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다가오는 전쟁(3)
북한산 자락에 기댄, 고요한 사찰 하나.
할머니의 49재는 장례식이 있었던 큰 절이 아닌, 암자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곳에서 조용히 가족들만 참가하는 정도로 치러졌다.
물론… 이제는 가족이라고 해봐야,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러니, 나도 온 것 아니여. 우리 마귀할멈… 그렇게 괄괄하시던 양반이 가셨다는 게,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걸랑.”
내 옆자리, 방석 깔린 마룻바닥에 앉아 멍하니 할머니의 신줏단지만을 바라보는 김원철 아저씨.
그 앞에는, 재벌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출한 식구 몇 명만이 앉아 있었다.
나, 엄마, 그리고 서희 누나. 이렇게 세 사람만이.
“할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향 하나를 향로에 꽂은 나.
절을 두 번 하고 다시금 고개를 숙인 나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바라셨던 대로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톡, 톡, 톡.
중얼대듯 읊는 불경 사이사이 들리는 목탁 소리.
뒤이어, 산바람을 맞은 풍경(風磬)이 몇 차례 청아하게 울리자,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한씨 집안 식구들을 눈에 담고는 입을 열었다.
“보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조금 사이사이에 사람이 많이 빈 것 같지요? 서호 형이라든지 서후 형이라든지….”
편치 않은 마음.
그러나, 해야만 한다.
이미 한서호, 한서후를 감옥 안으로 넣어버린 이상. 그리고, 북한이라는 독이 든 성배를 양쪽에서 들이켠 이상, 물러설 곳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 다짐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
나무살로 장식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숙부였다.
“뭐, 뭣이여. 한 고문님이 여길 왜?”
“하!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인가?”
문가에 앉은 김원철 아저씨를 툭 밀치고 경내로 들어서는 숙부.
숙부는 마치 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라도 본 듯한 눈으로, 모인 사람들을 향해 하나하나 너무나도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비수가 되는 폭언과 함께.
“한씨 집안 식구도 아닌 자. 제 아비와 오라비들의 등을 칼로 찌른 자. 한씨 집안에 염치도 모르고 아득바득 기어들어 온 자. 그리고.”
김원철 아저씨, 서희 누나, 그리고… 엄마. 모멸적인 그 말은 내 목 바로 앞에서 매듭지어졌다.
내 앞에 마주 선 채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숙부.
“핏줄도 천한 반쪽짜리 찬탈자까지. 있어서는 안 될 것들만 득실거리는군. 이래서야 어머니께서 마음 놓고 떠나시겠나.”
“말씀하시는 것이 심하십니다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조용히 사그라드는 불경 외는 목소리와 목탁 치는 소리.
차가워진 공기. 숨 막히는 압박감. 긴장으로 가득 찬 침묵이 깨진 것은, 숙부의 차디찬 말 한마디가 있고 난 뒤였다.
“사우디 국부펀드의 움직임. 한서준, 네놈 짓이었던가?”
“이미 알고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뭐라?”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이었다고 여기기라도 한 걸까?
일체의 감정 변화 없는 내 모습에 오히려 동요하는 숙부.
한 발짝 다가간 나는, 숙부를 그대로 마주 본 채로 당장이라도 맞붙을 거리에서 말을 내뱉었다.
“주식 차트에 고심하시던 흔적이 6,500억 원어치가 서려 있더군요. 물론.”
내가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리듯, 아주 정확한 액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아무리 고뇌하신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지만.”
“내가 할 소리를 네놈이 하는군.”
벌써 시간이 오래 지났는지, 어느새 잿더미만 남아 버린 향로 안쪽.
새로운 향을 집어 성냥불을 붙인 숙부는, 곧바로 차갑고도 냉정한 얼굴을 한 채로 내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어제 자로 투입된 자금 규모가 전부라 여겼다면, 이제 그만 죽을 자리를 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북한에서 받아온 자금을 운운하며.
“미화 10억 불. 이제 곧 추가 자금이 네놈의 숨통을 조여 올 것이니까.”
영정 사진 앞에서 승리를 확신한 듯 미소 짓는 숙부.
반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을 한 그는… 헌화된 국화 한 송이를 손아귀에 쥐고는 곧바로 온 힘을 다해 바스러트렸다.
“본래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가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부숴버리게 생겼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마치 브레이크를 빼버린 채로 나락을 향해 달려가는 기관차라도 된 것처럼.
“미화 10억 달러라.”
그래서, 나는.
“그걸로 되겠습니까?”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는군. 네놈 개인 재산은 이미 파악하고 있거늘….”
“아니, 아니. 그 전에.”
이제부터 이 모든 파국의 실타래를 매듭지을 것이다.
반드시.
“그 10억 달러라는 자금. 아마 제대로 집행도 못 할 것 같습니다만.”
“무슨…!”
“잘 봐 두시지요.”
마지막 합장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선 나.
흰 장갑 낀 손으로 영정 사진 액자 틀을 한번 매만진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숙부에게 말했다.
“진짜 숨통을 조여 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이제 곧…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 이번만큼은 그 어떤 자비도 없다는 것 또한 똑똑히 기억하시길.”
그 끝은 숙부에게 있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 * * *
같은 시각.
한성신문 본사 앞, 모 한정식집.
