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전쟁(1)
제법 준수하게 생긴 엘리트 출신의 안경잡이. 그러나,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카리스마.
처음 마주한 최 후보의 인상은, 뭐랄까… 맹했다. 딱 바지 사장으로 적합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실타래 달린 구체관절인형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싶은 대통령. 그리고, 본인이 타고난 그릇에 비해 너무나 큰 기회를 덥석 물어버린 최 후보.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각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바지 사장일지언정 차기 대권을 거머쥘 예정인 그는, 현(現) 대통령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시험하려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가령.
“한서준 회장님께서는 안 될 일도 되게 만드는, 요술 방망이 같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이런 식의, 에둘러 돌아가며 사람의 깜냥을 떠보는 방식으로.
“혹시 그 요술 방망이가 책임까지 전부 지는 것은 아닐 테지요?”
참… 뭐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있는 양반이다.
분명 자신이 저지른 잘못 탓에 곤경에 처했을 텐데, 여기서 도움을 준다는 동아줄이 튼튼한지 한번 당겨보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다소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이 무례를 지적할 포지션에 있는 대통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는 웃음만을 짓고 있는 대통령.
아마도… 그는 최 후보라는 사람을 통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차기 대통령에 줄을 대려면, 그리고 자신이 상왕으로 있을 미래에도 쭉 같이 가고 싶다면, 어디 한번 최 후보에게 역량을 보여 보라고.
“책임이라.”
그리고, 나는 익숙했다.
“물론 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다만.”
누군가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은.
“여기 계신 대통령님처럼 저를 온전히 믿고 모든 것을 맡기시는 경우에 한해서만.”
티 나지 않게, 그러나 명확한 의도가 담긴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바라보는 최 후보.
달그락, 입가에 댄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내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하신 부분에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신지요?”
“적어도 최 후보님의 혼외자 문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질 정도로요. 그러니.”
그리고, 이 정도의 바지 사장 후보 따위야, 얼마든지 휘어잡을 수 있을 만큼 나는 성장한 상황.
나는 최 후보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내 존재감을 그의 뇌리에 명확히 인식시켰다.
“괜한 시험은 그쯤 하시고, 속히 본론으로 들어가심이 맞지 않겠습니까? 최 후보님께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
앞으로 있을 5년, 현(現) 대통령을 이어 함께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모습을.
그런 내 모습을 본 최 후보. 그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한 그릇을 아는 자이니만큼, 내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모습.
“이거, 참. 왜 대통령 각하께서 그리도 극찬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
“최 후보, 이 사람. 괜한 말을 다 하고. 크흠.”
서로 헛기침을 주고받으며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를 풀기 시작하는 정치인 두 사람.
멋쩍은 듯 자리에서 일어선 대통령. 주위를 좀 환기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그는 본관 테라스 커튼을 활짝 젖히며 말을 꺼내었다.
“대충 갈무리된 게지? 둘 다 기 싸움은 그쯤하고 슬슬 진도 좀 빼보자고. 이보게, 한 회장.”
“말씀하시죠.”
“그래, 탄약그룹 경영권 분쟁 이슈를 대선판 무대 위에 등판시키자고?”
대낮의 햇빛이 겨울철의 찬 공기를 덥히는 테라스 안쪽.
눈이 부신 건지 한쪽 손으로 햇빛을 가리는 최 후보의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탄약그룹 경영권 분쟁. 그리고 대통령 선거.
일견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사안에 어떤 연관의 끈이 닿아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그였으니까.
“그… 한 회장님? 송구합니다만, 대통령 선거에 탄약그룹 이슈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상관이 없는 이슈를 상관이 있게 연결하면, 그다음부터 모든 것들이 구슬처럼 꿰어지니까요. 쉽게 말해서.”
그리고, 지금.
나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최 후보에게 대답했다.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구슬 다발을 단 한 번에 꿸 수 있는 절묘한 수가 무엇인지를.
“제 숙부인 한화기 고문. 지금 가지고 온 자금이 북한 김정은에게 받은 자금입니다.”
“……!”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최 후보는, 곧바로 이 심각한 사안에 역정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화기 고문, 그자가 정신이 나갔군요! 끌어와선 안 될 자금을 끌어오다니!”
“최 후보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끌어와선 안 될 자금. 일종의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사람.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말허리를 자른 채 최 후보의 반응을 기다리는 나.
몸이 잔뜩 달아오른 채, 내 말만을 기다리는 최 후보.
이제 본격적으로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다.
정치인으로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이 용서받지 못할 자가… 야당 후보를 지지한다면? 그리고, 야당 후보가 제 숙부에게 북한에서 온 자금의 일부를 받게 된다면?”
“……!”
“간단하게 끝날 문제 아니겠습니까. 선거도, 탄약그룹 집안싸움도.”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정치적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최 후보.
하나하나 연산을 더해 갈 때마다,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는 그의 입꼬리.
그리고, 그 계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옆에서 이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대통령의 목소리였다.
“과연! 한 회장이로구먼. 정말이지 자네 같은 친구는 기업가가 아니라 정치가를 해야 한다니까.”
