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트로이의 목마(5)
압록강과 두만강이 발원하는, 백두산 천지.
늦가을 칼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는 이곳에는, 평소의 한적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인파와 방송용 장비로 북적거리는 이곳에서, 태자당 쪽 정보 요원은 김한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긴장하지 말고. 괜히 카메라 앞에서 말 더듬다가 오줌이라도 지리면 여러 사람 골치 아프니까 말이야.”
백두산 천지에서 열리는, 북한 망명정부 수립 기념식.
사상 초유의 특종거리를 앞에 두고, 전 세계의 외신 기자들은 이 오지까지 발걸음 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각 변동 중인 동북아시아의 판도에 또다시 균열을 줄 수 있는 건수였기에.
“그럼, 슬슬 가자고. 북조선 망명정부 임시 위원장 김한소 씨.”
-찰칵! 찰칵! 찰칵!
김한소가 연단 위를 향해 계단을 오르자마자, 거세게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
미처 계단을 다 오르지도 못했건만, 외신 기자들은 경쟁하듯 손을 쳐들고는 질문 세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한소 위원장님! 멸망한 북한의 부흥 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심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백두혈통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지도자 자리에 오르다니, 북한이라는 나라는 정말 멸망 이후까지 전제 왕정 국가이다는 겁니까!”
꿀꺽, 긴장한 것인지 목울대를 꿀렁이는 김한소.
그런 그를 뒤따라온 태자당 쪽 정보 요원은, 목소리를 낮추어 당부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탐욕과 욕망이 마구잡이로 점철된, 일종의 강요나 다름없는 당부를.
“외신 기자들 앞에서 언급하는 것 절대 잊지 말라고. 왕룽 외교부장께서 말씀하셨던 그 채권 건.”
낮게 깐 목소리에 담긴 살기.
협박하듯 연신 그르렁거리던 태자당 쪽 정보 요원은, 김한소의 옷매무시를 다시 정돈하는 척,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일이 잘 풀리면, 김한소 당신 주머니에도 돈 몇 푼 정도는 찔러 줄 테니 말이야.”
“…….”
극도의 긴장감 때문일까?
매서운 영하의 날씨에도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버린 김한소의 등판.
단시일 내에 불려야 했던 몸뚱이, 나이에 맞지 않는 검은색 인민복.
전형적인 꼭두각시 모습의 그는, 심호흡을 내뱉으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날, 마카오 카지노에서 자신에게 넌지시 암시하듯 던진 말 한마디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얼토당토않은 패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건 언뜻 보시기에 목마 가면 신사분을 뼛속까지 발라먹으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던 것이었을까?
조금 진정된 심장 박동.
그리고, 그 순간.
“어이, 김한소 위원장! 내 말 알아들었냐고!”
아예 이번 기회에 제대로 길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딱! 딱! 거센 소리로 손가락을 튕기는 태자당 쪽 정보 요원.
하지만.
‘그때는 저를 한번 믿고 즐겨보셨으면 합니다. 다음에 다시 열릴 주사위 게임에서.’
그런 식의 가스라이팅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김한소.
그날, 마카오 카지노에서 들었던 확언. 그 자신감 넘치는 확신을 곱씹을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차분해져 갔다.
그저 단순히 믿고 맡기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테니까.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여는 김한소.
저 멀리, 백두산 너머 남쪽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내래 믿갔습네다. 여기까지 왔는데 믿지 않아서야 되갔습네까.”
“으하하하! 그럼! 믿어야지! 나만 믿으라고!”
등을 툭툭 두들기는 무례한 손.
굳은 얼굴의 김한소는 그 움직임을 중간에 낚아 끊고는, 태자당 쪽 정보 요원의 눈을 노려보았다.
이제껏 길들였던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날 것 그대로의 눈으로.
“뭐, 뭐야… 뭔데, 꼭두각시 따위가 눈깔을 그렇게 뜨는 건데?”
“내래 핑 주석에게 줄 선물이 있어서 말입네다.”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그마한 열쇠고리 하나를 꺼내는 김한소.
까끌까끌한 나뭇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그 뜻 모를 공예품을 바라보며, 태자당 쪽 정보 요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마(木馬)? 이건 또 무슨…?”
“정보 요원 동무가 알 것은 아이고, 높으신 분께 전달이나 잘하시라우.”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뚜벅뚜벅 연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는 김한소.
휘잉, 거세게 부는 바람 소리에 혼잣말이 들리지 않게 되자, 그는 못다 한 말을 조심스레 뒤에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트로이의 목마 배 속에 든, 한서준 그자가 집어넣은 병력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올 테니까.”
연단 중앙에 선 김한소.
