고… 약도 같이 곁들이면 좋고.’

이런 식이었지만.

“그래, 네 마음 편한 대로 하거라.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니, 내 마음이 놓이는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렇게 한화기로부터 탈출한 한서후.

잔뜩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차에 탄 그는, 본가를 빠져나가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어휴, 옘병. 아주 그냥 서호 형은 아버지를 어떻게 길들여 놓은 거여. 꼰대 티가 풀풀 나는 게 아주 같이 못 살겄어.”

한화기가 포문을 열어서였을까?

마침 술이 동하기 시작하는 한서후.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는 익숙한 번호를 찾았다.

“가만있자. 김범호, 김범호… 전화 걸면 받겠지?”

자신을 천국의 쾌락으로 이끌어 준, 그 망나니의 번호를.

-어우, 죽겄다. 서후, 왜?

“얌마, 넌 오후 다섯 시에 자빠져 자고 있었냐?”

-아, 재벌가 망나니가 오후 다섯 시에 자든, 여섯 시에 자든 뭔 상관이여. 감옥만 안 가면 그 자체로 효자인 거지.

“마인드 훌륭한 것 봐라. 됐고, 일어났으면 또 놀아야지?”

-어어…? 지금?

“왜, 안 되나?”

잠시 틈을 파고든 침묵.

그러나, 욕망에 불이 댕겨진 한서후는 그 침묵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침묵이, 조만간 찾아올 자신의 미래를 예고하는 프리퀄이나 다름없다는 사실까지도.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얼렁 와라, 여기 이미 여자애들 다 있으니까. 마약도 같이 있고. 흐흐흐.

* * * *

자유로를 달리는 차 안.

“회장님…?”

내 옆자리에 앉은 유세나 보좌관.

몇 차례 표지판을 힐끔거리던 그녀는 짐짓 불안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해외 출장 준비하라고 하시더니, 왜 인천이 아니라 파주로 가시는 걸까요…?”

“아아, 이게 기밀 사항이라 차마 말을 못 했는데요. 읏차.”

뭐든지 깜짝 파티가 더 신나는 법. 나는 가방에서 변장 도구를 꺼내어 얼굴에 착용하며 대답했다.

“같이 뭘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저번 광저우 카지노에서 가면 놀이를 했던 것처럼.”

“콧수염…? 가발은 또 왜…?”

“이것부터 좀 보시죠.”

툭, 무심하게 내민 여권.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동공에 지진이 잔뜩 일기 시작한 유세나 보좌관.

“제가 당분간 가짜 신분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거기 보이시죠? 기무라 와치루. 재일 교포 출신 사모펀드 대표입니다. 그리고 유세나 보좌관 전용 여권도 있고요.”

유세나 보좌관의 가짜 신분이 적힌 여권을 친절하게 건네는 나.

대충 사쿠라코 어쩌고 하는 일본 여자 이름과 함께 적힌 신상 명세.

불안해하는 그녀. 슬슬 말해줄 때도 되기는 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 출장의 진짜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이 차는 북한, 북한으로 갑니다.”

“네? 아니,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김원철 비서실장님은 때려죽여도 빨간 동네는 못 간다네요. 군 시절에 북파공작원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했다나?”

그렇게 정해진, 김원철 아저씨의 대타 유세나 보좌관.

어안이 벙벙한 그녀가 내게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도대체 북한은 왜 가시는 거예요….”

어느샌가 문산 임진강 유역으로 다가선 차량. 개성 시내가 훤히 보이는 평화의 다리 위에 선 채, 입출경 절차를 끝마치고 나서야, 나는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만나게 될, 북한의 거물급 인물. 2인자 장성택에 대해서.

“장성택. 이제 우리는 장성택을 등쳐먹으러 갑니다.”

“네?”

“사기 한번 거하게 쳐 보자고요. 북한을 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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