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281화 (245/300)

281화 트로이의 목마(2)

“짠!”

“아이고, 좀 천천히 드세요. 김 실장님.”

서한만이 내려다보이는 청천강 일대.

늦은 밤, 성원식 부회장과 함께 막걸리잔을 나누는 김원철.

“어흐, 죽이네. 북쪽 동네 순 전쟁통이다 어쩐다 해도, 슬슬 안정화 접어드는 것 같은디. 안 그래요?”

이제는 전시라고 생각지도 않을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북 지역.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위해 식당과 술집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이렇게, 대기업 임원급들이 마주 앉아 함께 술잔을 기울일 만한, 제법 그럴싸한 고급 요릿집까지도.

“뭐, 그렇긴 합니다. 청천강 이북 지역도 실상 민사작전만 못 하는 거지, 어지간한 주요 포인트는 하나하나씩 점거하고 있으니까요.”

“쩝. 딱 짜장 애들만 얌전히 굴면, 배 땅땅 두들기고 낚시나 다닐 텐데.”

찌르르르, 가을에 접어든 계절을 알리기라도 하듯, 강가의 갈대숲 사이에서 노래하는 귀뚜라미.

검은 황금이 잠자고 있는, 저 강가 너머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김원철이 입을 열었다.

“서한만 유전, 저 탐스러운 걸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맞다. 정부 쪽 사람들하고는 따로 말씀 나눈 것 있었나요?”

고개를 가로젓는 성원식 부회장.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가 술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힘들답니다.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판국입니다.”

“이것들이 아주 그냥 돈 귀신이 따로 없네. 1,000조 원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저도 최대한 조율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쉽지가 않네요, 전체 예산안 내용을 보니까.”

골치 아픈 일도 술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털어버리고 싶었던 걸까?

단숨에 잔을 비운 성원식 부회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히려 그쪽 기재부 측에서 1,200조 원, 1,500조 원 이야기하는 것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하! 이런 날강도들을 보았나. 여기에 혹을 덧붙인다고요?”

“괜히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거지요. 회장님 한 분에게… 국가가 목을 매어야 할 만큼.”

1,000조 원이라는 숫자가 줄어들 일은 없었다는 것만 확인한 두 사람.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인지, 성원식 부회장이 화제를 돌렸다.

“회장님께서 싱가포르로 가셨다 들었습니다만. 상하이방 측과 협의할 게 있다고요?”

분명 싱가포르에 있어야 할 회장.

아마 상하이방 원로를 설득한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 쌓여 있던 모양이었다.

물론.

“아아, 그거. 협의고 나발이고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빠르다면서, 거기 대빵 노인네 하나 데리고 마카오로 날아갔잖아요.”

“마카오요? 도대체 어째서…?”

“아이고, 이거 내가 말 안 했구나.”

성원식 부회장이 올려야 할 그 보고는, 며칠 더 미루어질 예정이겠지만.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얼굴에 걸어두고는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김원철.

달그락, 손안에 든 두 개의 플라스틱 주사위.

“흐흐흐, 우리 회장님, 주사위 들고 뭘 하려고 하면, 꼭 일을 벌이시더라고.”

데구루루, 아무렇게나 탁자에 굴려진 그 두 개의 주사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장 높은 수인 6.

두 개의 6이 합쳐진 12라는 숫자를 자랑스레 뽐내 보이며.

“얼추 해결책을 들고 날아올 겁디다. 혹시나 예기치 못한 불확실성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 * * *

“멋진 분들은 다른 멋진 분들과 함께할 때, 빛이 나는 법인 것 아닐까요? 목마 가면 신사분도, 천사 가면 신사분도.”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나와 김한소를 연결해 주는 유세나 보좌관.

시카고 쪽에서 학창 생활을 보내서 그런지, 미국 북부 특유의 늘어지는 영어 발음이 매력적이다.

팔짱을 낀 상태로 김한소를 내 옆에 데려다준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그러게 말입네다. 이거, 참… 이렇게 보니 토끼 가면 아가씨 말대로 빛이 나는 것 같습네다.”

