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마지막 넘어야 할 산(5)
싱가포르의 모 호텔 연회장.
쿵! 천장의 샹들리에가 흔들리지 않았나 싶을 만큼, 거세게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노인.
순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정적이라는 물감이 흩뿌려졌다. 노인의 호통이 이어지기 전까지.
“어찌 그런 결정을 함부로 내렸단 말인가! 어째서!”
왜소한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큰 사자후.
주 전(前) 총리. 상하이방의 최고 원로.
자신들 상하이방을 이곳 싱가포르로 도망치게 한 탄약그룹과 손을 잡자는 말에, 그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자네들은 순 닭대가리들인 게야?”
“그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
“비트코인 사건을 잊은 게냐고! 그 데이터 쓰레기 놀음에 우리가 재기할 자금이 통으로 날아갔거늘!”
진땀을 빼며 주 전(前) 총리를 말리는 상하이방 일동.
“어르신,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슨 놈의 선택지를 또 따지나!”
그러나, 완고한 노인의 고집은 꺾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기, 싱가포르에서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을!”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어가는, 핑 주석의 상하이방에 대한 숙청.
그렇기에, 노인의 팔을 잡은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탄약그룹의 손을 잡는 것이 될지라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주 총리님. 이대로라면 핑 주석이 시황제가 될 판인데, 자칫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시끄럽다! 이번 대에 안 되면, 다음 대에 이루면 되는 게야! 10년, 20년, 아니, 100년이 걸리면 뭐 어떤가, 이 말이다!”
고조되는 대립.
분명 상하이방 젊은이들의 말은 틀림이 없었으나, 원로 중 최고참인 주 전(前) 총리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서로가 난감해진 그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백 년 권세 없음이라.”
“……!”
느긋하게 연회장 문을 열고 나타난 장 대인.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가 주 전(前) 총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었다.
“백번 옳은 말일세. 언젠간 핑 주석이라는 꽃잎도 땅에 떨어져 썩을 터이니.”
“하! 박쥐처럼 이리저리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놈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구먼.”
“그럼, 기왕 하는 김에 한마디 더 하도록 하지.”
손가락을 들어 자신들 두 사람을 둘러싼 청중을 가리키는 장 대인.
뜻 모를 미소와 함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친구들은 나나 주 총리 당신처럼 죽을 날이 코앞이 아니라는 말 말이야.”
“뭐라…?”
“생각이 다르리라는 것이지. 이보게, 자네들. 아니 그러한가?”
눈치를 보는 상하이방의 젊은이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주뼛주뼛 손을 들기 시작했다.
“다음 대까지 기다리기에는… 저희에게 남은 날이 너무 깁니다, 주 총리님!”
그렇게 시작된,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젊은이들의 의견.
“어르신, 부디 한 번만 노여움을 꺾어 주십시오!”
“무릇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하였습니다! 한서준, 그자와는 잠시 같은 배를 타는 것뿐입니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마는 주 전(前) 총리.
“이 사람들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콧김을 내뿜는 그에게, 장 대인이 다가가 말을 건네었다.
“너무 성내지 말게나. 애당초 나도 한서준 그놈에게 된통 뒷빡을 맞아 보지 않았던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들어나 보게. 먼저 맞아 본 입장에서, 그리고 맞고 난 다음에 같이 일을 진행해 본 입장에서, 나는 이리 생각하네.”
파노라마 사진처럼,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자신을 둘러싼 상하이방 일파 전체를 눈에 담는 장 대인.
곧이어 그의 입에서 호기로운 장담 하나가 내뱉어졌다.
“여기 모인 상하이방 일동, 어쩌면 다시 중화 대륙으로 돌아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노라고.”
장 대인, 그 자신의 능력에 기반한 장담이 아닌, 그의 뒤에 있는 한서준이라는 남자를 믿었기에 내뱉을 수 있는 장담.
“…말은 잘하는군. 내 그를 어찌 믿으라고!”
“허면,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되지 않겠나?”
“뭐라…?”
그렇기에,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주 전(前) 총리에게, 장 대인이 제안 하나를 던졌다.
“마침 논의해야 할 것도 있으니, 이리로 직접 오겠다 하더군.”
그가 이제껏 겪어왔던 경험. 주 전(前) 총리에게도 그 편린이나마 느껴보게끔 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이번 일, 한서준에겐 폐족(廢族)된 상하이방의 협조가 필요하니 말이야.”
* * * *
어제, 굳이 싱가포르로 와야겠냐는 장 대인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상하이방도 병신이 아니니까요.”
그렇다.
아무리 핑 주석에게 두들겨 맞고, 내게 비트코인 건으로 재산이 쪽 빨린 동네북이라 할지라도, 상하이방은 병신이 아니다.
마냥 내가 기획한 계획안에 찬성표만 던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분명 내부에서 반발이 따를 것은 당연하겠지.
비행기 안, 머리를 갸웃거리는 김원철 아저씨에게, 나는 이번 일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맛있는 포도주와 함께.
“아무리 급하다 한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기는 할 겁니다. 정말 제게 핑 주석을 실각시킬 능력이 있는지를.”
붉은색 포도주가 든 유리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제의하는 나.
그런데, 이게 웬걸. 그렇게 술 좋아하던 김원철 아저씨가 우수에 잠긴 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으며.
“나는 말이여, 이제 슬슬 은퇴할 때가 된 것 같어야.”
