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전쟁(4)
여의도의 모 고층 빌딩.
수십여 대의 모니터에는 탄약그룹과 관련된 차트가 띄워져 있었고, 트레이더들은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한화기와 제임스 왕 이사.
“순조롭군.”
“아주 좋습니다. 이대로라면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갈 테니까요.”
사무실 한쪽, 거대한 화면에 나타난 목표 매집 지분.
가진 자금의 절반이 조금 넘는 금액을 쏟아부은 상황. 제임스 왕 이사는 실시간으로 증가하고 있는 숫자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한서준, 그자가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은 한화로 1조가 채 안 되지 않습니까.”
“하! 1조는 무슨. 기껏해야 2,000억 원 언저리에서 조금 왔다 갔다 할 터.”
아직 장성택의 비밀 계좌에 있던 돈의 행방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한화기.
그렇기에, 그는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탁자에 양손을 짚고는 눈을 번득였다.
“그에 비해 우리 쪽 자금은 자그마치 2조 원 가까이 된다. 연말까지 이대로만 가면 되는 것일 터.”
“이번에야말로 정말 한서준, 그자와의 악연을 끊어버릴 수 있을… 어어?”
샴페인만 터트리지 않았을 뿐, 곧 다가올 축제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제임스 왕 이사의 휴대전화.
액정 위에 쓰인 이름은 다름 아닌.
“김정은…?”
김정은, 북한의 독재자이자 이번 작전의 최대 투자자인 사람.
그리고.
“새끼 돼지 놈이 하필이면 막 기분 좋을 때 전화질을 하는군.”
이런저런 간섭과 참견, 걸핏하면 보이는 격노와 고함으로 한화기와 제임스 왕 이사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사람.
한화기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쉰 제임스 왕 이사가 전화를 받았다.
“후우… 네, 위원장님. 제임스 왕입니다.”
늘 그렇듯, 듣는 이의 청각 따윈 고려치 않은 김정은의 고함.
얼굴을 잔뜩 찡그린 제임스 왕 이사는 평소처럼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는 되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귓구녕에 목화솜 뭉치라도 욱여넣었나! 너이 두 놈 무슨 일을 이딴 식으로밖에 못 하나!
물론, 뒤이은 김정은의 말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중요성의 것이었지만.
-한서준이 그놈이 가진 총알이 미화로 20억 불인 것을 네놈들이 모르면 뭐 하자는 기야! 그것도 장성택이가 빼돌린 자금을!
왕방울만 하게 동그라진 두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한화기와 제임스 왕 이사.
“장성택의 그 돈을… 한서준 회장이?”
“무슨 소리지? 한서준이가 장성택 자금을 왜 들고 있나!”
식은땀 한 줄기가 그들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는 그들의 항해가, 사실은 시퍼런 바닷속 지옥의 입구를 향하는 것이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본질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는 두 사람의 귓가에 들리는 김정은의 격양된 목소리.
-기무라 와치루, 그자가 아니었으면 네놈 모두는 토막 난 채로 개밥이 되었을 기야. 이 저능아 같은 머저리 놈들!
* * * *
참 잘도 속고 있었다.
이 순간, 전화기 너머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숙부와 제임스 왕 이사도.
그리고, 지금. 내가 종잇조각에 끄적거린 글씨를 본 채, 그대로 꼭두각시 인형을 자처하는 김정은도.
-위원장님께서 이리 전화를 주신 것은… 달리 저희에게 지시하실 것이 있으셔서라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제임스 왕 이사.
어떤 말을 할지 모르는 김정은이 나를 바라보자, 나는 우선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속하라는 지시 아닌 지시를 내렸다.
“고저, 상하이 떼놈이 머리 하나는 빨리 굴러 가구먼 기래. 기렇지.”
쓱싹쓱싹, 곧바로 크림색 종이 위에 만년필로 무언가를 적어 내리는 나.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김정은. 그러나, 내 확신에 찬 눈을 바라본 그는, 이내 곧바로 납득한 듯 미소를 지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라도 된 것처럼.
“추가 자금. 10억 달러를 더 보내갔어.”
내가 준비한 첫 번째 핵폭탄.
명확한 증거가 남는, 북한과의 대규모 자금 거래.
리틀 보이(Little Boy)는 그렇게 도둑처럼 큰 그림 뒤에 숨어, 그들의 심장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대신, 늘어난 지분에 비례한 추가 이익은 오로지 공화국 몫이다. 알갔나?”
-물, 물론입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토록…!
“잠깐, 기다리라.”
도수 없는 가짜 안경 너머 마주친 김정은의 시선.
그렇지.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
마치 감독이 배우에게 큐 사인을 주듯, 내가 들어 올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고개를 끄덕이는 김정은.
“끝이 아니다. 네놈들이 할 거이 더 있으니.”
-할 것이라면, 어떤 것 말씀이신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두 번째 핵폭탄.
팻 맨(Fat Man)이 되어줄 그것은 바로.
“그, 한서준이 놈이 남조선 대통령 비호를 받는다지?”
-맞,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안전장치를 하나 더 하고 가라! 야당 쪽 후보에 딱 붙어서, 대선이 끝나고 한서준이 그놈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숙부가, 그리고 숙부와 손잡은 모든 이들이 야당 후보를 지지하게 만드는 것.
모두가 내게 속고 있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로.
* * * *
“야당 쪽에 정치자금을 고이든 딸년을 바치든, 기 옆에 착 달라붙어 있으라!”
-아, 알겠습니다…!
쿵! 고함과 함께 끊어버린 전화.
