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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78화 (242/300)

278화 마지막 넘어야 할 산(4)

싱가포르 앞바다에 둥둥 떠다니며, 그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는 크루즈 선 한 척.

마치 흰수염고래를 연상케 하는 그 배의 갑판 끝에는, 한 손에 샴페인을 든 장 대인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장 대인.”

고개를 숙이는 장 대인의 조카.

중국 쪽의 상하이방 출신 정보부 요원과 끈이 닿은 그는, 바로 어제까지 홍콩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저 멀리 대륙의 북쪽, 베이징 안전 가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래, 멸망한 북조선의 허울뿐인 왕위계승자가 뭐라 하던가?”

“고민할 시간을 조금 달라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결정할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쯧쯧쯧… 강단도 배짱도 모두 없는 친구로군. 하긴, 그렇기에 이번 일이 가능한 것이겠지.”

칙, 칙. 잘린 담뱃잎을 말아 넣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장 대인.

바다와 구분이 힘들 정도로 청명한 하늘에 연기를 내뿜으며, 그가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서준, 그 꾀 많은 여우 같은 치가 생각했던 계획이.”

그리고, 그런 장 대인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붙이는 그의 조카.

“상하이방 원로들 쪽은… 어찌, 설득이 되어 가기는 하는지요? 잡음이 많다 들었습니다만.”

“자네, 별걱정을 다 하는군.”

너털웃음을 지으며 빈 샴페인 병을 웨이터에게 치우라 지시하는 장 대인.

그는 널찍한 선베드에 몸을 눕히고는,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며 대답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그 어떤 우려의 감정도 느끼지 않은 것처럼.

“애당초 김한소에게 그 쪽지가 간 것부터가 상하이방 주류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암시하는 걸세.”

“하지만, 비트코인으로 상하이방의 자금을 털었던 이는 한서준이 아닙니까?”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인 게야. 설령, 그 친구가 과거 자신의 등짝에 칼을 꽂은 이일지라도 말일세.”

몰릴 대로 몰린 상하이방.

그리고, 이 기나긴 숙청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핑 주석.

마지막 태풍이 불어닥치는 대륙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장 대인은 피식 웃음 지었다.

“이틀 내로 결정짓겠구먼.”

이 모든 것을 뒤집을, 김한소라는 조커(Joker) 카드.

핑 주석의 손에 있는 그 카드를 역으로 제 것으로 만들려 하는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기에.

“핑 주석, 그놈이 질 게임이고.”

“어르신…?”

“왜, 믿지 못하겠나? 하긴, 자네는 이번 작전의 세부 내용을 보지 못했구먼.”

부우우우, 저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싱가포르 앞바다, 말라카 해협을 지나는 군함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손 인사를 나누듯, 고동을 울리곤 했다.

“한서준 그 꾀쟁이 놈은 늘 그래 왔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진다. 설령 그것이 미끼임을 알면서도 물 수밖에 없게끔.”

한국 군함이 보내는 가벼운 고동 소리에 눈살이 찌푸릴 정도로 센 음향의 화답을 보내는 중국 군함.

그 기 싸움 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던 모양이다. 피식, 입가에 미소를 걸고는 양팔을 쭉 뻗는 장 대인.

“김한소라 했던가? 그 철부지는 거절할 수 없을 게야. 얼마나 설레겠는가 말이지.”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중국 군함을 보며, 장 대인이 마지막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토록 환멸을 느끼던 북조선의 잔해, 그 모든 걸 제 손으로 없앨 수 있으니 말이지.”

조만간, 저 시끄러운 고동 소리조차 내지 못할 날이 올 텐데, 라는 생각은 입 바깥으로 내뱉지 않은 채로.

* * * *

전쟁은 얼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청천강 위쪽에 형성된 전선. 아니, 전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적절치 않았다.

토끼 귀 모양으로 길쭉해져 가는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에 영향력을 투사하기 전, 잠시 부대를 추스르는 중이었으니까.

-오늘 우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이루어내어, 마침내 그것을 숙명으로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렇기에, 안정화가 끝난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최 대통령은 마이크를 잡고 이런 연설을 할 수 있었다.

-이곳 평양에 발을 딛게 된 저는!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것도 나와 성북동 상왕, 기타 내외 귀빈들까지 구(舊) 김일성광장, 현(現) 통일광장 근처 건물에 초청해 놓고 말이지.

“아주 만만세일세. 그래서 아쉽구먼.”

내 옆자리에 앉아, 묘한 표정으로 최 대통령을 바라보는 성북동 상왕.

“내 임기가 한 1년 언저리쯤 더 길었다면 말일세, 저 자리에서 목이 터지게 부르짖는 것은 나였을 테니 말이야.”

정말이지,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진짜 뭔가 아쉽기는 한 모양이었다.

애써 목청을 돋우는 최 대통령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런 감성적인 말을 내뱉을 정도였으니까.

“역사책의 한 장면을 차지하지 못한 것. 그건 좀 슬프구먼.”

“거,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셔야지,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욕심쟁이 아저씨에게 그만 좀 욕심을 부리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앞으로도 상왕 자리에 쭉 계실 거면서 말이죠.”

“뭐, 그렇긴 하지.”

차기, 차차기까지 자기가 생각한 라인업으로 쭉 밀고 갈 양반이 괜히 감성적이긴.

