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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54화 (218/300)

254화 돼지가 뿔났다(2)

꽃샘추위도, 늦겨울의 몽니도 없는, 유달리 포근한 2월의 끝자락.

갓 돋아난 푸르른 잔디 새싹이 인상적인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는, 신임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연단에 선 최 당선자. 아니, 이제는 최 대통령이 된 그의 모습.

전임 대통령의 바지 사장이나 다름없는 그는, 그래도 의전이나 행사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과시욕이 있는 모양이었다.

역대 대통령 취임식 중 가장 번잡하고 웅장한 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검소하군. 이런 것은 좀 본받아야겠는데 말이지.”

“그 무슨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물론,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저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몸소 여기까지 찾아온 빈 살만 왕세자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뭐, 사실 취임식 따위야 관심도 없다네. 신임 대통령도 대통령이지만, 나는 서준 한 회장 자네를 보러 온 것이니.”

귀빈석,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빈 살만 왕세자.

그는 목이 터지도록 열심히 외치고 있는 최 대통령에게는 일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그저 숱이 빼곡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내게 이렇게 말을 던질 뿐.

“제법 멋들어지게 방어해 냈더군. 경영권 말이야.”

“다사다난했지요. 살다 살다 북한까지 갈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빈 살만 왕세자. 그 역시 이번 탄약그룹 경영권 분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오너 리스크에 의한 위기감뿐 아니라, 뭐랄까 이번 일을 하나의 잘 만든 드라마를 보는 느낌?

특히 북한이라는 키워드에 흥미가 동했는지, 그는 김정은 이야기를 연이어 나갔다.

“새끼 돼지가 단단히 뿔이 났겠군. 비록 70억 달러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래도 나름 그쪽에서는 지갑 안에 있던 현금 전부를 날린 것일 테니.”

“뿔이 났다 한들 뭘 어쩌겠습니까. 아직도 기무라 와치루가 누군지 모를 텐데요.”

“하긴, 그야 그렇지. 그러니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고.”

기무라 와치루=한서준.

이 기적의 공식을 모르는 이상, 김정은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있나? 설마 요즘 같은 시대에 암살이라도 할 리는 없으니까.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벌써 선서를 마친 대통령.

김정은 이야기에 함께 키득거리던 빈 살만 왕세자는, 뒤이어 지배구조 관련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해서, 지주사 전환. 거의 완료되었다지?”

“올해 안으로 다 끝냅니다.”

“잘해 보게. 어찌 되었든 탄약그룹이 없으면 사우디군 국방력도 기둥째 뽑혀 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낙타처럼 진한 속눈썹 안쪽의 눈동자로 내게 부담스러운 눈빛을 발사하는 이 양반.

“거기에, 내 사람 보는 눈은 항상 옳았으니까.”

“큰손께서 실망하실 일, 전혀 없을 겁니다.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가슴팍을 두들기며 호언장담으로 답하는 나. 때마침 흘러나온 최 대통령의 연설문 내용이 배경음악처럼 분위기를 깔아주기 시작했다.

-뛰어난 한 사람이 가지고 온 먹거리가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정부는 민간 기업에 아낌없는 협조를 약속하며.

귀에 꽂은 동시통역 장치로 연설 내용을 듣는 빈 살만 왕세자. 그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입을 열었다.

“일단 차기 정부는 단단히 구워삶았군.”

“기존 정부의 연장선이라 보시면 됩니다. 최 대통령 저 양반은.”

멀찍이 보이는 최 대통령의 얼굴.

나는 며칠 전, 당시 기준으로 최 당선인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빈 살만 왕세자에게 대답했다.

“전임 대통령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제게 호의적이니까요.”

* * * *

며칠 전.

‘오! 한 회장님!’

인수위 사무실에 방문하자, 버선발로 복도를 콩콩 뛰어다니며 나를 반기던, 최 당선인.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제가 진즉 찾아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요.’

‘선거 치르시고 뒷정리까지 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요. 이해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내게 고마워하는 듯 고개를 숙이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이게 다 한 회장님 덕분입니다. 저희 쪽 선거 전문가들이 프로그램 돌리고 다 했는데… 마지막 그 북한 자금 문제가 변곡점이었다네요.’

숙부가 야당 후보 지지 선언 하던 그날. 곧바로 생방송 카메라에 잡힌 체포 모습.

그 모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북한 자금 문제가 있다는 말에, 일반 대중들은 이를 숙부의 문제를 넘어 야당 후보의 문제로 인식했으니까.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그, 숙부분 관련된 일은 다 한 회장님 뜻대로 하라고 법무부 장관에 일러두었으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양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잡던 최 후보자.

상기된 얼굴의 그는 손익 계산보다 좀 더 순수한 호의로 나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대통령 각하 말마따나 한서준 회장님하고는 좋은 파트너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5년,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취임식에 꼭 와주세요. 연설에 제법 신경을 많이 썼으니까.’

그렇게, 나를 좋게 본다는 신호를 아낌없이 팍팍 주었던 최 당선인.

그리고 지금, 연이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는 연신 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조금씩 섞여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모범적인 기업인들의 경제 활동을 폭넓게 보장할 것입니다. 특히나, 방산 분야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척하면 척이라고, 벌써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는 피식 웃음 짓는 빈 살만 왕세자.

“이거, 한 회장 돈 버는 소리가 절로 들리는군.”

