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매듭짓기(2)
한 달 후.
눈바람이 거세게 부는 12월의 겨울날,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찾게 된 할머니의 산소.
나는 반쯤 살얼음이 낀 청주를 무덤가에 흩뿌리며, 대나무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잔디를 매만졌다.
추위를 잊을 만큼, 깊은 생각에 잠겨.
“하이고, 우리 회장님, 기분은 좀 어떨라나 모르겄네.”
그리고, 옆자리에 쭈그려 앉아 내게 말을 건넨 김원철 아저씨.
“시원섭섭하기도 할 것이고,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가슴 속에 응어리 하나 큰 게 남았을지도 모르고.”
내 등 위에 두꺼운 코트를 얹혀 준 아저씨는, 조금은 멋쩍은 듯 코를 훌쩍이고는 내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나는, 그 뭐냐… 고생 많았다는 말부터 하고 싶걸랑. 전후 사정 다 따로 두고서.”
망부석처럼 이곳에 앉은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괜찮습니다.”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툴툴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
그렇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복수도.
“전부 지켰으니까요. 탄약그룹도, 제 자신도.”
수성(守城)도.
그리고…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터벅터벅, 모든 감정을 다 털어내고, 산자락에서 내려가는 나는 김원철 아저씨에게 물음을 던졌다.
“지분 매집 현황,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안정적으로 매집되고 있어야. 일단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들은 거진 모았고.”
태블릿 PC 하나를 꺼내어, 내게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을 보여주는 김원철 아저씨.
확실히, 지난 한 달여간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 지배 지분은 거의 확보한 상황.
거기에 더해서.
“저쪽에서 쥐고 있던 지분은 싸그리 국고로 귀속되었잖어? 그것도 정부 쪽에다 매수 의사 넣었고. 조만간 몇 달 내로.”
김정은이 마련했고, 제임스 왕 이사가 조달했으며, 숙부가 집행했던 북한 자금, 미화 20억 달러.
그들이 매집했던, 이제는 국가 소유가 된 지분 또한 염가에 매수할 수 있는 상황.
이렇게 된다면.
“지주사 전환, 가능해. 100%”
“수고하셨습니다”
지주사 전환.
안정적인 반석 위에 탄약그룹을 올려놓을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다.
외부의 태풍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내가 갈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환경이.
“후우, 일단 올라가더라도 좀 여독을 풀고 올라가야겠습니다.”
잠시 몸을 덥히려, 산소 인근의 탄약그룹 소유 리조트 특실로 들어간 나.
돌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사우나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처럼 고군분투 끝에 승리를 거머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제18대 대통령 선거, 여당의 최 후보가 압승했지요?
-전문가들은 한화기 전(前) 고문의 북한 자금 관련 이슈가 판세를 뒤집는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하였는데요.
-네, 그러면 지금 바로 대통령 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최 당선자의 소감을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저번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최 후보의 얼굴에는 제법 여유가 생겼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약간 머리 뒤로 부처님처럼 묘하게 둥근 빛으로 된 고리 같은 게 있어 보이기도 하고.
물론, 그 둥근 고리의 절반은 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자, 그럼. 그룹이나 국내 정치권이나 전부 다 안정되었으니, 나머지 정리를 조속히 시작해야겠습니다.”
역시 내 최측근이라서일까?
나머지 정리라는 말에 바나나우유 하나를 통째로 들이켜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김원철 아저씨.
“어디 보자. <상하이 캐피탈> 제임스 왕 이사.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 둘 다 만만찮은 거물이네. 누구부터 처리하면 될까?”
“일단은.”
점점 올라오는 뜨거운 김.
아마 이 정도 온도라면 어지간한 얇게 썬 돼지고기도 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피식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북쪽 새끼 돼지가 당장은 뭘 하지는 못할 겁니다.”
“하긴, 우리 회장님이 기무라 와치루라고는 때려죽여도 생각 못 할 테니까.”
김정은. 포악하기 짝이 없는 독재자.
그러나, 아직은 감을 못 잡고 있을 것이다. 누가 자기 돈을 가지고 갔는지, 그리고 누가 자기 투자금을 다 날려먹게 만들었는지를.
그걸 알기 전까지는, 저쪽은 2순위로 놓아도 될 터다.
“그러면, 중국부터 가야겠네?”
“세밀하게 조사해 주시지요. 현재 <상하이 캐피탈> 쪽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그렇기에 집중하기로 한 중국.
그러나,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내 든든한 지갑이었던 김정은. 그 새끼 돼지가 어떤 미친 짓을 벌이고 다닐 것인지를.
“중국 공산당. 정치 중심지인 베이징 현지 사정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까지, 전부.”
* * * *
같은 시각.
일본 도쿄, 긴자의 밤거리.
“헉… 헉…!”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만 같이, 벅차오르는 숨소리.
인적 드문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장성택은 연신 작동하지 않는 휴대전화를 두들기며,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이런 미친! 하필이면 이럴 때 손전화 밧데리가 싸그리 나가버리나!”
아직 정식으로 경호 인력이 배치되지 않은 상황.
거기에, 오늘따라 갑작스러운 외부 일정으로 인해 어그러진 스케줄.
장성택을 노리는 암살자들이 따라붙기 딱 좋은, 그런 날이었다.
“따돌렸나…?”
“기럴 리가 있갔어?”
거센 숨을 부여잡고 모퉁이를 돌자, 장성택의 눈에 보이는 한 사내.
곧바로 그를 뒤쫓던 또 다른 사내 또한 칼 한 자루를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내 오늘 같은 날만 죽어라 노렸는데.”
“보, 보위부에서 보낸 놈들인가…!”
