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장성택을 만나보자(4)
“어서 오시라요, 기무라 대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 부장님.”
직접 만난 장성택의 첫인상은 근엄하기만 해 보이는 사진과는 조금 달랐다.
권위에 절어 있다기보다는, 그 감당하기 힘든 권위에 숨이 막힐 듯 짓눌린 듯한 사내.
퀭한 눈과 푹 팬 양 볼, 검게 변한 안색. 모든 신호가 가리키는 것은 명백했다.
장성택, 이 사람을 속이는 것.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말을 잘하시는구먼, 기래.”
“아무리 일본 국적을 얻었다 한들, 제 뿌리는 결국 조선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기에, 진부하기만 한 겉치레를 빼고, 곧바로 시작된 신경전.
“이렇게나 기회가 찰랑거리는 뿌리라면, 얼마든지 조국의 품에 달려가 안길 준비가 되어 있고요.”
두 손가락으로 가짜 콧수염을 매만지며, 나는 탐욕스러운 일본계 금융 꾼의 모습을 연출해 냈다.
옆자리에 앉은, 고혹스러운 자태를 풍기는 유세나 보좌관. 아니, 사쿠라코 팀장을 이용해서까지.
“안 그렇습니까? 사쿠라코 상.”
“그렇습니다, 대표님.”
내가 봐도 참 아름다운 모습의 유세나 보좌관.
붉은색 유카타를 입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비쳤다. 보는 이가 누구든 간에, 사내라면 마음이 동할 정도로.
“여기 아리따우신 분은…?”
“아아, 제 비서입니다. 참 단아하고 아름다운 것이, 일본의 미(美)를 대표하는 여자이지요.”
꿀꺽, 목구멍 너머로 침방울이 넘어가는 장성택.
사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유세나 보좌관을 이 북한 김씨 일가네 행랑아범에게 가져다 바치는 미친 짓을 할 생각 따위는 일절 없다.
그저, 가만히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장성택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더 분산시키기 위할 뿐이다.
이제부터 내가 펼칠 거미줄을 뜬눈으로도 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말입니다만, 장 부장님?”
“아아, 잠시 다른 생각을… 크흠, 말해보시라우.”
“마약 유통과 돈세탁.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오셨다지요?”
“뭐, 그랬지비. 우리 공화국이 그 정도쯤은….”
“그 안전했던 이유가 바로 저희 쪽에서 먼저 손을 썼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실 테고요.”
장성택의 구차한 말허리를 단칼에 끊어버린 나.
길게 늘어뜨린 장발을 한 손으로 넘기며,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마지못해 모든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기무라 대표가 일본 총리대신과 연이 있다고는 들었소만….”
“잘 아시니, 이야기가 수월할 듯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째깍, 째깍. 일부러 잠시 만들어낸 침묵.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든 벽시계 초침 소리.
장성택의 떨리는 시선을 그대로 응시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자금. 저희 쪽에서 세탁 및 관리를 맡고 싶습니다. 방코 델타 차이나 뱅크 계좌에 있는 전액 모두.”
“바로 결정하긴 힘든 상황이라….”
“반대로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 아니십니까? 당장 내일 숙청의 칼날이 목에 들어오셔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
모든 정보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거침없는 확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정신적인 충격이 왔음을 이제는 더는 감추지 못하는 장성택.
나는 평소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그대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상황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간은 그쯤 보셨으면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오게 된, 백기 투항 선언.
“…원하는 게 뭔가?”
“보관 및 운용 수수료 명목으로 10%. 저희 쪽 명의를 대여하는 리스크도 있으니, 합당한 선이라 봅니다.”
“명의대여라… 하기야, 금융 제재 때문도 있갔지비.”
내가 깔기 시작한, 첫 번째 거미줄, 명의대여.
그 거미줄 바로 앞에서, 떨리는 몸으로 날갯짓하는 장성택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급하기는 한데… 내래 요 간나새끼를 믿고 뭉칫돈을 다 쏠 수 있을까?’
믿지 못할 상대. 그러나 필요하기는 한 상대.
깊어지는 고민.
그러나, 이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장고 끝에 내린 수는 악수(惡手)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어설픈 합리화 과정을 거쳐 가며.
‘기래도… 이 왜놈도 마약허구 얽혀 있으니, 분명 일을 수면 위로 올릴 깡은 없을 터이고.’
한번 시작한 합리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고심하는 표정만 보더라도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차라리, 내가 장악한 북조선에서 계속 수수료 받는 거간꾼 노릇을 하는 거이 이놈한테도 이득이지 않갔디?’
전등갓 아래,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 찬 탁자 위.
마침내 장고를 끝낸 장성택이 결단을 내렸다.
“허면, 돌려 말하지 않갔소. 연말, 아니, 가을 지나기 전까지는 빤질빤질하게 세탁해서 우리 쪽에 싹 다 넘겨야 하지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리고. 현재 계좌에 남은 자금이 50억 달러쯤 된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게 10억 달러는 지금 외부로 돌리느라 빠져 있지비.”
“빠져요? 10억 달러나?”
짐짓 모르는 척, 장성택을 떠보는 나.
미화 10억 달러, 한화로는 1조 원이 넘는 거액의 자금. 그 뭉칫돈이 움직일 만한 건수는 너무나도 뻔했다.
‘<상하이 캐피탈> 측에 벌써 돈을 보냈나 보군.’
그리고, 내 예측이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사실을 털어놓는 장성택.
“상하이 떼놈들에게 잠깐 붙여준 거이 있소. 고조 신경 쓰지 마시라.”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제 쪽이 아니라, 장 부장님 쪽이요.”