“아, 또 왜 그럽니까?”
“아니, 아니, 진짜로.”
꿀꺽, 꿀꺽.
막걸리를 마시듯 잔에 든 포도주를 들이켜는 김원철 아저씨.
조금은 후련한 듯한 목소리로, 한층 진지해진 속마음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회장님 하는 거 보니까… 이제는 후견인이고 심복이고 그냥 내 서포트 능력 범위 바깥에 있는구나 싶어서리.”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물론, 나는 사직서 따위 받아줄 생각은 전혀 없고.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딜 가시려고요. 서한만 석유 독점권 얻으면, 그걸로 무슨 회장 생활 끝납니까?”
석유 독점권을 얻었다고 해서, 그게 다 끝인 건 아니다.
자원 개발 자체의 어려움부터, 어쩌면 산유국인 사우디, 그 수장인 빈 살만 왕세자와의 관계도 조금은 조정될 터.
거기에 구(舊) 북한 지역 특성상, 이런저런 자잘한 문제들도 튀어나올 것이다. 그걸 어떻게 나 혼자 짊어지라는 건지.
“세계적인 석유 메이저를 겸한, 최정상급 방산 기업. 앞으로 나아갈 길이 구만리인데, 계속 저 좀 도와주세요.”
“뭐,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야 고맙고. 그냥… 우리 회장님이 이제는 너무 훌쩍 커버렸달까. 그런 마음인 거였지.”
약간은 슬프게 웃는 김원철 아저씨.
자기보다 힘이 더 세진 조카에게 팔씨름을 지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다.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 듯, 김원철 아저씨는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내 들었다.
“아무튼, 상하이방 쪽은 이미 해결된 줄 알았는데, 그 영감님이 말썽이네.”
그 영감님.
김한소와 관련한 계획에 갑자기 찬물을 뿌리는 이 사람은 바로.
“상하이방의 최고 원로 포지션에 있는, 주 전(前) 총리 말이여.”
아무리 원로로 물러났다지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주 전(前) 총리.
자칫하면 기존에 세워둔 800조짜리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팍을 퉁퉁 두들기며, 자신감을 거리낌 없이 표하는 나.
“이제까지 만났던 수많은 거물급. 전부 직접 만나 이야기했을 때, 단 한 번도 안 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막연한 자신감으로만 이러는 것이 아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노인을 상대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에 대해서는…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주 전(前) 총리도 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까요. 꼭두각시를 흉내 낼, 김한소라는 사람과 함께.”
* * * *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
“김한소가 고집을 꺾었다고?”
갑작스러운 왕룽 외교부장의 보고.
생각보다 훨씬 빠른 설득에 약간은 의외라는 느낌이 드는 걸까?
눈썹 한쪽을 실룩거리는 핑 주석.
“그렇습니다, 주석 각하. 어린놈이라 그런지 조금 겁박을 주니, 며칠 지나지 않아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더군요.”
적당한 대답에 핑 주석은 약간의 기시감 따위야 마음속에서 쫓아 버리기로 했다.
조금은 편안한 모습으로, 서명한 결재판을 왕룽 외교부장에게 되돌려 주는 핑 주석.
“잘 되었군. 해서, 언제부터 진행할 것인가? 그 북조선 망명정부 계획.”
“보름 정도 후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보름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핑 주석.
“보름? 이런, 쯧쯧쯧… 왕룽, 이 사람. 지금 조선 반도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아직 끝나지 않은, 남한의 북한 병합 과정.
6.25 전쟁 때의 교훈 때문일까?
한미연합군은 좀처럼 청천강-함흥 이북으로 주력 병력을 보내지 않고, 방어선만을 두텁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일부 선발대 조의 부대를 안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놈들이 당장은 우리 중화를 의식하느라 청천강 이북에 세력 투사를 자제하고는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나?”
그렇기에, 핑 주석은 조급했다.
이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김한소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북한 망명정부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 망명정부의 게릴라군을 참칭하는 중국 특수부대가, 서한만 일대의 석유 채굴을 방해하게 해야 하니까.
“조속히 시행해야지, 하루라도 빨리. 좀 더 일정을 당겨 보게.”
“그게… 김한소 쪽에서 내건 조건 때문에 그리되었습니다.”
“조건?”
조건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핑 주석.
“무슨 조건을 내걸었기에 보름이나 시간이 걸린다는 건가? 혹시 내가 모르는 백두혈통이 또 있을까 그러는 것인가?”
“아, 그건 아닙니다. 주석 각하.”
이미 전쟁 당시 북한에 있던 백두혈통은 전부 요단강을 건너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외국에 체류 중이던 곁가지들이야 전 세계 여기저기로 망명을 떠난 상황이었고.
“허면? 김한소 그자의 건강에 문제라도 있는가?”
“그 또한 아닙니다.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여서인지, 백두혈통 김씨 일가의 고질병인 당뇨나 심혈관 질환도 없는 김한소.
그 젊음 때문이라 생각해서였을까?
헛기침을 내뱉은 왕룽 외교부장은 핑 주석에게 말끝을 흐리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김한소가 내건 조건은… 이게 참, 말씀드리기도 다소 민망합니다만.”
그 민망하기 그지없는, 보름이라는 시간을 잡아먹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가늠조차 하지 못한 채로.
“마카오 카지노에서 즐길 시간을 달라 했습니다. 수령 노릇을 하기 전, 마지막 향락의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