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돼지가 뿔났다(1)
상하이, 푸둥 지구에도 새해가 밝아왔다.
그 높은 고층 건물 꼭대기 층을 통째로 쓰던 <상하이 캐피탈>.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과거의 명성은 어디로 간 것인지 사무실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제임스 왕 이사. 술에 절어 벌건 눈의 사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순식간에 손조차 못 쓰고 당했던 건가….”
탄약그룹을 둘러싼, 치열했던 혈투.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을 설정한 후, 잠시 중국으로 돌아갔던 제임스 왕 이사.
그러나, 그사이에 벌어진, 청천벽력 같은 소식.
공들여 지은 모래성은 성난 파도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그 거센 물살이 들이쳤으니까.
“내 형제나 다름없던 이가 한순간에 그리되었을 정도로.”
그리고, 그 파도를 맨 앞에서 앞장서 맞은 이는, 제임스 왕 이사의 오른팔, 옌룽이었다.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주군.’
막 해가 바뀐 한 달 전.
비장한 얼굴로 제임스 왕 이사에게 다가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던 옌룽.
책임. 중국 각지에서도 추가 자금을 조달했던 <상하이 캐피탈>의 멸망에 대한 그 책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감옥 안에서 평생을 지내야 할 정도로.
‘옌룽, 네가 이 큰 책임을 어찌 짊어진다고! 윗선에서 분명히 본보기식의 엄벌을 내릴 것이다!’
그렇기에, 역정을 내며 눈물을 흘리던 제임스 왕 이사.
‘수하에 불과한 네가 책임질 만한 일이 아니다. 차라리 내가….’
‘주군.’
하지만, 제 주인을 생각하는 수하의 충성심은 제법 견고했던 모양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제임스 왕 이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옌룽의 입이 열렸다.
‘주군께서는 살아 계셔야 합니다. 반드시.’
‘…….’
‘그래서… 후에 다시 오르셔야 합니다. 주군께서는 그러실 능력이 되시는 분입니다.’
무어라 말을 꺼낼 새도 없이 곧바로 숙이는 머리.
깊게 큰절을 하며, 옌룽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주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그동안, 저는 잠시 머리를 식히러 휴가를 떠난다 생각하겠습니다.’
‘……!’
불끈 쥔 제임스 왕 이사의 두 주먹.
수하의 일방적인 희생에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일어나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옌룽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는.
‘내년. 내년 말까지는 반드시 내 다시 일어나겠다. 그리고.’
눈물 젖은 얼굴을 한 채, 피 끓는 다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반드시 옌룽, 너를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지금.
자신을 대신해 감옥에 간 옌룽을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제임스 왕 이사.
“옌룽….”
쿵! 유리창을 주먹으로 내지른 그는, 애써 머리를 식혔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다시 웅비하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생각만큼은 냉철하고 또 냉철해야만 했으니까.
“한서준… 아주 악독한 놈이다. 제 놈의 이익을 위해 남한 정계의 판을 뒤집어 버렸다라.”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는 제임스 왕 이사.
매끈한 목재로 조각된 동북아시아 지도. 그는 툭 튀어나온 한반도 옆의 광활한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어쩌면, 자신을 몰락시킨 자가 했던 방법을 이곳 대륙에서 그대로 쓰게 된다면… 비록 적의 병법일지언정, 자신 또한 다시 솟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그 순간.
“이사님.”
기적처럼 찾아온 또 하나의 기회.
뒤늦게 출근한 비서의 말에 제임스 왕 이사가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베이징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십니다만.”
“베이징에서…?”
베이징. 대륙의 중앙이자 권력이 깃드는 곳.
그런 곳에서 패배자인 제임스 왕 자신을 찾을 이유는 없을 터였다. 같은 패배자 라인에 선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거, 꼴이 말이 아니로구먼.”
“장 대인…!”
“이야기는 들었다네.”
장 대인.
한때는 베이징의 노괴라 불렸던, 현(現) 권력자들의 스승을 자처하던 자.
