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정은쿤(3)
전에 왔을 때는 몰랐는데, 성북동 상왕의 자택은 널찍한 뒷마당이 따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야트막한 언덕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지하 통로를 따라 비밀의 문을 열면, 북한산 녹림 한가운데의 제법 평평한 공간이 넓게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이야기는 들었네. 요새 호재와 악재가 동시에 왔다지?”
붉은색 플라스틱 접시를 멀리 던져 복실이에게 물어 오게 하는 성북동 상왕.
참, 이 양반도 이런 것을 보면 열정적이다. 환갑도 넘은 나이에 이렇게 정정하게 육체 활동을 다 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셨는데도. 돌아가는 일은 잘 보고 계시네요.”
“그래야 상왕 노릇하는 것 아니겠나. 아무튼, 축하부터 함세. 대한민국 최고의 거부가 된 것 말이야.”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내게 손을 내미는 성북동 상왕. 나는 장갑 낀 그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뭐, 감사합니다. 사실 딱히 달라졌다 느낀 건 없지만요.”
“그럼 달라지게 해야지. 좀 즐기면서 살게나. 아직 젊은 친구가 무슨 그렇게 운동선수처럼 뛰는 데에 정신이 팔리고 그러나?”
적당히 땀을 뺀 모양인지, 다시 자택으로 돌아가자는 성북동 상왕.
편백 나무로 촘촘하게 짜인 지하 사우나 안. 유리창 너머의 TV 화면 속 크루즈선이 인상에 남았는지, 그는 내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요트 하나 사는 건 어떤가? 외국 갑부들 보니까, 선상 파티 같은 것도 열고 하던데.”
“임기 때 사치품 중과세 추가로 거신 분이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이제는 딱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슬슬 본론을 말하는 게 어떻겠냐는 성북동 상왕의 눈초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운을 떼기 시작했다.
“경찰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파티를 열면,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기관총을 들고 찾아올 것 같아서 말이죠.”
“하! 그야 그렇지. 공해(公海)는 곧 무법지대이니.”
치익, 뜨거운 맥반석 위에 물 한 컵을 뿌리자, 곧바로 사우나를 가득 메우는 수증기.
퍽 만족스러운 얼굴의 성북동 상왕. 이미 국정원장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그는, 내게 본격적인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김정은이가 자꾸 우리 한 회장 자네에게 애정 공세를 하더군. 집착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는 법이거늘.”
“칼 들고 집 앞에서 기다리는, 그런 애정이라면, 공손하게 반품 신청하겠습니다.”
“거절이면 또 모를까 반품은 불가능하지. 이북에 있는 김정은이에게 어떻게 칼을 보내려고?”
칼이라.
하기야, 이 양반은 아직 모르겠지.
내 목숨을 노리는 김정은, 그 새끼 돼지를 내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를.
그리고, 그 생각은 나도 모르게 내 입가의 미소로 표출된 모양이었다.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성북동 상왕.
“뭔가? 그 묘한 웃음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뜨거운 사우나를 마치고 난 후, 다시 서재로 자리를 옮긴 후에야 입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다 읽었는지, 탁자 위에서 책장 한쪽으로 자리를 옮긴 그때 그 책, <총, 균, 쇠>.
서가에서 그 책을 뽑아 들며, 내가 말했다.
“예전에 말입니다. 제가 이 책, <총, 균, 쇠>를 보고 드린 말씀. 혹시 기억하십니까?”
“가만있자. 그게 아마도.”
기억을 더듬는 성북동 상왕.
“아아! 돈, 핵, 뽕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돈 하나는 이루었구먼.”
“어디 하나만 이루겠습니까? 셋 다 해야지요.”
“허허, 난 그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잠깐만.”
뭔가 싸한 느낌을 받았는지, 짓고 있던 너털웃음을 갑자기 거두는 성북동 상왕.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한 회장. 자네 설마…?”
“제가 어디 허튼소리나 하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까?”
<돈, 핵, 뽕>.
벌써 하나는 해 보았으니… 나머지 두 개도 분명 할 수 있을 터.
이심전심이라고, 내 마음이 통하긴 한 건지,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는 성북동 상왕.
“허허허… 무, 무슨, 그렇다면 정말로 김정은이를?”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나, 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내가 물음을 던졌다.
“김정은이 급사하고, 북한이 무너져 내린다면… 그때는 정치권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 같습니까?”
“자네, 그 무슨…!”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묻겠습니다.”
남은 두 가지, 핵과 뽕.
그것들을 모두 이루어냈을 때 생기는 후폭풍. 그것을 정치적으로 처리할 방법이 있을지를.
“그런 비상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움직이실 겁니까? 이 나라의 실권자로서.”
* * * *
틱, 틱, 벽 한쪽을 차지하는 괘종시계의 추 움직이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운 지금.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성북동 상왕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한의 붕괴라. 이거 적잖이 당혹스럽군. 물론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쉬이 대답하기 힘든 내용.
그렇기에, 그는 천천히 손가락 두 개를 펼치고는 각각 좌우를 가로막을 장해물들을 언급했다.
“그 형태가 점령이든, 혁명이든, 아니면 제3의 무언가가 되었든 간에, 두 가지는 확실하네.”
“무슨…?”
“첫째, 피를 볼 수도 있다는 것. 가능한 한 전면전은 피해야겠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최단 시간 내에 최소 피해로 끝을 봐야 하고.”
