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모두에게 이익인(3)
형형색색의 종이띠로 만든 밝고 경쾌한 선전물.
북한 특유의 붉은 글씨체로 쓴 김정은의 만수무강을 바라는 표어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 위를 수놓은 거대한 축포까지.
김정은이 병석에서 일어난 평양은 적어도 겉으로는 축제 분위기였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언정.
“아주 난리가 났다고 하더만, 김정은이 그 개놈이 방방 뛰고 권총질을 못 해서 안달이었다지비?”
평양 대동강이 보이는 고급 요릿집.
당 간부 전용의 그 식당 가장 깊은 내실에서는, 오늘도 북한 체제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모임이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심각해진 분위기 속에서.
“고저, 내 들어보니 그 소젖 뭉친 것과 포도주에 마약이 들었다고 하더군. 기래서 한동안 바보 병신처럼 굴었던 거라나?”
“김정은이 아가리에 들어가는 거이 마약이 들어갔다고? 도대체 어떻게…?”
모두가 자리에 모이기도 전, 벌써 회자되는 화제는 김정은의 건강이었다.
직속 비서실에 근무하는 당 간부가 이야기의 포문을 열자, 곧바로 정보를 푸는 세관 쪽 당 간부.
“. 그 탈바가지 같은 이름의 중국 회사에서 장난을 쳤다고 하더구먼.”
“우리 북조선 수출입 독점권을 가졌다는, 그 기업소 말이야? 그 떼놈들이 뭐가 아쉬워서?”
두리번두리번, 한 번 더 문단속이 있던 후, 천천히 목소리를 낮추는 세관 쪽 당 간부.
그는 캐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부에 미처 보고하지 않은 정보가 담긴 이야기보따리를 조심스레 열기 시작했다.
“이건 극비인데 말이지비, 사실 가 떼놈 기업이 아니라고 하더군.”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접해서일까? 서로의 놀란 표정만을 바라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다른 당 간부 일동.
“그, 그기 무신 말인 기야…?”
“아, 왜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 여기 모여서 정보 넘기는 행위 자체가. 어차피 다 남조선 도움 주는 일이라는 것 말이지비.”
“그럼… 그 탈바가지 기업이 남조선 것이다? 해서, 그놈들이 김정은이를 뽕쟁이로 만들었다?”
뚝, 뚝. 추적추적 내리는 소나기.
유리창을 적신 빗방울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작은 말소리마저 묻어버린 후에야, 그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거이 합리적 추론 아니겠는가? 윤정호 그 양반도 저번에 우리에게 이리 말하지 않았는가 이 말이야.”
탈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체가 조만간 끝난다고 확신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에 대해서.
“최대한 빨리 가족들 데리고 남조선으로 날라오라. 이렇게.”
우르릉, 불 꺼진 방안을 비추는 번갯불과 함께 들리는 천둥소리.
이번 장마는 유달리 거센 모양이었다. 낡은 창틀이 덜컹거리자, 동시에 벽 위에 붙은 백두혈통 초상화 두 개 또한 바닥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으니까.
그 흔들린 권위를 그대로 증명하기라도 하듯, 당 간부들 가운데 누군가가 내뱉은 말 한마디.
“그리고… 아무래도, 오늘 보고를 끝으로 그리해야만 할 것 같고.”
지금은 남한으로 탈북한,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이 받는 주기적인 보고.
“왔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보고용 전화기가 탁자 위에서 진동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백두의 혈통을 만세에 빛내며.”
-주체의 한길로 억세게 싸워나가자.
이 자리에 모인 목적과 전혀 상반된,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기까지 한 암구호.
그것이 퍽 우스웠던 모양이다. 코웃음을 치며, 하던 말을 이어나가는 윤정호 전(前) 대외경제상.
-뭐, 이제는 백두혈통도 주체사상도 다 썩어 문드러질 것이 되고야 말겠지만.
“고저, 이제 때가 된 것입네까?”
꿀꺽, 목구멍 너머로 흘러 넘어가는 침방울.
영겁 같던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전화기 안쪽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보고를 마지막으로, 모두 가족과 함께 중국을 경유해 남조선으로 탈출하라.
“아…!”
-이는 마지막 기회이다. 더는 지체하지 말 것.
원탁에 둘러앉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 간부 일동.
곧바로,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알갔습네다, 그리하갔시오!”
“결국,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먼, 기래!”
찬 가을비도 가라앉히지 못할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는 들뜬 열기.
북한을 붕괴할 전초전, 그 신호탄이 지금 막 쏘아 올려졌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보지. 가장 먼저, 군부대 지휘관 연락망은 확보했는가?
“취합이야 일전에 다 끝냈고, 이제 보내기만 하믄 됩네다.”
쇠뿔도 단김에 빼겠다는 듯, 곧바로 전송되는 북한 전역의 군부대 지휘관 연락망.
이제, 마지막 가장 중요한 보고만이 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네, 그러면 이제… 김정은이가 현지 시찰을 떠난다지? 이번 주 언제인가?
“사흘 후입네다. 핵무력 시설 지도차 영변에 간다 합네다.”
김정은의 핵시설 방문.
지금도 핵무력이라는 제 목숨줄을 어떻게든 튼튼히 만들 생각뿐인 그 젊은 독재자는 모르고 있었다.
-영변, 영변 핵 시설이라… 확실하겠지?
“확실합네다. 오히려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바득바득 밀어붙일 기세입네다.”
그 튼튼한 동아줄 같던 목숨줄에 고스란히 매달려, 교수형 아닌 교수형을 당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뽕쟁이로 약에 절어 있다가 이제 막 정신을 차렸으니, 권력을 놓칠세라 아주 몸이 달아 있다고 합네다.”