“김 주필! 김 주필! 아이고,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언론사 주필의 소맷자락을 잡아가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한 사람.
현(現) 여당의 대통령 후보자. 그의 복심이라 할 수 있는 선거 캠프 홍보실장은, 법조인 출신답지 않게 저자세로 연신 허리를 숙이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응? 아, 그냥 한성신문에서 커버 쳐 주면, 그대로 묻힐 일 아니냐고.”
“하… 홍보실장님, 그게 쉬운 게 아니에요, 지금.”
그러나,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젓는 홍보실장.
사생아.
정치가의 혼외자식이라는, 덮을 수도 없는 이슈는 최 후보의 발목을 꽉 붙잡은 채, 연신 지지율을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아니, 있는 애를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유전자 검사 결과지도 싹 다 유출된 판에, 이걸 어떻게 덮습니까?”
“하아… 돌아버리겠네, 진짜로.”
“미안해요. 밑에 애들도 특종 경쟁 때문에 난리야. 이번엔 나도 안 돼.”
“잠깐만! 김 주필! 김 주필! 야!”
텅! 거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미닫이문.
덩그러니 혼자 남은 홍보실장. 그는 털썩 자리를 주저앉고는,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아무것이나 음식을 집어 먹으며 탄식했다.
“하, 옘병할… 씨알도 안 먹히네. 캠프에 뭐라고 말해야 하나. 또 된통 깨지겠네.”
점점 턱밑으로 추격해 오는 야당 측 후보의 지지율. 조만간 그래프는 X자를 그리며 역전될 상황.
이 모든 것은 다 한때 타오르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서였으리라.
“아니지. 애초에 깨져야 할 것은 10년 전의 영감탱이 머리통인데, 왜 내가 대신 깨져야 하나? 얼레… ?”
지잉, 울리는 진동 소리.
한때 사랑꾼이었던 최 후보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예! 후보자님! 그, 뭣이다냐. 김 주필 그 인간 영 글러 먹어서 말입니다. 아주 사람 인성이… 예?”
달그락,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말에 유기그릇 위로 떨어지는 젓가락.
“아,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홍보실장.
통화가 종료된 후, 그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제 뺨을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작금의 상황 때문에.
“한서준 회장… 그 양반, 이제는 대선판까지 흔드는 것이여?”
* * * *
홍보실장이 전화를 받기 한 시간 전.
“후우… 왔는가?”
“아, 예. 대통령 각하.”
청와대를 찾은 최 후보.
평소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와는 다른 딱딱한 표정, 경직된 몸동작, 불안한 떨림까지.
그는 대통령을 마주하자마자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고했다.
“송구합니다, 각하! 정말이지 각하를 뵐 낯이 없습니다.”
“알긴 아는군.”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최 후보를 매섭게도 노려보는 대통령.
평소였으면 이미 손절을 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으나, 이미 한번 선출된 대선 후보.
이제는 말을 바꿔 타기에는 요원한 상황이었다.
“해서, 애하고 그 여자는? 어찌 처리했나?”
“일단… 유학 명목으로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성인 되기 전까지는 거기서 쭉 살게 하려고 합니다.”
“급한 불은 껐군.”
꿀꺽, 대통령의 눈치를 보며 목젖을 꿀렁거리는 최 후보.
툭, 툭, 탁자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던 대통령이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되었네. 대충 마무리는 할 수 있겠군.”
비록 골치 아픈 일일지언정 분명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며.
“대통령 각하…?”
“이 친구, 놀라긴.”
깍지 낀 두 손을 목 뒤로 한 채,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대통령.
차렷 자세의 최 후보를 바라보며,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혼외자 이슈. 해결 방법이 있단 말일세. 물론, 매끄럽게는 못 하지만.”
“……?”
“좀 난폭한 이슈 파이팅이 될 것인데, 자네가 링 위에서 잘 뛰어 봐.”
이슈를 이슈로 덮겠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 후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만….”
“뭐, 그야 그렇지. 나도 이 친구, 처음 만났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거든. 그래도 말이지.”
의심과 불신, 미약한 추측의 영역에 있던 최 후보에게 대통령은 굵직한 동아줄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마치 요술 방망이를 부리는 듯한 얼굴로.
“이 친구가 낸 아이디어가 틀어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 이제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박 실장!”
“예! 각하!”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무어라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하는 박동희 정책실장.
“지금 도착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고 할깝쇼?”
“바로 여기 본관으로 오라 하게.”
저벅저벅,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하는 발걸음 소리.
“이거, 자네는 차기 정권 초기부터 그 친구에게 빚을 지고 시작하게 생겼구먼.”
“도대체 누구길래…?”
커지는 발걸음 소리에 맞추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궁금증.
끼익,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양쪽 문.
황금색 봉황이 장식된 문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 오는군.”
“어어어…!”
생각지도 못한 인사에 놀란 듯한 최 후보. 피식 웃음 지은 대통령이 두 사람을 가까이 붙이고는 서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인사들 나누게. 이쪽은 우리 대선 주자인 최 후보. 그리고 여기 젊은 친구는.”
이제껏 자신에게 그러했듯, 자신을 이을 후계자를 잘 부탁한다는 뜻의 눈인사와 함께.
“한서준 회장. 자네를 지옥에서 꺼내 줄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