천사 가면을 쓴 나를 바라보는 김한소. 그 또한 내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다.

그러나, 옆에 동행한 태자당 쪽 중국 정보 요원 탓에 대놓고 아는 체는 하지 못하는 상황.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고도의 은유를 통해 속내를 전달할 수밖에.

눈빛으로도 뜻이 통한 모양이었다. 과장된 몸짓과 함께 내게 말을 건네는 김한소.

“물론… 여기 계신 천사 가면 분께서 어떤 수를 던지실지는 눈으로 봐야겠지만.”

이 말을 번역하자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 한번 지켜보겠다.’

정도가 되겠지.

그리고,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그럼, 어디 한번 이 자리에서 지켜보시죠. 얼마나 그럴듯한 플레이가 이어질지를.”

김한소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바로 지금, 그의 옆에 삐딱하게 선 채로 거들먹거리는 이 정보 요원 따위야, 조금의 걸림돌조차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 계집년 분 냄새에 코가 꿰어 따라가더니만, 막상 다시 도박판에 올라가니 피가 끓는 모양이로군.”

소파에 몸을 던진 채, 반쯤 눕다시피 한 그는, 턱을 괸 채로 중국어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어디 잘 놀아 보시게. 나는 여기 앉아서 구경이나 할 테니 말이야.”

딸깍, 금속제 지포 라이터가 불꽃을 켜자 순식간에 잿빛 담배 연기가 몽롱하게 피어오르는 방 안.

달콤하지만 뿌연 연기 속에서, 나는 손가락 사이에 주사위 두 개를 끼워 넣은 채로 닫혀 있던 입술을 떼었다.

“목마 가면 신사분께서는… 주사위 게임을 해 보셨습니까?”

김한소, 당신.

정치적인 판단을 해본 경험이 있냐는 내 질문.

“아닙네다. 내래 보잘것없는 구석에서 카드만 쭉 쳐와서, 처음 겪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합네다.”

그 질문에 김한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덤덤히 자신의 부족함을 털어놓았다.

마치 나더러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달라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생전 해본 적 없는 게임을 하시는 분들은 중요한 순간에 상황 판단이 흐려지시더군요. 특히나.”

그렇다면… 그 빈 퍼즐 조각은 내가 채우는 수밖에.

“반쯤은 강제로 판에 참석하시는 분들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김한소 당신, 이번 판에서는 그저 뒤에서 줄을 댈 뿐인 사람이니까.

나라는 플레이어의 베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어머. 그럼, 기다리시는 동안, 저하고 술이나 한잔 같이하고 있죠.”

행여나 이 은유로 점철된 대화를 중국 정보 요원이 알아듣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상황.

그러나, 센스 있는 유세나 보좌관은 곧바로 그의 주의를 흐리기 시작했다.

“밤은 길고, 때로는 알아먹지 못할 판을 지켜보는 것은 지루하기까지 하잖아요? 멋진 아저씨.”

“크흠… 뭐, 그, 그렇긴 하지.”

타이밍도 적절하게 샴페인을 한 병 따기 시작한 유세나 보좌관.

다소 누그러진 경계 속, 긴장된 모습의 김한소가 다시 내게 말을 건넸다.

“고저, 그 컵에 든 주사위 말입네다. 안전하긴 한 겁네까? 아무래도 불안해서 말이지비.”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얼마든지요.”

주사위를 가리키는 김한소의 흔들리는 손가락. 그는 소리 없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불안해. 그러니까, 내게 확신을 줘. 백두혈통이라는 굴레로 고통받는 내가, 당신을 믿어야만 하는 확신을.’

“이 주사위 두 개는,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한 외침에 내가 대답했다.

“하나는 막대한 규모의 황금을, 다른 하나는 불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복을.”

황금과 행복.

달리 말하면, 이번 일에 수반된 두 가지 핵심인 1,000조 원의 자금과 김한소 개인의 자유.

두 개의 자그마한 주사위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로 까딱거리며,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저는 욕심이 많아서인지 황금을 갖고 싶더군요. 목마 가면 신사분께서는 행복을 취하심이 맞겠지요?”