“무슨…?”
“만약 돈세탁 기간 도중, 혹여나 미국이 꼬리를 밟는다면.”
잠시 말끝을 흐리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장성택을 바라보는 나.
지금, 두 번째 거미줄이 장성택의 몸뚱아리 바로 뒤편에 쳐지기 시작했다.
“상하이로 보낸 그 10억 달러가 발목을 잡을 심산이 큽니다. 아마 백 퍼센트 그리될 것이고요.”
“그런…!”
한 번이라도 엮이게 되면,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양분을 빨리게 될 거미줄이.
“계약 당시 정한 환매 수수료가 25%인데… 어찌, 방법이 없갔소?”
“그깟 환매 수수료 따위 신경 쓰지 마시고. 최대한 빨리 돌려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 일 못 맡습니다.”
툭, 호숫가에 낚싯대를 쭉 던지듯이 무심한 얼굴로 최후통첩을 날리는 나.
이럴 때는… 고민할 시간 자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급한 티를 내지 않으며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어야 한다.
“사쿠라코 상. 일어납시다.”
“예, 대표님.”
뚜벅뚜벅, 조금씩 문가에 가까워지는 발걸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철제 문 앞에 선 채, 둥근 문고리를 오른편으로 돌리려는 바로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아아!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라우!”
고기가… 낚싯바늘을 입에 물었다. 자기가 두 개의 거미줄에 칭칭 감긴 줄도 모른 채로.
급히 유선전화기를 꺼내 들고 어디론가 통화하는 장성택.
“장철민이, 자네. 지금 바로 <상하이 캐피탈>에 연락하라! 뭐? 이유?”
아마 실무자 측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겠지.
하지만.
“임시 예탁 계좌에 박아둔 돈. 바로 다시 찾아간다고 하라! 환매 수수료 따위 좀 주더라도 상관없으니!”
이미 눈이 뒤집힌 사람에게 그런 고까운 말 따위가 들릴 리가 없는 법.
전등 불빛 아래,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장성택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는 홀로 생각했다.
‘북한 쪽 일은 해결했고. 그럼, 이제 남은 건. 중국 쪽 일이겠네.’
턱짓으로 유세나 보좌관에게 눈길을 보낸 나.
곧바로 수첩에 적힌 내용을 보여주는 유세나 보좌관.
거기에는 날짜 하나가 적혀 있었다. 한서후가 중국에 가기로 했던, 며칠 후의 날짜가.
‘이쪽도 기대가 되는군.’
* * * *
인천공항.
-머저리 같은 놈! <상하이 캐피탈>과 북한,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을 뭘 믿고 그리 기세등등했더냐!
캐리어를 끌고 출국 심사를 보고 있는 한서후.
그는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제 아버지, 한화기의 역정 소리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옘병… 돈 끌어왔을 때는 좋아서 탭댄스도 출 기세더만.”
단번에 증발한 미화 10억 달러.
이대로라면 탄약그룹 경영권 쟁탈은커녕, 조석구나 주괘율 같은 조폭들에게 또다시 목줄이 잡힐 수도 있는 상황.
때문에, 한화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아들 한서후를 미친 듯이 닦달하는 것뿐이었다.
-당장 가서 해결하고 와라! 그 조폭 놈들이 알아채기 전에, 바로!
그렇게 정해진, 중국 출장.
비행기 좌석에 몸을 묻으며, 한서후가 짜증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아오, 환장하겠네. 아, 상하이 가봤자 나오는 건 뻔하겠지!”
이미 전화도 받지 않는 옌룽과 제임스 왕 이사.
설령 운이 좋아 이번 출장에서 그들을 만나더라도 들을 수 있는 말들은 뻔했다.
“돈 없다. 나도 죽겄다. 그러니 니들도 좀 닥치고 기다려 봐라. 아주 개떡 같은 짱깨 새끼들… 으아아아!”
결국, 터져버린 고함.
승무원 한 사람이 급히 달려오고서야 한서후의 발광이 조금 잦아들었다.
“손님? 불편하신 점이 있으신지요?”
“네년 면상이 불편해! 무슨 비즈니스석에 메줏덩이가 말을 걸고 지랄인데!”
“…죄송합니다, 고객님. 일단 곧 착륙이 있을 예정이니 조금만 화를 누그러뜨려 주시겠습니까?”
실컷 화를 냈더니, 제법 빠르게 지나간 시간.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양쯔강 모습을 눈에 담으며, 한서후는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옘병… 이럴 땐 김범호 그 병신 같은 놈하고 같이 약이나 빨면 딱인데.”
덜컹, 한서후의 아쉬움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착륙하는 비행기.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한서후. 그러나, 비행기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건장한 남성 여러 명이 그 비행기 안을 향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철제 수갑을 들고서, 마치 범죄자를 대하는 것처럼 한서후를 노려보며.
“Hey, you. Stop.”
“뭐여, 이 짱깨 놈들은? 어이, 되도 않는 혓바닥 굴리지 말고, 그냥 조선말 써, 아니면 느그 말 쓰던지.”
엄습해 오기 시작하는 불안감.
<상하이 캐피탈> 쪽에서 괜한 억지를 부린다 생각했기에, 오히려 공안에게 강하게 나서는 한서후.
“한서후 씨? 공안입니다.”
“뭐, 뭐요? 무슨 일인데?”
그러나, 그것이 <상하이 캐피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은, 공안이 꺼내 든 비닐봉지 하나가 입증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몇 번 보았기에 익숙해진, 김범호가 친히 선물한 무언가가 담긴 비닐봉지가.
“잠깐만… 저게 어째서 내 짐 속에?”
“마약 소지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