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비트코인(2)
가면 놀이는 생각보다 재미있다.
정체를 숨기고 익명으로 누군가를 대하게 되면, 거기서 신비함 비슷한 것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했습니다. 훌륭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임스 왕 이사 정도 되는 사람마저 잔뜩 긴장한 채 말을 더듬을 정도로.
“계속 그렇게 유동성을 공급하시면 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가 가진 시장의 통제력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그, 그래야지요. 만져도 될 것이 있고, 감히 만져서는 안 될 것이 있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리는 압도적인 존재감.
나는 그 존재감을 이용해 밑밥 하나를 던졌다.
“특히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은 당분간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가령.”
제임스 왕 이사가 한참 고심 중일 터인 그 단어 하나를 툭 던지면서.
“선물거래라든지.”
-……!
당황한 모습이 얼굴에 잔뜩 서린 제임스 왕 이사. 한참을 말을 잃은 그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일었다.
물론, 나는 그저 모르는 척, 의뭉스러운 물음 하나를 툭 던질 뿐이었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말씀이 없으십니다만.”
-하하… 하, 아닙니다. 잠깐 통신 상태에 오류가 나서….
어설픈 변명과 함께 화제를 돌리는 제임스 왕 이사.
반응을 보니 확실했다. 이 사람, 분명 선물거래라는 파리지옥에 스스로 발을 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달콤한 향기에 취해 발 한쪽을 내딛고.
“여하간에, 제임스 왕 이사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니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당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황금을 쫓아다니다 보면.”
종국에는… 그 끈끈한 안쪽에 날개가 엉킨 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터.
“처음에 세워둔 거대한 그림이 하나둘씩 일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물, 물론입니다. 전적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혀 신뢰가 담기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제임스 왕 이사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네었다.
부디 스스로 지옥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기를 속으로 바라며.
“믿겠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하시길.”
* * * *
뚝, 묘한 맺음말과 함께 종료된 천사 가면 회장과의 영상 통화.
화면이 까맣게 변하자 한숨을 내쉬는 제임스 왕 이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눈치를… 챈 건가?”
덜덜 소리를 내며 의자 위에서 진정될 줄을 모르는 그의 두 다리.
사시나무 떨리듯이 위아래로 부들거리는 허벅지를 손아귀로 꼭 움켜잡고는, 제임스 왕 이사는 차분함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내뱉었다.
“후우… 아니. 차라리 경고 쪽에 더 가까울 터. 하지만, 해야만 한다. 반드시.”
늪에 빠진 것처럼 그의 온몸을 감싸는 찝찝한 기분. 그러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당장 몸에 묻은 진흙 따위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시간이… 없으니까.”
설령, 그 진흙이 목젖까지 차올라 조용히 숨통을 막아버린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때, 잔향처럼 남은 막연한 불안감마저 갑자기 날아가게 만든 한 사람.
“자네, 지금 있는가?”
노크도 없이 곧바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그자는 장 대인이었다.
“아, 장 대인. 오셨습니까?”
“크흠, 문제가 있어서 말이지.”
“문제요…?”
“받아보게.”
대뜸 소맷자락에서 꺼내어 내민 휴대전화 하나.
액정이 켜진 그 휴대전화 스피커에서는, 연신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진짜 분노가 아닌, 지극히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노가.
-언제 갚을 거이야! 확실하게 말을 하라!
“위원장님…?”
-너이 떼놈 새끼. 모가지가 통째로 썰리고 싶은 기야! 왜 아직도 무거운 궁둥짝을 문데고 있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정은이었다.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움켜쥐고서 눈을 질끈 감는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일단 이 광포한 독재자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위원장님. 아직 투자하신 자금이 채 집행되지도 않았습니다. 비트코인은 곧 활황을 맞이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아니! 그기 말고!
물론 그 시도는.
-일전에 탄약그룹 죽탕을 치겠다며 뜯어간 내 돈! 이자까지 쳐서 미화 100억 불은 언제 보낼 긴데!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말아버리게 되었지만.
“…….”
끄덕, 옆을 보니 답이 없다는 눈치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장 대인.
‘새끼 돼지가 억지를 부리는군… 알면서도 이러는 것인가.’
제임스 왕 이사 역시 그 모습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순간에도 김정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빨리 답하라! 내래 이번에도 떼인 돈을 못 받거든, 네놈과 네놈 가족을 장성택이처럼 팔다리를 썰어서 도야지 밥으로 주갔어!
미간에 깊은 밭고랑이 진 제임스 왕 이사. 결국, 이 몽니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진정하시지요. 위원장님.”
바라는 금액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는 것밖에.
“이번 가상화폐 건. 큰 한 방이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큰 한 방?
“예. 조만간… 수확의 계절이 찾아오게 되면, 모든 밀린 채무 또한 단 한 방에 갚겠습니다. 부디 믿어주시지요.”
그리고, 그 방법은 아주 유용했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는 김정은.
-내래 많이 참았다는 것, 똑똑히 기억하라! 저번 것에 이자까지 합쳐서 이번에 미화 300억 불, 반드시 만들어 오도록!
뚝, 곧바로 끊긴 전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제임스 왕 이사가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미친놈이….”
“후우, 그리되었네. 새끼 돼지 놈이 아주 방방 뛰더군.”
난감하다는 듯한 말투의 장 대인.