“탄약그룹 우선주 지분 어마어마하게 가지신 분이 그런 말씀 하시기 있습니까?”

“어차피 그중 일부는 자네 아내 될 사람 지참금으로 보낼 생각이네만?”

“……?”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때 말했던 그 막내 여동생? 여덟 살이었다는 그 꼬마?

“이제 열한 살이었나, 열두 살이었나? 아무튼, 그렇다네.”

“아니, 그게.”

“괜찮아. 부끄러워 말게. 원래 정략결혼이 더 행복한 법인 것이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 가는 이 사우디 큰형님의 웃음.

그리고, 새까맣게 타는 사람 속도 모른 채, 옆자리에 앉은 재계 인사들은 한마디씩 거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가 일찍 가고… 시집 일찍 가고… 그래야지 이 대한민국이 건강한 나라가 되어서… 북진 통일을… 으잉? 쿨럭쿨럭!”

김범호의 할아버지, 연로하신 T 그룹 명예 회장의 나라 걱정과.

“허허허, 한 회장님은 여복이 많아서 좋겠어요. 기다리고 있는 꼬마 공주님도 다 있고. 난 벌써 두 번이나 이혼했는데.”

SA 그룹 임재호 회장의 뼈 있는 농담까지.

그렇게 난감한 주제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바로 그때.

“회장님. 잠시만, 잠시만요.”

“아, 김 비서실장님.”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이 정략결혼 아닌 정략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만든 김원철 아저씨의 모습.

“마침 잘 오셨네요. 이게 다 그때 사우디 왕궁 연회에서 누가 술에 취해 내뱉은 말이 태풍이 되어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공석이라서인지 내게 존댓말을 하는 김원철 아저씨. 그런데, 유독 오늘따라 차분한 모습이다.

존댓말을 하더라도 평소의 가벼운 모습은 그대로인데 말이지.

“무슨…?”

그리고, 오늘따라 유독 묵직한 김원철 아저씨의 모습은, 뒤이은 귓속말로 인해 그 이유가 명확해졌다.

진지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구미 화약공장… 화재 때문에 난리입니다. 여기 끝나는 대로 바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 * * *

-쾅!

구미, 탄약그룹 화약공장.

매캐한 연기가 타오르는 공장 지대. 시뻘건 불씨가 모든 것을 삼키려는 지금, 산자락에서 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내가 있었다.

“히야. 거, 활활 잘도 타는구먼, 기래.”

망원경을 들고서 흐뭇한 얼굴로 이 참담한 현장을 보고 있는 북한 보위부 요원.

“내가 지른 불씨지만 기가 막히네. 아니 그렇습네까?”

“어허, 들뜨지 좀 말라. 너 지금 여기 소풍 왔간?”

하급자 요원을 진정시키는 상급자 요원. 미끼라고 할 수 있는 화재를 일으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본 게임이 남은 상황.

“아, 들뜬 거이 아니라…!”

“시끄럽다! 침착하는 거이 우선이라. 가서 지도나 가지고 오라.”

“크흠, 알갔시오.”

바위 위에 펼쳐진 지도.

사인펜을 손에 쥔 상급자 요원은 도로망이 자세히 그려진 지도 여러 곳에 동그라미 몇 개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세 군데 모두 괜찮긴 하지만, 아마 마지막 지점이 제일 쏴 죽이기 좋지 않간?”

“여기라면… 쏘고 바로 공항까지 내달리면 되갔습네다.”

“산 넘어서 대구만 들어가면 아무도 모른다. 좀만 고생하면 되는 기야.”

구미 화약공장에서 산악구보로 뛰어, 대구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3시간. 빠져나가기에는 최적의 시간.

어차피 일본 가짜 여권으로 입국한 두 사람이니만큼, 출국에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급조했지만, 나름 탄탄하다고 할 수 있는 계획.

그러나.

“그런데, 동무.”

걱정되는 얼굴로 조심스레 상급자 요원에게 물음을 던지는 하급자 요원.

“뭐이?”

“한서준이 말입네다. 그놈이 여기 확실히 오긴 오는 겁네까?”

“온다. 무조건.”

“무슨 이유에서입네까? 윗대가리가 무신 일 났을 때, 자기는 뒷짐 지고 아랫것들 시키는 거이 당연한 것인데.”

화마(火魔)가 공장을 집어삼키는 것이야 끔찍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현장에 최고 경영자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타당한 하급자 요원의 물음.

하지만.

“쯧쯧쯧, 너는 보위부에서 교양할 때 뭐이 들었니? 한서준이 그놈이 어떻게 회장 자리 앉았는지 기억 안 나나?”

“그거이, 저는 현장파라 잘 모릅네다. 아, 뭔데 그럽네까?”

역린, 용의 비늘.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발작 버튼 같은 무언가.

이들 보위부 요원에게 정보를 준 북한 당국은 알고 있었다.

탄약그룹, 그 회장 자리에 앉은 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역린이 무엇인지를.

“제 아바이 되는 사람이 요 화약공장 시찰 가다 폭발로 죽어버렸지 않던?”

“아아…!”

“무조건 온다. 그리고, 여기 진입하는 바로 그 순간.”

바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바닥에 놓인 케이스 하나를 꺼내 드는 상급자 요원.

케이스 안쪽, 묵직하고 서늘한 금속 덩어리인 저격용 총 한 자루.

손가락만 한 총알을 장전하며, 그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하던 말을 연이어 나갔다.

“한서준이 놈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 버리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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