옳은 말이다. 나 또한 한반도에서 대규모 총력전이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내 욕망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고 죽어 나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돈이지. 수백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최단기간 내에 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갈 걸세.”
“수백조 원이라….”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
그나마 이건 흘리게 될 피의 양에 비하면 낫다.
수백조 원이라는 비용은 엄청나게 많은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자금으로 일부 해결할 수도 있기도 하고.
물론 자원 개발이나 토지 매입 형식이 되겠지만.
“다른 부수적인 문제는요?”
“그야 차차 해결해 나갈 일이겠지. 정치, 행정, 교육, 문화 등등…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성북동 상왕.
마치 불가능한 것에 대해 언급하기라도 하듯,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두 가지 문제는 시간도 해결하지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아니요. 두 가지 문제 모두 쉬운 일일 것 같습니다, 생각하신 것보다.”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을 들어서일까? 잠시 아무런 말이 없는 성북동 상왕.
너무나도 쉽게 단언한 내 모습에, 그는 반쯤 얼어붙은 얼굴로 내게 반문했다.
“뭐라고…?”
“피와 돈. 두 가지 모두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짜 놓은 판 위에서 모든 것이 움직인다면 말입니다.”
물론… 지금 내뱉은 말은 허세가 아니다. 애당초 이곳 성북동에 오기 전부터, 충분히 가능하다 마음먹은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으니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는 이야기보따리에서 차근차근 근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핑 주석에게 대북 사업 독점권을 따냈다는 것쯤은 이미 들으셨겠지요? 개구멍 관리자 직책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분명 그랬었지. 설마! 그게 이번 일을 위한 사전 포석 역할을…?”
끄덕, 위아래로 고개를 저은 나.
벽 한쪽에 그려진 한반도 지도를, 그것도 휴전선 너머 북쪽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확신에 찬 말을 내뱉었다.
“돈, 핵, 뽕. 돈줄은 죄어 놓았으니… 이제부터 나머지 두 개를 처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래저래 자주 뵙겠네요.”
* * * *
중국, 베이징. 정치의 중심지 중난하이.
돋보기를 끼고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핑 주석. 그는 손가락 끝으로 붉게 밑줄이 그어진 숫자를 가리키며,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화로 160조 원에서 170조 원 사이라. 안전자산에 넣고 있어도 금방 200조 원까지는 불어나겠군.”
“아무래도 그 남조선 기업가 놈에게 이익으로 준 것이 과한 것 같습니다!”
탐탁지 않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드높이는 내무부장.
“대(大) 중화의 윤허 없이는 벌지도 못했을 돈. 마땅히 절반 이상은 세금으로 떼어야지 않겠습니까?”
핑 주석의 측근인 그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하나둘씩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에, 장 대인. 그 노괴까지 싱가포르로 빼돌리고… 한서준, 그 어린놈은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물론.
핑 주석은 그런 그의 불만을 말 몇 마디로 일축해 버리고 말았지만.
“쯧쯧쯧, 자네는 여전히 셈이 흐리군. 좀 넓게 볼 줄도 알아야 하거늘.”
“주석 각하…?”
“아직도 모르겠나? 한서준, 그자가 상하이방의 자금줄을 말려버린 후에 따라온 파급 효과를?”
용이 조각된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 자금성 풍경을 눈에 담는 핑 주석.
중화 대륙의 모든 것을 안겠다는 양, 양팔을 쫙 벌린 그는 숨을 들이쉬고는 하던 말을 연이어 나갔다.
“신중국의 시황제.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라면, 다른 계파는 잘라내야 하는 법.”
“무슨 말씀이신지…?”
“제임스 왕. 그자의 몰락을 통해, 가상화폐 선물거래에 연루된 상하이방 일파까지 전부 사법처리 할 것이다.”
“……!”
강도 높은 숙청의 예고.
툭, 무심한 듯 내던진 탁자 위의 서류에 적힌 제목은 세 글자였다.
바로 <살생부>.
“거기에, 내부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바깥이 조용해야 하는 법.”
창문을 닫고는 다시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 핑 주석.
괘씸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그는 이 상황을 만들어낸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제법 그럴싸한, 높은 평가 점수를 속으로 매기면서.
“스스로 북조선의 그 치기 어린 미치광이의 목줄까지 잡겠다고 자처했으니, 대우해 줄 법도 하지.”
“그, 그런 깊은 혜안이…! 역시 주석 각하의 지혜에 온 중화가 다 탄복할 것입니다!”
딸랑거리는 부하의 아부 따위야 그저 기분 좋은 향신료 정도로 여기는 핑 주석.
여전히 들려오는 용비어천가를 배경음악 삼아 그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시황제가 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라면, 당분간은 내치에 집중하기로.
그렇기에, 조금은 느슨하게 풀려버린 외부에 대한 긴장감.
“개구멍 관리인 노릇을 맡겼다는 것은, 언제고 다시 권한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한서준, 그자가 잠시 완장 찬 기분이나 누리게끔 가만히 두겠다.”
핑 주석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가볍게 내린 이번 결정이, 향후 동북아시아, 아니,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뭐, 설마 재벌 회장 정도 되는 치가, 그 맹견을 죽이지는 못할 것 아니겠는가. 애당초 본인이 국가 지도자가 아닌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