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정은쿤(5)
평양, 대동강을 낀 고급 식당 안.
북한치고는 제법 화려한 내부는 나름 고위층 전용 공간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거기 모인 사람들의 속마음은 썩어가고 있었지만.
“고저, 이번 달에도 간부 배급이 안 나온다 했던가?”
백두혈통 김 씨 부자 배지가 카라에 달린, 구겨진 인민복 차림의 40대 남성.
당 간부로 보임에도 초췌한 모습의 그의 말에, 동료 간부가 불평불만과 함께 그 말을 받아 대답했다.
“배급은 무신 놈의 배급. 천리마 운동이다, 100일 투쟁이다 하면서 있는 것이나 안 뜯어가면 또 모를까!”
“이 사람. 거, 목소리 좀 낮추라.”
“말 못 할 건 또 무에야? 내래 평양 사람들까지 손가락 빠는 거이 처음 겪는 일이라! 그리고.”
서로 옥신각신 언성을 높이던 장년층의 당 간부들.
순간, 갑자기 찾아온 침묵. 곧이어 나올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그들 모두는 숨을 죽인 채로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여기 모인 사람들 전부 단단히 결심한 사람들 아이던?”
“…기야 기렇디.”
칙, 칙. 연료가 거의 다 떨어져 맥없는 불꽃을 피우는 금속제 라이터.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정전.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조국만큼이나 초라한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위원장 동지는, 아니, 김정은이 그놈 바라보고 있다가는 싸그리 뒤지게 생긴 기야.”
최근 정상적인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김정은.
조금씩 마약에 중독되어 가는 그는 알량하게나마 쥐고 있던 리더쉽을 잃어가고 있었다.
“백두혈통하고 피로 이어진 방계, 외가, 처가… 이런 핵심 고위층 아이면, 당 간부고 개나발이고 아무 미래도 없다.”
“기러니,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 그 양반허구 같이 남조선 세작질이나 하는 거이 우리 희망이지비.”
딸깍, 다시 전기가 들어왔는지 몇 차례 깜빡이던 백열전구에 다시 들어온 등불.
정전이 있기 전보다 한층 더 굳어진 그들의 입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광증 걸린 그 새끼돼지 놈은 이제 끝이라.”
지잉, 때마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왔다.”
남한으로 탈북한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이었다.
-다들 모인 기야? 따로 미행은 없었고?
한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북한으로, 통신 감청을 막고자 이중 삼중으로 간접 통화를 하기에 썩 좋지 않은 음향.
그럼에도, 이곳에 모인 당 간부들은 다소 상기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있습네다. 보안이야 늘 신경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네다.”
-기래, 기럼 시작하지.
일요일마다 이루어지는 정보 보고 활동.
당 간부 가운데 김정은 직속 비서관인 이가 그 시작을 알렸다.
“정은이 놈은 점점 정신머리에 나사가 빠지는 것 같습네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일이 많아지고, 같은 말을 여러 번 합네다.”
뒤이어 바통을 받아 이어 달린 이는,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당 간부였다.
“배급은 고사하고 장마당에까지 물자가 씨가 말랐습네다. 이대로라믄 올겨울에 아사자가 떼거지로 나오게 생겼시오.”
졸지에 성토장이 된 보고 자리.
이 망해가는 나라는 도무지 정상적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국서 물자가 오기야 오는데… 엔젤 마스큰지 탈바가지인지 하는 회사가 총괄을 맡아서 이래저래 혼란이 큽네다. 하지만.”
오로지, 전략 물자 관리 담당관의 뒤이은 말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군용 물자 공급 하나만은 외려 활발하다 합네다.”
-군용 물자가?
그리고, 그 이질적인 특별함에는 어김없이 다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아아, 고것은 제가 추가로 보고하갔습네다.”
여기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군복 차림의 남자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핵탄두 기폭장치하고 미사일 연료. 본래 그렇게 달라 해도 중국 놈들이 안 주던 거인데, 갑자기 새것들이 공급되고 있습네다.”
-물량은 어느 정도 되는 거인데?
“그거이, 아무리 못해도 기존 물량을 싸그리 교체할 정도는 됩네다.”
부족한 물자.
정신이 이상해진 최고 영도자.
그리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유일하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군수 분야.
한참을 말이 없던 대외경제상.
-그런 거였나…?
전화기 너머에서 지지직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들려오는 그의 혼잣말.
돌아가는 큰 그림이 이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 걸까?
들릴 듯 말 듯 한 그 혼잣말은 곧바로 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하! 그냥 비트코인 돈놀이로 장난치기 좋아하는 핏덩이로만 알았건만, 깨나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었구먼, 기래.
“대외경제상 동지…?”
그리고, 상황이 파악되자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에게 무언가를 강력하게 권유하는 대외경제상.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자네들은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 귀담아듣도록.
기존에 내뱉던 다른 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기 확신이 담긴 그 제안은 바로.
-최대한 빨리 가족들 데리고 남조선으로 내려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지? 그기 갑자기 무신 말씀이십네까?”
급작스러운 탈북 권유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당 간부들.
그런 기색 따위야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전화기 너머의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은 외려 훨씬 당당해진 말투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래, 다는 말을 못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언할 수 있다.
