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262화 (226/300)

262화 비트코인(1)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로 쓰이던 지금 이 공간에는 뭔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슨 인터넷 방송 전용 스튜디오라도 되는 것처럼, 의자 뒤쪽에 길게 늘어진 초록색 천. 버튼 하나만 누르는 순간, 기괴함과 중압감이 느껴지게 하는 각종 조명 장치까지.

햇빛이 들어오는 것조차 암막 커튼으로 전부 감춘 이 기괴한 공간 속. 이마에 가시 면류관을 드리운 천사 가면을 쓴 나는 엄중한 목소리로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임스 왕 이사, 그대는 계속 맡은 바 업무에 집중하시길. 모든 것이 끝날 영광의 그날, 새로운 세계가 찾아올 것입니다.”

모니터 화면 아래 조그마한 창으로 보이는 내 모습.

검은색 양복 위에 뒤집어쓴 천사 가면의 붉은 눈물 자국이 오늘따라 유독 으스스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속에서 감격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한 사람.

-감사합니다! 그저 천사 가면 회장님만 믿고 또 믿겠습니다!

그는 제임스 왕 이사였다.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마치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내게 충성 맹세를 연달아 이어나가는 이 사람.

-천사 가면 회장님께서 만드실 코인 제국! 반드시 제가 그 주춧돌을 쌓아 올리겠습니다!

“그, 그럽시다. 그 높은 의욕, 부디 끝까지 간직하시길.”

삐빅, 기계음과 함께 종료된 영상 통화.

까맣게 변한 화면. 나는 곧바로 이 땀내 나는 가면을 책상 위에 벗어 던지고는, 그대로 기지개를 켰다.

“후우, 목소리 낮게 까는 것도 못 해 먹겠네. 거기에 무슨 대사도 사이비 종교 교주 같고.”

그리고, 딱 끝나는 이 시간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소파에서 내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음을 참던 김원철 아저씨가 수문이 열린 것처럼 웃음소리를 방출하기 시작했으니까.

“히야,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마카오 카지노의 천사님이구만. 흐흐흐.”

“어떻게, 좀 그럴듯해 보입니까?”

“흐흐흐, 연기 실력이 아주 예술이여. 옛날 이택규 전 사장이 개박살 났던 이유를 알겠다니까.”

사실 그때 마카오 카지노에서 이택규 사장이 개박살 났던 것은 여기에 유세나 보좌관의 토끼 가면도 한몫 단단히 했었다.

물론, 지금 유세나 보좌관은 여기 없다. 가면만 봐도 어지간히 학을 떼서 말이지.

“그리고, 세상에나. 한 가지 더.”

손가락을 튕기며 호들갑을 떠는 김원철 아저씨.

짜잔, 내 앞에 펼쳐 보이는 비트코인 차트. 잠깐 안 보고 있는 새에 또 올랐다. 구름처럼 광기를 몰고 오면서.

“그때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비트코인이 이렇게 되다니. 하여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여.”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유동성 펌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아, 맞다. 찌라시 살포 지시는 일단 해 놓았어.”

찌라시.

슬슬 민간에도 비트코인이라는 존재가 알려지는 상황.

아직은 경제신문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기사로 나올 정도였지만.

“반응 보니까, IT 쪽 관심 있는 일반인들은 가상화폐에 대해 이래저래 떠드는 모양이여.”

곧바로 내 눈앞에 대령된, 모 투자 관련 대형 인터넷 게시판.

-코인 아직 안 하는 흑우 없제? 야수의 심장으로 홍콩 거래소 계좌 팠다.

-아, 늦게 들어가면 남들 먹고 남은 거 설거지나 하는 거라고. 뽀드득뽀드득.

그 익명의 아수라장을 보자니,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첫 물꼬는 잘 트였네요. 이다음부터는 관리만 하면 되겠습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예정된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며.

“욕망의 불꽃에 몸을 부딪치는 불나방처럼 모두가 스스로 이 판에 들어올 테니까요.”

그리고, 그 욕망의 불꽃에 몸을 던지는 이들은 비단 개미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거대한 기관 투자자. 그것도 서해 바다 건너 홍콩에 모인, 이들까지도 넋을 잃고 빠져들 것이 분명하니까.

“지금, 홍콩에서 천사 가면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제임스 왕 이사까지도 말이죠.”

“보니까. 장 대인, 그 양반. 어지간히 여우이긴 하드만.”

탄약그룹 홍콩 주재 정보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추려 내게 보고하는 김원철 아저씨.

장 대인, 베이징의 노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맡은 일을 잘해주고 있었다.

“제임스 왕 이사 옆에서 살라당 살라당 긁는 게 아주 기가 막힌다니까? 특히, 요 아이디어.”

가까이 있는 이의 등 뒤에, 느끼지 못할 깊이의 칼을 찔러 넣는 일을.

“가상화폐 선물거래. 우리 회장님이 말했던 마지막 폭탄을 어떻게든 조립하려고 애를 쓰더만.”

가상화폐 선물거래라는, 독이 발린 칼.

바로 어저께, 그 독 발린 칼을 내게 건네받은 장 대인은 전화기 너머로 감탄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선물거래? 하! 이 사람, 홍콩 한복판에 초대형 폭탄을 터트릴 생각인 겐가?’

무지막지한 위험성을 자랑하는 선물거래.

그리고, 무지막지한 변동성을 자랑하는 가상화폐 거래.

대량 매물을 가진 주포의 의중을 안다면, 정말 하루아침에 조 단위의 금액은 우습게 벌 수 있다.

물론, 나는 반대로 제임스 왕 이사에게 조 단위의 손실을 안겨줄 생각이지만.

‘음….’

내 설명을 모두 들은 장 대인.