그러나, 그는 곧바로 얼굴에 미안함을 지워버렸다.
그저 가면에 조악한 웃음 그림을 그려 넣고는, 제임스 왕 이사에게 달콤한 속삭임을 지저귈 뿐.
“아니지, 차라리 잘되었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찌꺼기를 돼지 놈이 날려 버렸다고 봐도 무방하니.”
그를 끈적한 늪으로 빠지게 할, 자신감을 북돋우는 진격 나팔을 몸소 불어가며.
“슬슬 시작해 보자고. 천사 가면 몰래 벌이는, 가상화폐 선물거래라는 위대한 쇼를.”
* * * *
그 시각.
팔자에도 없는 천사 놀이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나를 찾은 서희 누나.
제임스 왕 이사가 천사 가면이라는 가공의 인격체 몰래 선물거래를 시도할 것이라는 말에, 서희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꼭 게임 속 등장인물 같네.”
꺼진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가는 서희 누나.
“실상은 마우스와 키보드 몇 번 움직이는 것에 조종당하면서도, 스스로 조종당하는 줄도 모르잖니.”
“뭐, 결국 내가 짠 판이니까.”
딸깍, 서랍을 열어 체스판을 꺼낸 나. 마호가니 원목 체스판 위에, 나는 상아를 깎아 만든 말을 하나씩 올려놓았다.
킹, 퀸, 나이트나 비숍 같은 중요한 말부터, 한낱 변경을 지키는 말단 병졸인 폰까지.
“모두가 하나의 체스 말이 되어 움직이는 거지. 제임스 왕 이사나 장 대인도. 그리고, 김정은까지도.”
유독 뚱뚱하게 조각된 킹 말.
나는 위의 십자가 모양을 손끝으로 잡아 쥐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임스 왕 이사와 영상 통화를 나누기 몇 시간 전, 다른 이와 나누었던 음성 통화의 기억을.
-북한의 윤정호 대외경제상 되십니까?
홍콩 현지의 탄약그룹 정보팀의 실력은 제법 뛰어났다.
북한의 대외경제상이 있는 호텔에 벨보이로 잠입해 들어갔을 정도였으니까.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피할 수 있었던 건지, 우리 정보팀 직원은 윤정호 대외경제상에게 접근해 휴대전화를 건네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직접 통화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옥신각신하는 듯한 목소리.
약간의 실랑이가 있던 후, 주저하던 대외경제상은 마지못해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크흠, 윤정호요. 그… 천사 가면 회장 되십니까?
물론 천사 가면이라는 가짜 신분을 대하기 위해서.
‘목소리가 태평하십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걸 모르시지는 않을 테고. 아니, 어쩌면 이런 겁니까?’
시간이 많지 않기에 본론부터 곧바로 내뱉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쏘아붙이듯 다짜고짜 꺼내어진 험한 말의 향연.
‘그저 체념. 체념뿐이신 건지요? 어차피 김정은이 몽둥이를 들고 내려칠 날을 기다리는 한 마리 개에 불과하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그 직진에 가까운 말 폭탄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이 잘 풀리면 그저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고, 일이 꼬이게 된다면.’
어차피,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전부 사실에 기반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신 집안 전체가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쉽게 던질 수 있는 제안 하나. 아니, 숨은 제안까지 합해서 두 개.
‘김정은의 자금 상황. 간단하게 요약해서 넘겨주시지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그렇다면…?’
‘비트코인이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당신과 당신 가족은 휴전선 남쪽으로 내려와 살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명시적인 제안인 탈북과 보호.
대외경제상은 나름 현명한 사람인 듯했다. 그는 내 말의 행간에 숨은 묵시적인 제안까지 끄집어낼 줄 알았으니까.
‘천사 가면 회장님께서는… 가상화폐 시장이 비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김정은을 거쳐 제임스 왕 이사에게 압박을 넣으라는 신호를.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것 따위는 어차피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알맞은 행동을 하면 될 뿐.’
회상을 마친 나.
머리를 잠시 쉬게 하려고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이는데, 서희 누나가 내게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모든 이들이 체스 말이라니. 하여간, 서준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아무도 안 믿었을 거야.”
“뭐, 그렇지. 그나저나 슬슬 홍콩 쪽에서 시작했다고?”
즉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서희 누나.
곧바로 자료 화면과 함께 감상평 하나가 곁들여졌다.
“통제되지 않는 욕심이… 광기로 치닫는 모습이야.”
“그러면, 이제부터 나는 그 광기를 다른 쪽으로 돌리면 되겠네.”
광기.
다른 말로 치환하자면, 대중들의 열광을 입은 막대한 유동성.
그 유동성은 곧 가격을 만들어 내었다. 과거, 이 시기보다 몇 년은 훌쩍 지난 때에나 만들어진, 비이성적인 버블의 가격을.
-20,000 USD/1비트코인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자. 여유 자금으로는 비트코인 숏 포지션을 잡아 줘, 그리고 현재 보유 중인 비트코인 전액.”
이 버블을 가뿐히 뭉개버릴 것이다.
절규에 찬 비명과 함께 꺼진 거품 속에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막대한 이익을 남긴 채로.
“지금 이 시간부로, 시장가에 전부 던져버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물론… 그 절규에 찬 비명을 지르는 이들 속에는, 제임스 왕 이사와 김정은, 두 사람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