“허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왕 이리된 것, 차기는 몰라도 차차기에는 청와대 안주인이 될 수도….”
나더러 아예 정치판에 뛰어들라는, 말도 안 되는 칭찬 비슷한 말과 함께.
“아니요, 아니요. 저는 탄약그룹만으로도 골치가 아픕니다. 아무튼, 그래서.”
정치는 무슨 놈의 정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지금 정도가 딱 좋다.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
모든 제안을 일축한 나는 곧바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브이(V)자를 그리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 작전을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결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거대한 쇼에 필요한 준비물. 그 굵직한 두 개에 대해서.
“숙부의 자금이 북한의 김정은이 보낸 돈이라는 증거. 그리고, 숙부가 야당을 지지하게 될 일종의 트리거(Trigger)가.”
* * * *
상하이, 푸둥 지구.
-내래 절대 가만히 당하고 있는 성품은 못 된다. 알아두도록!
“예,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원장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힌 채, 김정은과의 전화 통화를 하는 제임스 왕 이사.
벌써 며칠째, 하루도 빼먹지 않고 걸려 오는 연락.
광포함이 목소리에 잔뜩 서려 있는 이 젊은 독재자는, 말하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에 분노와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계산은 확실히 하라! 돈 굴리는 자본가 놈이니 무신 말인지 알간?
“물론입니다. 보내 주신 10억 불, 반드시 두 배. 아니, 그 이상으로 불려서 다시 돌려드리겠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장성택이 그 쳐죽일 쓰레기 놈. 그 새끼 소식도 내래 재촉하기 전에 먼저 보고 올리라!
그저 감정적인 폭언만 내뱉는 것이 아닌, 수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자꾸 던지는 김정은.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제임스 왕 이사.
안 그래도 장성택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던 그였기에, 여러 가지로 수소문을 내던 상황.
그러나.
“장성택이 빼돌린 자금은… 저희도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 기무라 와치루라는 사람도 종적을 감춘지라.”
-괜한 변명 늘어놓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하라! 무조건!
정말이지 마법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기무라 캐피탈>.
심지어 일본과 미국의 자금 조사마저 장성택 망명 이후 보안이라는 명목하에 흐지부지된 상황.
미궁으로 빠져 버린 이 찝찝한 사건을 머릿속에 그리며, 제임스 왕 이사는 김정은에게 성의 없는 대답을 건네었다.
“…알겠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뚝, 끊긴 통화와 함께 내뱉은 긴 한숨 소리.
“후우… 괴팍한 독재자 놈 같으니. 제 아비만큼이나 성격이 더럽군.”
“주군, 또 북조선 새끼돼지 전화입니까?”
“아아, 옌룽. 나도 김정은 이자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답답한 듯,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하는 제임스 왕 이사.
반짝거리는 상하이의 야경을 눈에 담으며, 기분을 환기한 그가 심호흡을 내뱉고는 옌룽에게 대답했다.
“어째 하루가 멀다 하고 이리 전화질인지. 차라리 한화기 그치가 더 신사로 보일 정도로군.”
제임스 왕 이사를 전화로 괴롭히는 또 다른 사람, 한화기.
얼마 전, 한국의 JL 저축은행 쪽에 자금을 보내게 되는 상황에서, 그는 직접 제임스 왕 이사를 찾아와 이렇게 당부의 말을 내뱉었다.
‘아아, 그렇지. 한국으로 자금을 보낼 때 말이지. 그게 북한 쪽에서 온 것을 반드시 숨겨야 한다.’
어째서 그래야 하냐며 제임스 왕 이사가 되묻자, 곧바로 거칠게 역정을 내던 한화기.
‘멍청하긴! 국제 금융 제재가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북한 놈들과 돈으로 엮였다는 것이 드러나면, 내가 무슨 꼴이 되겠나!’
조폭 놈들이 엮여 들어가는 것 따위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원래부터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이들이니까.
그러나, 한화기 그 자신만은 이번 일에서 안전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상황.
그 모습을 떠올리며 담배 한 개비를 전부 태운 제임스 왕 이사는, 유리창에 잿빛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뭐,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기도 했지.”
그런 제 주인의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재떨이를 가지고 온 옌룽.
말끝을 조금 흐리며, 그는 조심스레 제임스 왕 이사에게 우려되는 것을 이야기했다.
“주군, 한화기의 말대로 자금 출처를 온전히 숨길 수 있겠습니까…?”
“아아, 그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은 완벽하니까.”
김정은이 <상하이 캐피탈>에 보낸 미화 10억 달러.
평양의 금융 당국이 하얼빈의 모 은행에 개설한 문제의 계좌.
적어도 그 계좌는 정상적인 형태를 갖추고는 있었다. 중국 정부 측의 비호만 계속 있게 된다면야, 바깥에서는 절대 알 방법이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확신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옌룽에게 대답하는 제임스 왕 이사.
“김정은이 직접 제 입으로 불지 않는 이상, 탄로 날 일은 일절 없는 법이니.”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이… 제임스 왕 이사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발등을 도끼로 찍어댈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