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다가오는 전쟁(1)
강남, 한화기의 자택.
“개판이로군. 휴전선 남쪽이나 북쪽이나.”
-와락
거칠게 신문을 구기는 한화기.
주름진 회색 신문지 앞쪽에는 잔뜩 성이 난 채, 노동당 간부들에게 호통을 치는 김정은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격노에 찬, 구겨진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제임스 왕 이사.
“그나마 다행 아니겠습니까? 저 사달이 나기 전에 김정은에게 10억 달러를 당겨 올 수 있어서.”
“그야 그렇지.”
지금 이 순간에도, 제임스 왕 이사의 전화통은 울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장성택.
그리고, 공중분해된 미화 50억 달러의 비밀 계좌. 아니, 이제는 비밀이었던 계좌.
돈줄이 꽉 조여진 김정은은 제임스 왕 이사에게 다시 10억 달러를 보내라며 성을 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벌써 자금은, 중국의 상하이 소재 모 은행을 거쳐, 한국으로 옮겨져 있었으니까.
“제깟 돼지 놈이 역정을 낸들 뭐 어쩌겠나? 이미 자금은 받아먹은 것을.”
코웃음 치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한화기. 이제 곧, 그 막대한 자금은 JL 저축은행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다가오는 최종 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한화기의 자신만만한 말을 듣고는, 조금은 염려되는 목소리로 묻는 제임스 왕 이사.
“조석구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주괘율이야 그렇다 치고, 그 큰돈을 JL 저축은행에 다 집어넣어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 그 작자도 다른 마음을 먹을 수는 없을 터다. 어차피 이 자금의 출처를 따지고 들어가면, 대북 제재 위반이니까.”
대북 제재 위반.
그냥 단순히 장성택이 관리하던 해외 자금을 받아 온 정도가 아닌, 아예 북한 은행에서 직접 김정은의 통치 자금을 받아 쓴 그들.
그렇기에, 자금 출처가 탄로가 난다면, 국내 형사 처벌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연루된 모든 기관이 국제적으로 전부 도륙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은 한화기가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JL 저축은행을 통째로 말아먹기 싫다면, 조석구 그 조폭 놈이 제 발등 위에 도끼를 내려찍을 이유는 없지.”
“하긴, 그렇긴 합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방문했음을 알리는 가정부의 목소리.
“고문님, 손님 오셨습니다.”
“이거, 그 작자들도 양반은 못 되는군.”
이번 계획에 자금줄을 댄 또 다른 한 축, 조석구와 주괘율.
조직폭력배 두 사람이었다.
“어따, 여 한 고문이 웬일로 집에 다 부르나 했더니만, 상하이 큰손께서 여 와계셨구마잉.”
견제와 의심. 상호 불신으로 가득 찬 인사를 건네는 조석구.
“허어, 제임스 왕 이사께서 이리 오셨다는 것은, 자금줄이 안전하게 확보되었다는 뜻일 터.”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맞은편을 바라보는 주괘율.
그들 두 사람이 가소롭다는 듯, 차갑게 웃음 지은 한화기는 통장 하나를 탁자 위에 건네며 말했다.
“자금 확보 증거다. 더 이상의 떠보는 짓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군.”
“좋소. 허면,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면 되겠구려.”
그제야 의심을 거둔 주괘율.
그는 아예 단단히 작정한 모양인지, 큼지막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품 안에서 칼 한 자루를 높이 추켜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리는 선홍색 핏방울.
-쿵!
핏물이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시자마자, 도장을 찍듯 흰 도화지 위에 내리찍은 그의 시뻘건 손바닥.
분에 찬 듯 이를 으득거리며, 손바닥을 뗀 주괘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일군 조직, 일정파. 그리고 태국 도박 사이트에서 쌓아 올린 독보적 지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한 악연의 목록.
“한서준, 그 찢어 죽일 놈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남은 모든 것을 모두 걸지.”
“어따, 우리 주 회장 결의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께. 읏차.”
조석구 또한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칼을 건네받아 손에 쥐었다.
“그라믄,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제잉.”
날카로운 칼끝에 서리는, 조석구의 핏물.
“쭉정이로 남은 저축은행. 그라고, 지금도 금감원에 검찰에 들락거리며 순 병신 취급을 받는 내 아들놈!”
흰 도화지 위에 두 번째 붉은 손바닥 자국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한서준이, 요 쌍놈 새끼는 언젠가 발가락을 토막쳐 버릴 것이여라.”
텅!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칼은 제임스 왕 이사의 쪽을 향했다.
평소 성격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칼을 살며시 매만지는 제임스 왕 이사.
“분위기 참 살벌하기 그지없군요. 하지만.”
그러나, 오늘 그에게는 평소와 같은 답답한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아닌, 아예 손바닥 위에 가로로 긴 상처를 내는 제임스 왕 이사.
“나 또한 한서준, 그자와 얽힌 악연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4년 반 전 탄약그룹 승계 전쟁, SA-철화 테크윈을 둘러싼 중국에서의 갈등.
태국과 위구르에서 있었던 혈전과, 자신의 남은 여력을 모두 쏟아붓고도 패배한 J-Coco 인수전까지.
“중국에서의 내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한서준! 내 사력을 다하여 반드시 놈의 모가지를 물어뜯을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처박히도록!”
패배로 얼룩진 삶을 모두 끝내려는 듯, 마음껏 내지를 거친 포효.
곧바로, 세 번째 피의 손도장이 흰 종이 위를 선명하게 물들였다.
“어따, 한 고문님도 한 말씀 하셔야 안 하요잉?”
조석구의 말에 독사 같은 눈으로 가만히 피에 젖은 칼을 바라보는 한화기.