앞으로 휴전선 이북 지역에서 일어날 일이 무엇일지를, 그리고 그 일을 벌일 이가 누구인지를, 그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백두혈통이라는 존귀한 낱말은, 조만간 시덥잖은 개소리로 취급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 * * *
같은 시각, 당 간부들이 있던 고급 식당에서 대동강 물줄기가 흘러가 멈춘 지점.
김정은의 집무실에는 고약한 치즈 냄새가 포도주 향에 섞여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위원장 동지, 위원장 동지. 일어나셔야 합네다.”
결재판을 옆구리에 끼고는, 눈을 감은 김정은을 조심스레 부르는 보위부장.
그러나,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김정은. 불안한 마음에 손을 뻗어 부채질이라도 해보려는 찰나.
“그 더러운 손 치우라! 한서준 이 종간나새끼!”
“위, 위원장 동지…!”
막 악몽에서 깨어난 듯, 몸을 깊게 묻은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는 김정은.
“헉, 헉…!”
거친 숨소리. 길게 그늘진 눈가.
빈말로라도 정상이라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보위부장이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괜, 괜찮으십네까? 어서 주치의를 불러서…!”
“끄응, 되었다! 이봐! 포도주하고 치즈나 더 가지고 오라!”
곧바로 탁자 위에 올려진, 치즈와 포도주.
유럽에서 수입된 그 비싼 사치품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시종들은 그것들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김정은 앞에 가져다 보였다.
“후우, 내래 요새 이것들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기야.”
“…….”
피우던 담배마저 중간에 집어 던지고는, 곧바로 걸신들린 듯 배 속을 채우는 김정은.
무언가에 중독이라도 된 듯한 그는, 그제야 비로소 평안해진 얼굴로 보위부장을 대했다.
“크흐. 좀 살겠구먼. 기래,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그, 중국에서 보낸 핵탄두 기폭장치와 미사일 고체연료 말입네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물론 약 기운이 가져다준 그 평안함은.
“이봐! 그냥 줄 때 재깍재깍 받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말이 그래 많은 기야!”
찰나의 시간에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하, 하지만. 중국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와 조금 다른 내용이 있는지라….”
“되었고! 골 아픈 이야기는 나중에 하라! 썩 꺼지도록!”
갑작스레 쏟아내는 격노와 함께 내려진 축객령.
터벅터벅, 독재자의 초상화를 눈에 담은 채로, 긴 복도를 걷는 보위부장.
“정신이… 나간 긴가? 이거이 숫제 무슨 아편쟁이 모습도 아니고.”
굳게 닫힌 문을 뒤돌아보며,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보위부장이라는 직책은 그리 오래 해 먹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하기야, 망할 때가 되기야 했지비. 애당초 저 백두혈통 자체가 글러 먹었으니.”
* * * *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은 북한 출신치고는 제법 쓸만한 사람이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계속 그렇게 내부 정보를 물어다 주시면 됩니다.”
평양의 당 간부들과 나는 통화 내용을 내게 보고하는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
보고 말미에 붙은, 민간 기업 회장이 이런 것을 관장해도 되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을 주었다.
“정부 측과는 별도로 소통하고 있으니, 그건 그쪽이 염려하실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이만.”
그 일개 민간 기업 회장 앞에, 이번 정부의 최고 실세인 성북동 상왕이 앉아있을 줄은 모를 테니까.
“들으신 대롭니다.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이거야 원. 이런 작전이 먹힐 줄이야.”
감탄한 듯 너털웃음을 내지르는 성북동 상왕.
그는 책장에 꽂힌 근대 역사서에 눈길을 주며 나름의 감상을 이어나갔다.
“과거 대영제국 시절, 그렇게 아편을 뿌려댄들 그게 청나라 황제까지 가지는 못했는데 말이지.”
“애당초 그 작전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그냥 전제군주 한 사람만 타겟으로 잡으면 되는 것인데 말이죠. 지금처럼.”
굳이 북한 인민 전체를 뽕쟁이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저 김정은, 김정은 한 사람만 폐인으로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그런 내 판단에 동의한 사람은 비단 성북동 상왕뿐만은 아니었다.
“국정원장, 자네는 어찌 보나? 지금 김정은이가 맛이 가고 있는데 말이지.”
“일단은 고무적입니다.”
평소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국정원장.
“설령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안보상의 가치가 넘치는 작전이니까요. 다만….”
“다만?”
말끝을 흐린 그는, 나와 성북동 상왕,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북한 말고,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곳이라니, 중국에서 눈치라도 챈 겐가?”
“아, 그건 아닙니다. 거긴 지금 내부 숙청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요.”
비트코인 사건 이후, 칼을 뽑아 든 핑 주석.
상하이방에 대한 강도 높은 숙청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들 턱밑에 붙은 번국(藩國), 북한에 제대로 된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그렇다면.
“뭐, 그럼 남은 곳은 한 군데뿐이겠네요.”
북한에 세심한 신경을 쓸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한 정보력을 갖춘 유일한 나라.
어쩌면 지금도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그 나라는 분명.
“아무래도 한 회장님께서… 미국에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
유사시 한반도의 모든 키를 쥐게 될 나라.
나더러 미국에 다녀오라는 국정원장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게, 플로리다 주지사에 야심 차게 도전했다가 선거에서 떨어진 욕심꾸러기가,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으니까.
“전(前) 국무장관이던 양 웬리 현(現) 부통령, 그자와 직접 이야기 나누실 수 있는 분은 한서준 회장님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