“얌전히 따르라. 조선 민족의 반역자 장성택이 놈.”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씌워진 두건.
덜컹, 덜컹.
흔들리는 차 안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한참이 지나고서야 장성택의 눈에 들어온 바깥 풍경.
“다 왔다. 내리라!”
“읍, 읍읍…! 크헉!”
불쾌한 악취가 진동하는, 시골 어느 곳의 돼지 축사.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가며, 입에서 재갈을 푼 장성택이 말했다.
“여, 여긴…?”
“반역자 새끼가 죽기엔 너무 호화로운 곳이지 않간?”
스윽, 은은한 백열전구 빛을 받아 스산하게 반짝이는 칼날.
의자에 묶인 장성택에게 암살자 사내 둘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느이 형제자매, 그 짐승 씨앗들은 죄 핵 땅굴 파다가 갱도째로 파묻혀 뒤져버렸는데 말이지.”
“아, 안돼. 제발 그만…!”
“아아, 걱정 마라. 바로는 안 토막 내갔어.”
떨리는 손가락 끝에 칼끝을 가져다 대며.
“장성택이 너이 쓰레기 놈에게 들어야 할 정보가 여간 많아서 말이지비.”
* * * *
며칠 후, 평양. 김정은의 집무실.
“이런 빌어먹을 개잡놈들을 보았나!”
늘 그렇듯, 격노에 찬 목소리로 난리를 치며 집기를 때려 부수는 김정은.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분노의 정도가 더 심한 듯했다.
자신의 주변을 지키던 호위병 하나의 얼굴을 홧김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내 그 버러지들에게 두 번에 걸쳐 보낸 돈이 무려 미화 20억 불이야! 20억 불! 기래도 일을 실패하다니!”
그리고, 김정은 앞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은 대외경제상.
“…송구합네다. 위원장 동지.”
“기라고! 그 돈, 전부 회수도 안 되지 않냐 이 말이야!”
“미제 놈들허구 UN에서 건 대북제재 때문에… 남조선 국고에 귀속된다 합네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외경제상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김정은이 지시하는 대로, 묵묵히 일을 수행했으니까.
진짜 잘못된 것이라고는, 그가 태어난 국가의 위치였을 뿐.
“네놈은 개 짖는 소리는 그만하라! 되찾을 방법이나 가지고 와!”
“고저, 참으로 면목은 없습네다만, 현 상황에서 저희 대외경제성이 손쓸 방법이 없는지라….”
“이 무능한 밥버러지 놈! 당장 꺼지라! 면상떼기도 보기 역겹다!”
어지러운 것인지, 곧바로 털썩 의자에 앉아버리는 김정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그는 연신 탄식을 토해냈다.
“빌어 처먹을 반동분자 놈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초기 지원금 미화 10억 불.
그리고, 기무라 와치루가 온 후 추가로 보낸 미화 10억 불.
총 20억 불이라는 거액이, 공중분해 된 상황.
거기에 장성택 때문에 사라졌던 미화 50억 불 또한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저… 위원장 동지.”
“뭐이야!”
지금, 보위부장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작전명 들개 사냥. 어제 자로 최종 성공했습네다.”
“기래…? 장성택이 그놈을?”
작전명 들개 사냥.
장성택을 납치, 고문하여 정보를 캐내고, 끝내는 잔혹하게 암살하라는 김정은의 명령.
“아예 확실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 영상까지 찍으라 지시했습네다. 위원장 동지.”
“잘했구먼, 기래. 어데 보자고.”
곧바로, 최신의 미제 모니터에서 장성택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제발 그만…!
-이제 좀 말할 마음이 드나?
-애당초 김정은 그 새끼 돼지는 나를 숙청할 생각이 아니었는가, 이 말이다! 으아아악!
손가락 하나씩을 자르는, 잔혹한 고문.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잔인함에 눈을 돌렸을 법했지만 김정은은 달랐다.
“늙다리 놈이 눈치 하나는 빨랐구먼. 그래 봐야, 고기 조각으로 갈려서 돼지 사료나 될 놈이었지만 말이야.”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영상에 집중하는 김정은.
곧바로, 고통에 반쯤 정신이 나간 장성택의 입에서 중요 정보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조국을 배신한 거지? 일본으로 간 방법을 말하라!
-쿨럭! 쿨럭! 해서, 기무라 와치루 그놈이 그러더군.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겠다. 일본으로 가자.
휘청. 탁자에 짚은 손이 미끄러질 만큼 큰 충격을 받은 김정은.
무언가… 그 자신이 알던 세계가 뒤집히고 있었다.
“잠깐. 뭐… 뭐이? 기무라 와치루? 장성택이 놈을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 그자였다고?”
“그것이… 아, 이제 나옵네다.”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김정은의 시선.
헛웃음을 지으며 피를 토해내는 장성택. 곧 다가올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그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가는 길, 전부 말해주지. 김정은이 그 돼지 놈이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지비.
두근, 두근.
북처럼 쿵쾅거리는 김정은의 심장 소리. 그리고, 옆자리에서 그런 그의 눈치를 보는 보위부장.
마침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장성택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자백을 내뱉었다.
-기무라 와치루, 그놈. 남조선 놈이다. 변장을 아주 그럴싸하게 해서, 나도 개성에 있을 때 거하게 속았었지비.
“남조선…?”
남조선이라는 말에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올라오는 김정은.
점점 모이기 시작한 퍼즐 조각.
겉으로 보았던 그림과는 다른, 전체가 모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숨은 그림이 그의 눈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본명은 한서준. 탄약그룹의 회장이지.
자신의 통치 자금, 그 조 단위의 거액을 털어먹은 자가 누구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