그는 격렬하게 소리치는 것 대신, 조용한 어투로 침착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가졌어야 했던 것. 그리고… 끝내 손에 넣지 못하고 빼앗겼던 것.”
탄약그룹.
자신의 것이어야 했던,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던, 그 모든 것.
4년 반 전, 그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창 안에 갇혀 겪었던 모진 세월.
“혈육. 그래, 핏줄이란 것조차 참으로 부질없었지.”
칼끝부터 손잡이까지, 전체를 흥건하게 적신 피 냄새를 맡으며,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을 낳았지만, 자신을 지지하지는 않았던 서태후.
가슴팍에 접어둔 유언장을 매만지며, 복잡한 표정을 한 한화기가 마침내 칼을 꽉 쥐어 잡았다.
“이제는 가질 수도 없는 탄약그룹. 한서준과 연관된 모든 것을 찢고, 가르고, 부숴버릴 것이다. 시체마저 남지 않게 조각내어서!”
뚝, 뚝.
순식간에 피로 적셔진 손바닥.
떨리는 손을 도화지 위에 가져다 대어 온 힘을 다해 누르며, 아랫입술을 깨문 한화기가 다짐하듯 외쳤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영원히 세상 속에서 지울 것이다. 반드시.”
드디어 완성된, 네 개의 핏자국.
비릿한 피 내음이 나는 그 도화지를 가운데 두고서, 조석구가 말했다.
“자, 그라믄… 인자 모든 결의가 다 끝나부렀구마잉. 한 고문님요, 최종 전쟁 개시일은 언제쯤 될 것 같으요?”
한화기를 향해 집중되는 모든 시선.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만 가득 찬 방안, 고개를 든 한화기가 천천히 그 침묵을 깼다.
“모든 것이 끝날 그날, D-day는 바로.”
핏발 서린 눈으로,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을 죽일 듯이 응시하면서.
“앞으로 정확히 50일 후인, 12월 10일. 모두가 대통령 선거로 정신이 나간 바로 그때, 시작한다!”
* * * *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일본에서 있었던, 장성택의 비밀 계좌 3분할 이야기를 들은 김원철 아저씨는, 마치 배우라도 된 양, 명연기를 내게 선보였다.
“미화 20억 달러! 그것도 회삿돈이 아닌 개인 자금! 헉, 헉, 회장님아 나 지금 너무 숨이 차올라.”
“아니, 본인 돈도 아닌데 왜 숨이 찹니까.”
아직 일본 내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미화 20억 불.
이제… 모든 전쟁 준비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군량 준비와 작전 입안, 적의 파악까지 전부.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그나저나, 돈도 들어올 것이고. 슬슬 타이밍을 생각해야지 않겄어?”
“생각해야지요. D-day.”
타이밍.
상대를 무찌를 가장 최적의 타이밍을 정하는 것뿐.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제일 좋은 방법이 그냥 무차별적으로 시중 주식을 다 쓸어 담는 것인디.”
“그러기엔 불가능하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미화 20억 달러, 한국 돈으로 2조 원이 넘는 자금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실상은 제약이 많았다.
특히 경영권을 쥔, 대주주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저쪽이야 차명으로 잘게 쪼개서 들어갈 테니 가능하겠지만, 저는 힘듭니다.”
“하긴, 경영권을 가진 대주주가 무려 미화 20억 달러 치나 매집했다는 게 알려지면, 탄약그룹 순환출자 구조가 다 드러나게 되니까.”
상대와 비교했을 때, 팔 하나를 묶어놓고 하는 싸움.
나는 외팔만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어야만 하는 상황.
“거기에 주가도 미친 듯이 펌핑되겠죠. 그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에는 20억 달러 가지고는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난감한 일인데. 돈이 있어도 쉽게 작업을 못 치다니.”
“뭐, 그래도 아예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응?”
물론… 그 정도 핸디캡이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책상 바로 옆에 놓인 대형 목제 지구본을 손으로 세차게 회전시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시점에서, 탄약그룹 지분을 사들이지는 못하지만, 반대로 마구잡이로 팔 수 있는 사람도 있긴 하니까요.”
“아! 설마!”
툭,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느릿느릿 멈춘 지구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중동의 왕국. 내가 옹립시킨 그곳의 지배자는 바로.
“빈 살만 왕세자. 그 양반에게 쇼를 좀 부탁해야지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망해가는 탄약그룹의 폭락 쇼를.”
* * * *
같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중심부의 왕궁.
“왕세자 전하. 바람이 찬데 어찌 바깥에 나와 계시는지요?”
“아아,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말이다.”
사막의 밤은 차가운 모래바람이 부는 시간.
펄럭거리는 깃발 아래, 그는 정원 한가운데에서 흔들리는 잎사귀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생각했다.
이곳, 정원 한가운데에서 자신에게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인이 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던진, 한국인 사업가 한 사람을.
“확실히 재미있는 친구란 말이지. 이런 생각을 다 하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
그로부터 받은 제안을 고심하는 빈 살만 왕세자.
어쩌면, 이번 건은 그리 이득이 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단기적인 손익으로만 보았을 때, 손실이 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그리고… 서준 한, 이 사람에게 도전하는 자들이 어떻게 깨져나가는지 어디 한번 제대로 지켜보고 싶군.”
굳은 용암처럼, 이미 견고하게 형성된 신뢰. 그리고, 막연하지만 확실함에 가까운 기대감.
그렇기에… 손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
화롯불을 뒤적거리던 빈 살만 왕세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불꽃처럼 번져나갔다.
“국부펀드 담당자에게 말하라. 지금부터… 탄약그룹 주식 보유량의 절반을 한 달간 빠르게 매도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