위구르 강제 수용소 사건으로 모든 권력을 잃고 낙향했던 그는, 길게 늘어뜨린 흰 수염을 매만지며 제임스 왕 이사의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한서준, 나를 끌어내린 이에게 자네도 당했다지?”
“…실각하신 후 은둔 중이셨다 들었습니다만.”
“허어, 내 계속 가만히 있을 사람으로 보이던가?”
털썩, 소파에 앉은 채로 기다란 장죽(長竹)을 입에 무는 장 대인.
한때 베이징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그는, 자신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뿔난 망아지 같은 놈들. 제 혈기에 못 이겨 권력에 취한 채, 스승마저 저버리고 말이야.”
한숨과 함께 내뱉는 회한.
비록 권력은 잃었을지언정, 그의 나이 든 눈은 살아 있었다.
젊음 따위 전혀 부럽지 않다는 듯.
“하긴, 나 또한 권력에 취해 있을 때는 총기를 잃었었지.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있는 기분이었으니.”
그리고, 제임스 왕 이사의 얼굴에 닿은 현명함이 담긴 시선.
베이징의 노괴라 불렸던 이의 얼굴에 뜻 모를 웃음이 번져나갔다.
“해서, 자네. 달리 살 방도는 찾았는가?”
“살 방도라. 글쎄요.”
“빼지 말고. 내 아직 사람 보는 눈은 죽지 않았다네.”
팔짱을 낀 채로, 장고하는 제임스 왕 이사.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곧바로 응접실 한쪽에 놓인 바둑판을 탁자 위에 가져다 놓고는 말했다.
“흉내바둑을 좀 두어 볼까 합니다.”
“흉내바둑이라.”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흑색 돌과 백색 돌 두 개를 동시에 두기 시작하는 제임스 왕 이사.
“재계에 있어 정계는 필연적인 것은 익히 아는 바이지만. 놈은 조금 수를 달리 두었습니다.”
툭, 툭.
점차 만들어져 가는 바둑의 집.
손가락 끝에서 놓인 돌들은 하나의 그림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를 패배하게 만들었던, 다른 누군가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림을.
“마치 환격을 하듯, 하나씩 하나씩 작은 수에 제 시선을 고정해 둔 채로.”
“환격이라. 미끼를 내어 주고 큰 고기를 취했다는 겐가?”
“그렇지요. 더 큰 그림은… 남한 대통령 선거에 엮어서 단 한 순간에 집을 가져가는 식의.”
상아로 만든 흑색 바둑돌이 마지막 위치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놓이자, 곧바로 완성된 대국.
장죽(長竹)을 연신 물었다 떼기를 반복하는 장 대인. 바둑판을 바라보며 그가 헛웃음과 함께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자네가 질 만도 했구먼.”
그리고.
“하면, 이제 내가 지은 집을 좀 보겠는가?”
바로 옆, 대륙처럼 커다란 바둑판을 가지고 온 장 대인.
“판을 새로 하세.”
“장 대인…?”
“조만간, 베이징의 핑 주석이 자네 계파인 상하이방을 썰어 버릴 게야.”
바삐 흘러가는 정계 상황.
핑 주석의 태자당. 그에 대립하는 상하이방.
거대한 바둑판에서 벗어난, 줄 바깥에 백색 돌을 하나 둔 장 대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홍콩으로 가세.”
“홍콩… 말입니까?”
“줄 바깥에서 만들어낸 집을 가지고, 다시 이 큰 바둑판 위에 그대로 옮겨보자 이 말이지.”
* * * *
평양, 김정은의 집무실.
“이거이 무신 소리야! 기무라 와치루가 한서준이라고!”
와장창! 김정은의 주먹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 나간 모니터.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 게거품을 물고 있는 이 독재자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 탓에 자신이 본 영상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위부장! 장성택이 저 간나 새끼 말이 사실인가!”
“현재 확인 중에 있습네다만… 정황으로 추측해 볼 때.”