고작 말 몇 마디나 했다고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김정은.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는 곧바로 시가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에이, 머저리 놈들. 진즉 그리 대답하면 되는 것을! 하여간, 떼놈이건 남조선 놈이건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만든다!”
“그게 다 위원장님의 패기로운 목소리에 긴장한 탓일 겁니다.”
틱, 틱.
손수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자, 만족한 듯 연기를 빨아 마시는 김정은.
참… 어찌 보면 단순하기까지 한 것 같다.
북한에서 아부란 아부는 많이 들었을 텐데, 외국인이 이렇게 살갑게 대해 주니 좋기는 한 듯 말을 더듬기까지 한 김정은.
“기, 기래?”
“어지간한 천하장사도 위원장님 호통 한 번에 오줌을 질질 흘리고 다닐 겁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사실 어지간한 중학생 복싱부 수준에서 정리되지 않을까 싶은 육신이지만, 뭐 어떻겠는가.
오늘 정은이는 밥값을 했으니, 이 정도 칭찬쯤이야 들을 만도 하지.
“크흠, 백두혈통을 이어받은 내래 그만치 패기도 없이 어찌 일국을 이끌어 나가갔어? 자네 말이 옳다.”
“바로 그겁니다. 특히 마지막 그 부분 있잖습니까. 남한… 아니, 남조선 우두머리를 뽑는 선거에 개입하라 하신 부분.”
김정은을 따라 시가 한 개비를 입에 문 나.
코끝에 올라오는 진한 박하 향을 음미하며, 나는 미소와 함께 그에게 힌트 하나를 주었다.
“결단을 내리시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감동, 또 감동이었습니다. 마치, 뭐랄까.”
조만간… 내 정체를 알게 되어, 분노에 차 방방 뛰어다니게 될 날이 오게 된다면, 지금 내가 한 말을 꼭 좀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는?”
“응? 기건 또 무신 말인지… 아무튼, 가기 전에 술이나 들지! 내래 최고급 와인을 준비하갔어!”
* * * *
“이 역겨운 돼지 새끼가!”
통화를 끊자마자 거세게 화를 내는 한화기.
낮도깨비처럼 찾아온 지령 아닌 지령에 그는 언짢은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야당 후보에 붙으라니! 그것도 정치자금까지 건네면서까지! 정계에 손을 뻗는 것은 외줄타기만큼 위험한 것인데!”
“꼭 그렇게까지 화내실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뭐라…?”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팔짱을 낀 채, 고심하는 제임스 왕 이사.
벌써 계산을 마친 듯, 결심을 마친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화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저 새끼 돼지 놈이 추가 자금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또 한서준 놈에게 진다는 것을.”
“…….”
“미화 20억 달러입니다! 미화 20억 달러!”
미화 20억 달러.
그 막대한 자금이 버티고 있는 한, 확신에 찼던 탄약그룹 공성전은 실패할 것이 뻔한 상황.
“장성택 그자가 숨겨둔 자금 일부가 한서준에게 갔다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추가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일단 김정은 말을 듣긴 해야 합니다.”
“후우, 일이 꼬이는군.”
한화기 입장에서 자금 지원이야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북한에서 바로 한국으로 송금이 되는 부분이 조금 꺼림칙하긴 했지만, 한시가 급한 부분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
그러나.
“한서준….”
정치권과, 그것도 야당 대선 후보와 강력하게 밀착해야 한다는 것.
분명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뇌리에 서리는 막연한 불길함 한 줄기.
“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11월의 어느 날.
바깥 창을 두들기는, 가지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한화기는 그렇게 을씨년스러운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할 수 없군. 내일 바로 야당 선거 캠프로 가지.”
힘없이 흘러내리는,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꼭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개 같은 기분은, 승리를 거머쥐기 전의 마중물 값 정도가 되겠지.”
* * * *
야당 대선 후보자 캠프.
사무소 한쪽에 놓인 거대한 TV에서는, 연신 정치권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8대 대통령 선거를 이 주 앞둔 지금, 각계 인사들의 지지 선언이 쏟아지고 있다지요?
-네, 그렇습니다. 정계와 관계, 시민사회뿐 아니라, 재계에서도 몇몇 인사들이 각 후보자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가며 자신을 언급하는 앵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한화기.
잔뜩 긴장했는지 넥타이를 매만지는 그의 손바닥에는 떨림과 함께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특히, 탄약그룹을 두고 후계 경쟁을 벌이던 한화기 고문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야당 선거 캠프 사무소에 한화기 고문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화기 자신을 비추는 수십여 대의 카메라.
터지는 플래시 속, 야당 대선 후보자가 내민 손을 맞잡은 한화기.
“여기까지 오는 데에 참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모아 내달린 지금. 산기슭을 뛰어다니는 호랑이의 등에 탄 채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 마지막 남은 힘을 전부 불태울 것임을.
“저 한화기는, 탄약그룹의 적법한 후계자였던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감히 말씀드립니다.”
설령 그것이, 제 몸뚱이마저 태워버린다고 할지라도.
“철없는 핏덩이를 싸고도는 누구와 달리! 공명정대한 누군가가 대한민국에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 진심을!”
그리고, 그 불꽃은 한화기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직 하나만을 태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을 담아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기 계신 후보자분을 적극 지지한다고…!”
“한화기 씨!”
너무나도 과분한 욕망에 흠뻑 젖은 채로, 불씨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를.
“서울중앙지검 박은지 검사입니다!”
“검사…?”
“한화기 씨. 당신을 국가보안법 및 대외무역법,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