“…뭐, 그렇기는 합네다. 꼭 제 마음을 읽으시기라도 한 것 같습네다.”

“뜻이 통하면 마음은 절로 읽히는 것이니까요. 자, 그러면.”

이쯤 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다. 내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김한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의지까지도.

나는 주사위가 든 컵을 김한소에게 내밀며 말했다.

“선(先)은 빈객께 드리는 것이 예의일 터.”

끄덕,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저으며 김한소가 컵을 받았다.

주사위 게임은 처음 해 보는 건지,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

달그락, 달그락, 허공에서 춤을 추던 컵이 움직임을 멈추자, 곧바로 탁자 위 녹색 천에 데구루루 굴러떨어지는 두 개의 주사위.

곧바로, 카지노 딜러가 들뜬 목소리로 결괏값을 외쳤다.

“목마 가면 신사분께서 만드신, 주사위 숫자의 합은 9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숫자 따위 얼마가 나오든 전혀 상관없다.

마찬가지로 쌓인 칩이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전혀 상관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숫자 9라. 축하드립니다. 제법 좋은 숫자가 나오셨군요.”

“퍼펙트가 아닌 게 아쉬울 뿐입네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까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누는, 이 대화의 본질뿐.

“퍼펙트. 12라는 수는 어찌 보면 좀 과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딸그락, 탁자 위의 주사위를 다시 컵에 집어넣고는,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기 시작하는 나.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다섯 번,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거칠게 흔들리던 주사위는, 다시 녹색 천에 굴러떨어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0. 정확하게 완결성을 갖춘 이 숫자에 저는 유독 마음이 가더군요. 아, 물론.”

내가 조달해야 하는, 1,000조 원. 그 금액의 의미가 담긴 숫자를 보이며.

“투자 면에서는, 그 뒤에 0이 주욱 늘어져 있는, 한 1,000조쯤 되는 수가 가장 매력적이지만 말입니다.”

스윽, 나는 테이블 위, 김한소가 올려놓은 칩을 모조리 내 쪽으로 가져갔다.

다소 과한 이 동작에, 샴페인을 마시던 중국 정보 요원의 이목이 끌리지 않을 수 없도록.

“하! 이 한 판에 올인(All in)을 했던 건가? 남의 돈이라고 통이 아주 화끈하시군!”

“거, 잔소리는 그쯤하고, 밖에 일꾼에게 칩이나 가지고 오게 시키라우.”

내 사인을 알아들었는지, 도박에 빠진 망나니 연기를 하는 김한소.

“허어, 이거이, 정신이 번쩍 드는구먼, 기래. 단숨에 빨려 버렸어.”

“쯧쯧쯧, 백두혈통도 도박장에서는 개털이구먼. 내 보기엔 이대로라면 다음 판에도 빨릴 것 같은데 말이지.”

“끄응, 그쯤 하라. 말 안 해도 아까만큼 걸었다가는 죄 털릴 것쯤은 알고 있지비. 그냥 적당히만 즐겨야갔어.”

나름 능청스러운 연기.

이제, 내가 툭 던진 사인에 그가 대답할 차례였다. 구체적인 숫자를 은유라는 가림막을 통해서.

“부르셨습니까, 고객님.”

“아까 칩 베팅한 거이 한 절반 정도만 가지고 오라!”

절반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하는 김한소.

중국 정보 요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바로 천천히 내게 말을 내뱉었다.

“여기 떼놈 핀잔 때문에 본래 걸려던 것만큼은 못 걸갔소. 그래도 괜찮습네까?”

그래, 괜찮다마다.

이 정도 신호도 못 알아들을 리 없지.

애당초 계획했던, 핑 주석에게 800조 원의 지원금을 뜯어내려던 계획. 그러나, 곧 수립될 북한 망명정부에는 그 절반뿐인 400조 원의 금액만이 들어올 것이라는 말을.

그리고.

“괜찮다마다요.”

이 정도 난관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 짓는 나.

괜찮다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김한소에게 여유로운 대답을 건넬 만큼, 모든 불상사에 대한 대비책은 다 세워 두었으니까.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따로 챙길 방법도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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