* * * *
용산, 한미연합군 비밀 벙커.
여러 국가 기밀 시설을 가 보았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바깥을 지키는 삼엄한 경계야 물론이거니와, 내부 또한 전쟁에 최적화되어 있었으니까.
300명의 국회의원과 사법부의 주요 요인들이 몸을 피한 쉘터를 지나, 지휘통제실로 들어선 나.
헌병이 열어주는 철문을 지나가니,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에 앉아 나를 반겼다.
“국방부, 외교부 두 분 장관님. 그리고 국정원장님. 오래간만입니다.”
“아아, 오셨습니까. 간만에 뵙습니다.”
외교·안보 분야의 최고위 담당자 세 사람.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국정원장.
간소하게 악수를 나누고 넓은 복도를 지나가니, 긴 탁자 한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양복 차림의 미국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그 사람은 바로.
“양 웬리 부통령님, 금방 또 뵙게 되었네요.”
“서준 한, 당신은 매일 만나도 좋은 사람이지. My lucky boy.”
미국 측의 전권을 받아 이곳에 온, 양 웬리 부통령이었다.
“혹시 미합중국 대통령께서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았는지요?”
“하! 그 늙다리와 내가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한들,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지.”
워싱턴 D.C에서 나와 나눈 화담 이후, 그는 최선을 다해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한국과 미국, 양쪽 모두의 국익을 위해서. 그리고… 백악관의 정치인의 사익을 위해서도.
“영감탱이도 결국 재선해야 하거든. 처참하기 짝이 없는 지금 지지율에 대통령 자리 한 번 더 해 먹으려면, 이런 이벤트만 한 것도 없지.”
몇 마디 농담을 더 나눈 후, 복도 끝을 지나 드넓은 홀로 들어선 나.
이 양반이 군복을 입은 건 처음 보았다. 지금 순간에도 영 유약한 모습의 꼭두각시, 최 대통령의 모습.
“최 대통령님.”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이의 눈치를 보며 엉성하게 나를 반겼다.
어차피, 모든 실권은 이 양반에게 있으니까.
“아아, 왔구먼. 재깍재깍 임명식부터 하자고. 아무리 요식행위라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성북동 상왕.
그가 턱 끝으로 눈치를 주자, 그제야 최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푸른색 벨벳 표지로 장식된 무언가를 건네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한서준 회장님. 아니, 이제는.”
이번 일의 권한과 책임이 모두 주어진, 공식적인 직책의 임명장을.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한서준 수석부의장님.”
공식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대통령이 의장 자리를 겸하는 이 기구에서 수석부의장 자리를 임명한 것은, 말 그대로 최고 지위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이렇게 비선 비슷하게 활동하기에는 기획한 각본도, 맡은 연출도 너무나도 중대한 일이었으니까.
최 대통령이 내민 임명장을 받자마자 들리는 박수 소리. 요식행위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자, 자리에 앉아있던 성북동 상왕이 일어나 내게 다가와 말했다.
“결국에는 이런 감투까지 쓰게 되었군.”
“잠시뿐입니다. 감투라기보단 비상 상황이니 써야 하는 전투모라 생각하겠습니다.”
“이 사람, 참. 말은 그래도 싱숭생숭하긴 하는 모양이구먼. 하긴, 이 자리도 부총리급이긴 하니.”
싱숭생숭… 하지 않다면 그야 거짓말이지.
부총리급이니, 장관급이니 하는 감투의 무게 때문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통일과 관련한 모든 권한이 모인 컨트롤타워의 수장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 뿐.
“자,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가벼운 헛기침 소리와 함께 시작된 국가안전보장회의.
대통령으로부터 의사봉을 건네받은 나는, 전광판 중앙에 선 채로 발표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약 1시간 후, 평안북도 영변 원자력연구소에 김정은이 현지 시찰을 위해서 도착할 예정입니다. 다음.”
넘어가는 화면.
방금까지 보이던 북한 위성 지도가 사라진 후, 곧바로 반도체 사진 하나가 나타났다.
엉성한 글씨체의 한자가 적힌 그 반도체 칩은 바로.
“저희 탄약 반도체에서 생산한… 군사용 칩입니다. 얼핏 보기에 중국제처럼 보이는 이 칩에는, 사실 내부 랜섬웨어가 들어있습니다.”
김정은이 그토록 목숨을 걸던 핵전력을 내 손에 쥐게 할 조커(Joker) 카드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통제 중인 기폭장치를 당장이라도 가동할 수 있을 만큼 말이지요.”
물론 그 기폭장치로 북한 전역의 핵무기를 그 자리에서 터트릴 생각은 아니다. 방사능 낙진 범벅을 한 통일은 나 또한 사양이니까.
핵폭발이 아닌, 핵폭발 이전 단계의 정교한 폭발. 그 정교함이 필요한 기폭 과정을 막무가내식의 폭발로 바꾸기만 해도 된다.
“내부 첩보원이 김정은이 연구소 내에 접근해 시찰 중임을 알리는 순간, 북한의 모든 핵탄두에 심어진 반도체가 작동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예 핵무기로서의 가치 자체가 없어지고 마니까.
“김정은이 그토록 목숨줄로 여기던 핵무력이… 전부 고철덩이가 되게끔 말입니다.”
숨죽인 채, 나를 바라보는 한국과 미국의 고위 인사들.
긴장감이 감도는 지하 벙커 안, 몇몇 질문이 있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올리려는 그때.
-지지직!
지휘통제실 내부를 울리는, 우리 측 특수부대원의 통신.
-현재 타겟이 목표 시설에 접근 중. 차량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이동 중입니다.
역사를 바꿀, 미래를 바꿀 일이…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붉은색 폭발 버튼을 든 내 손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