그래도, 나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순순히 내 말에 인정하는 모습의 성북동 상왕.

“애당초 저 연설문도 다 내가 짠 것이니 말이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우리의 정당한 영토! 백두산 천지에 한라산 백록담 물을 붓는 그날까지, 함께 역사를 만들어갑시다!

진짜 별 사소한 것까지 입김이 닿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성북동 상왕.

그는 특유의 부담스러운 미소와 함께 내게 능글맞은 물음을 던졌다.

“한 부의장, 자네도 나를 상왕으로 두는 편이 낫지 않던가?”

“뭐… 그렇긴 합니다.”

“나만큼 자네하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정치인도 없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그리고, 곧바로 무심한 듯 툭 던져지는 이 자리의 본론.

“이야기는 들었네. 1,000조 원 건도, 서한만 석유 건도, 핑 주석이 꼭두각시 백두혈통을 내세워 헛짓거리하려는 것도. 그리고.”

이미 외교·안보 쪽 인사들에게 들을 건 다 들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내 주변 자리에 다른 귀빈들을 못 앉게 하드만.

“자네가 세웠다던… 그 희한한 계획도 말이지.”

“정보 수집 하나는 참 빠르십니다. 상왕 타이틀을 계속 쥐고 계실 만도 하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되었고. 정말 가능하긴 한 겐가? 그 정신 나간 계획이?”

‘그 계획.’

사실 이 계획을 세우고 난 후, 참 많은 사람이 입을 떡하니 벌리곤 했다.

얼핏 듣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면서… 동시에, 생각을 천천히 곱씹다 보면, 제법 그럴싸한 느낌이 드는 계획이니까.

“가능이야 무조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이제껏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나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넘어야 할 산.

이 산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으니까.

“북한 망명정부의 수장으로 김한소를 올리고, 중국에게 800조 원을 지원받게 할 겁니다.”

“……!”

“그다음, 핑 주석을 실각시키고… 제 손으로 베이징 중앙정치 세력을 물갈이한 다음.”

대놓고 웃는 낯으로 넘치는 자신감을 보이는 내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었나 보다.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하건만, 반쯤 넋이 나간 헛웃음을 짓는 성북동 상왕.

“하!”

“앞선 800조 원의 북한 망명정부 예산, 그걸 전부 가로챈다. 새롭게 바뀐 중국 수뇌부의 암묵적인 용인하에.”

물론, 이 헛웃음은… 조만간 다른 종류의 웃음으로 바뀔 것이다.

감격 내지는 감탄이 듬뿍 담긴 웃음으로.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제법 그럴싸한 계획 아닐까요?”

“난 처음 그 생각을 보고받고선 드디어 자네가 미친 줄 알았다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아래 평양 시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성북동 상왕.

연설의 막바지에 들어선 최 대통령. 이제는 그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은 성북동 상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다시 곱씹어 보니, 제법 그럴싸한 계획이더군.”

그때,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평안도 방언으로는 세칼이라 불리는 바람.

“가을이라 그런지, 날이 맑군. 여기서 바다까지 다 보일 정도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끝자락에는 바다가 보였다.

검은 황금이 잠자고 있는, 서한만이라는 바다가.

“믿는다 못 믿는다 그런 말은 하지 않겠네. 어차피 자네는 해내고야 말 사람이니까.”

내 앞으로 다가온 성북동 상왕.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회백색 머리에 내려앉기 시작한 그가, 내게 마지막 남은 기력을 불어넣듯 어깨를 두들겼다.

“그럼, 어디 잘해 보게나. 나도 저 서한만 한가운데에서 석유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군.”

* * * *

같은 시각.

김한소가 억류된, 베이징 안전 가옥의 지하실 안.

“하갔습네다. 아니, 해야만 합네다. 반드시.”

자신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던, 상하이방 출신 중국 정보요원에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김한소.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장 대인의 말대로군. 아니, 어쩌면.’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상하이방 출신 정보요원.

‘장 대인의 뒤에 있다는… 그 한서준인가 하는 자의 계책인 건가, 이번 것도?’

유약하기 그지없던, 몰락한 백두혈통. 어린애 같던 그의 모습이 이틀 사이에 바뀌었다.

“내래 북조선 망명정부의 얼굴마담이 되는 것. 무장 투쟁을 미끼 삼아 핑 주석으로부터 거액의 예산을 뜯어내는 것.”

눈가에 생기를 되찾은 김한소는 낮은 목소리일지언정,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담아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돈을 들고 그대로 남조선으로 날아가는 것까지. 그거이 내가 할 일이 맞습네까?”

그리고, 그의 변화로 인해, 역사의 수레바퀴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확합니다. 쉽지 않은 결심 해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공에서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그 손을 놓지 않으며, 김한소는 씁쓸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백두혈통. 그 지옥 같은 낙인을 내 몸뚱이에서 지우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당장은 낙인 자국을 내세워야 한다라….”

그리고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희망 사항을 말하는 김한소.

“한서준이라 했던가… 모든 일이 끝나면, 내래 그자의 낯짝을 한번 보고 싶습네다.”

문득 피어오른 궁금증에 그는 충동감을 느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충동감을.

“이런 생각을 한 남자가 어찌 생겨 먹었는지, 퍽 궁금하니 말입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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