전화기 너머로 흰 턱수염을 비비 꼬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는 나름 흥미진진하다는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하긴, 폭탄이 터진들 피해 볼 놈은 제임스 왕 이사와 김정은 두 놈이니, 나야 아무런 상관도 없지.’

* * * *

홍콩, 주룽반도의 대형 성당.

동쪽에서 쏟아지는 오전의 환한 햇빛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긴 나무 의자에 닿았다.

-주께서 구원하시는 자는 믿음이 깊은 어린 양이라, 바라건대 주여! 이 죄인이 목자의 발자국을 따라가게 하소서!

그리고, 그 나무 의자에 앉은 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제임스 왕 이사.

-설령 절벽 끝으로 인도하시어도 의심하지 않겠나니,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 어설픈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장 대인. 신부의 미사가 끝남과 동시에, 그는 이제 막 눈을 뜬 제임스 왕 이사에게 핀잔을 주듯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돈놀이하는 사람이 성당이라니, 이거야 원, 생전 안 하던 짓도 다 하는구먼.”

은은하게 들려오는 성가대의 노랫소리를 배경 삼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제임스 왕 이사.

“머릿속이 복잡해서 말입니다. 잠시 마음 기댈 곳이라도 있는 편이 나을 테지요.”

“기댈 곳은 무슨. 그저 현실을 직시하는 게 답일 터.”

끼익, 경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간 신도들.

두 사람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인 담당 신부가 자리를 비워 주자, 그제야 장 대인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상하이방 쪽 자금. 닥닥 긁어 왔네. 우리도 남는 건 있어야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 무슨 그런 헛소리를.”

가상화폐 선물거래, 독사의 혓바닥이 가리키는 그 탐스러운 사과와도 같은 본론을.

“당연히 위험하지. 선물거래에 가상화폐까지 결합한 걸세. 위험하다는 건 갓난쟁이도 알 일 아니겠나?”

“그렇다면 역시 그 부분은 재고하심이 어떠실지….”

“하지만.”

강하게 압박하듯 제임스 왕 이사의 양쪽 어깨를 움켜쥐는 장 대인.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는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서 배워 온 것을 그대로 내뱉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미 자네 어깨 위에 위험은 덕지덕지 붙어 있지 않은가.”

“…….”

“거기에 하나 더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제 와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가상화폐를 거래하는 것만으로는 괜찮았다. 하지만, 선물거래가 합쳐진 이상, 금융 당국에서도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였다.

홍콩 당국뿐이 아니라, 실제로 가장 두려운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본토의 당국에서도.

“대륙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성공한다면 상관없겠지.”

“실패한다면…?”

“하! 이보게, 이미 자네는 실패한 사람이네.”

듣는 이의 감정 따위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장 대인. 그리고, 그 거센 발언을 듣고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제임스 왕 이사.

“음….”

우연의 일치인 걸까?

분명, 얼마 전 천사 가면을 쓴 인물도 제임스 왕 이사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내뱉었었다.

‘실패를 떨쳐낼 기회는 그리 쉬이 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꼭 자신을 가리키는 것만 같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곱씹는 제임스 왕 이사.

“실패한… 인생.”

“그래. 실패한 인생. 이젠 복구해야겠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지?”

“…….”

목을 휘감은 뱀의 달콤한 말에, 조금씩 흔들리는 그의 한쪽 손.

금단의 사과나무를 향해 느릿느릿 뻗어 나가는 손아귀에, 마침내 잘 익은 황금색 사과 하나가 들어왔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는 사과가.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래, 그래. 잘 생각했네.”

뎅그렁, 정오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때마침 사라진 스테인드글라스 너머의 햇빛.

해일처럼 밀려온 먹구름과 함께 소나기가 내리자, 어두운 실내에 번개 한 줄기가 번쩍였다.

포근하기만 한 것처럼 보이던, 천사 그림의 색유리를 을씨년스럽게 비추며.

“후우… 천사라는 족속은 죄 섬뜩하게 생겼나 보군.”

* * * *

같은 시각. 뉴욕, 월 스트리트.

“Holy Shit…! 이봐, 이것 좀 봐봐.”

“무슨 일인데 갑자기 먹던 것도 질질 흘리고 그래? 음…?”

모니터 화면에 눈을 고정한 금융인 두 사람.

“뭐, 뭐야, 이 차트! 어디 후진국 주식인가? 아니면, 파생상품? 원자재?”

“아니, 전부 틀렸어. 비트코인이라고 들어는 봤나?”

“비트코인… 그래, 그 괴상한 가상화폐. 그게 그 몇 달 사이에 이렇게 오르고 있다고?”

“그냥 오르는 정도가 아니야. 이것 봐봐.”

심상치 않게 공급되기 시작하는 유동성. 이제 비트코인은 더 이상 찻잔 속의 태풍만은 아니었다.

“God Damn! 벌써 일반인들도 슬슬 알기 시작했군. 이거 조금만 더 늦게 들어가면 못 먹겠지?”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고 봐야지. 어어…!”

삐! 삐! 괴이한 음을 내며 울리는 투자 전용 단말기. 차트는 태풍이 부는 바닷가에서 출렁이는 파도처럼, 거센 등락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또 오른다! 이번 파동은 뭔가 심상치 않아!”

“안 되겠다. 자네 거기 딱 붙어서 이제까지 가격 변화 데이터 좀 뽑아놓고 있어 봐봐.”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본부장 불러와서 즉석 브리핑이라도 해야지! 이건…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니까!”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

홍콩에서. 아니, 정확히는 한국에서 불어온 그 기회의 파도에 올라타려는 월 스트리트의 금융인. 그가 눈을 밝히며 큰 소리로 외쳤다.

“디지털 황금! 지금 그게 우리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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