하나하나씩 내밀기 시작하는 증거.
어디서 해킹이라도 한 건지, 남한 정부 기관에서 떼 온 서류 하나하나가 마치 퍼즐 조착처럼 탁자 위에 올려졌다.
“한서준이 놈의 해외 체류 기록. 국정원, 외교부와의 묘한 기류. 최근 탄약그룹 경영권 분쟁 등을 종합해 보자면.”
그리고.
그 퍼즐 조각이 모여 가리킨 그림은 하나였다.
“아마 높은 확률로… 기무라 와치루, 그자는 한서준이가 만든 가짜 신분이라 판단됩네다.”
“이런, 깡끄리 죽탕을 쳐 죽일 개종자 놈이!”
반쯤 오열하는 김정은.
뭔가 친구가 생겼다 믿었는데, 알고 보니 단단히 배신당한 기분이라도 드는 걸까?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의 머릿속에서 나머지 조각들이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남조선 대통령 선거! 여당이 갑자기 대북 자금 어쩌고 나선 것도 설마…?”
“한서준이 놈이 상황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네다. 송구합네다, 위원장 동지!”
털썩, 아무렇게나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김정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장성택이 놈이 가지고 있던 미화 50억 불.”
그가 기무라 와치루. 아니, 한서준 탓에 잃게 된 거액의 금액을.
“그리고, 상하이 떼놈과 한화기 놈에게 10억 불씩 두 번, 20억 불.”
총 미화 70억 불.
한국 돈으로 환산했을 때 거의 9조 원에서 10조 원에 육박하는 거액.
그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에 공중분해 되었다. 고작 가짜 신분증 하나와 세 치 혓바닥만으로.
“그거이 다 사지를 찢어 죽일 종간나 사기꾼 놈이 벌인 짓이라는 기야! 내래 절대 가만두지 않갔어! 보위부장!”
“예! 위원장 동지!”
“장성택이를 돼지 밥으로 만든 암살조! 지금 일본에서 돌아왔는가?”
“내일 다시 귀국하는 예정입네다.”
“그 귀국 당장 취소시키라!”
그리고, 그 치솟는 분노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암살이라는 방향으로.
“바로 남조선으로 보내라! 목표는 한서준이 놈! 반드시 모가지를 썰어 내 앞에 가지고 오게 하라!”
* * * *
인천국제공항.
“고조, 동무는 이거이 가능하리라 보시오?”
비록 급조한 작전일지언정, 어찌어찌 남한 입국에는 성공한 북한 암살조 두 사람.
하급자로 보이는 이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상급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암만 봐도 무리 아니간? 장성택이 놈이야 애당초 철저히 계획한 대로 간 거인데… 지금은 너무 막무가내라 봅네다만.”
“어허, 방정맞은 입 좀 다물라! 사내놈이 무신 말이 그래 많은가!”
덜컹, 준비해 둔 차량에 올라탄 상급자.
조수석에 앉은 그는,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며 하급자를 질책했다.
“위원장님 직통 지시라고 하지 않았나. 안 되면 되게 만드는 거이 우리 원칙 아니던?”
“기래도… 상황이 만들어져야 뭘 하든지 할 거 아니요?”
상황.
장성택 때와는 달랐다.
그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히 동선을 파악하고, 현지 야쿠자의 협조를 받아 성공한 작전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고작 사흘.
단 3일이라는 시간에 급조된 암살 작전은 누가 보더라도 무리수였으니까.
그러나.
“어려울 것 하나 없다. 상황은 만들면 되는 것이니. 그리고.”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제 가슴팍을 두들기는 상급자.
“마침 딱 좋은 날이 있지비. 경찰이고 국정원이고 한서준이 놈에게 시선을 떼는 날이.”
휘잉, 차량이 출발하자 불어오는 늦겨울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
2월의 어느 날짜가 적인 신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취임식. 경찰 측에서는 지방 경찰력을 총동원해 청와대 경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