그 순간, 다시 번쩍이는 카메라 셔터와 외신 기자들의 함성.
“김한소 위원장님! 질문 있습니다! 남한 정부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하겠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구체적인 정부 조직은 어떻게 구성할 것입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위원장님!”
그들의 물음을 작은 미소로 받은 김한소가 차분한 목소리로 첫 말문을 떼었다.
“반갑습네다, 북조선 망명정부 임시 위원장 김한소입네다.”
강제로 꼭두각시가 되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아주 평안한 얼굴.
아니, 그는 어쩌면 자신이 꼭두각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먼저 중차대한 발표부터 하갔시오. 우리 공화국의 재건을 위한 재정 확보 방안!”
마카오 카지노에서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던 한서준.
그가 말한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정작 영문도 모르고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는, 자신이 아니라 베이징의 높으신 분들일 테니까.
매서운 바람이 조금은 사그라든 늦가을. 숨을 들이켠 김한소가 우렁차게 함성을 내지르듯 말을 내뱉었다.
“서한만 석유를 기반으로 한, 공화국 영웅 국채! 그 발행 계획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입네다!”
* * * *
간만에 찾은 용산 지하 벙커.
민주평통 부의장직을 사임하고도, 성북동 상왕은 내게 적당한 명예직 같은 걸 던져 주었다.
어쨌거나, 북한 지역을 둘러싼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이곳에 출입할 그럴싸한 명분은 있어야 했으니까.
“나는 말일세. 한 부의장, 아니, 이제는 한 회장이라 해야겠군. 아무튼, 자네만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니까.”
오자마자 인사말도 없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드는 성북동 상왕.
이미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받은 모양이었다. 솟아오르는 실소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
“사실 1,000조 원 중 부족한 8할을 어떻게 만드나 싶었는데 말이지. 이걸 남의 주머니를 터는 것으로 해결하겠다니!”
뭐, 사실 나머지 2할 부분도 남의 주머니를 털기는 했다. 이제는 저승에서 열심히 노역 중일 김정은의 주머니를 턴 돈이었으니까.
커피잔을 입술에서 떼며, 나는 이번 계획의 세부 내용에 대한 설명을 추가로 곁들였다.
“핑 주석의 지원 자금을 빼돌리면서 김한소의 신변도 같이 빼돌리고. 그러면, 자동으로 채권 또한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리겠지요.”
“자네가 왜 트로이의 목마 어쩌고 소리를 한 건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베이징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어.”
원화 800조 원짜리 폭풍을 일으킬, 트로이의 목마.
이제, 그 목마의 배 한가운데에 달린 경첩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릴 때다.
내가 살짝 눈치를 주자, 곧바로 국방장관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성북동 상왕.
“이보게, 박 장관. 지금 청천강 이북에서 우리 군 상황은 좀 어떤가?”
“신의주, 청진, 라선 같은 거점 도시들은 확실히 장악했습니다. 내륙 쪽도 출동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접수 가능한 상황입니다.”
“개마고원 쪽 말이로군. 일단 현 상황 유지하고, 당분간 병력 이동은 최소화하도록.”
“그, 어르신… 한 회장님과 함께 뜻하신 바는 충분히 알긴 합니다만.”
조금 우려하는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흐린 말끝을 마저 이어 붙여 나가는 국방부 장관.
군사 전문가인 그였기에, 그의 이의 제기는 나름 타당해 보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빨치산으로 신분을 위장한 중국 특수부대가 해당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짠 큰 그림을 전부 보지 못했기에 내린 판단이었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회장님…?”
“이번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언뜻 보기에, 엉킨 매듭처럼 복잡해 보이는 이번 안건.
그러나… 이를 풀기 위해 나는 마카오에서 잘 여민 칼 한 자루를 준비해 두었다. 오로지 내 확언에만 반응하는, 김한소라는 날 선 칼을.
“핑 주석이 준다는 세뱃돈 400조 원. 이번 설이 지나기 전에 호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을 겁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는 새해 첫날.
나는 그 칼을 칼집에서 뽑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꼭두각시 역할을 던져버리고 한국으로 망명할 김한소와 함께.”
그 칼끝으로 핑 주석의 목젖을 정확하게 노릴 것이니까.
* * * *
“으으… 추워라. 무슨 늦가을 날씨가 겨울철 하얼빈보다 더 추운 것 같지?”
김한소가 연설을 하는 백두산 천지에서 수십km 떨어진 개마고원.
이질적인 복장의 중국군 특수부대원 두 사람. 선발대로 보이는 그들은, 날씨에 비해 얇은 옷을 입고서 지휘소로 쓰일 장소를 미리 탐색하고 있었다.
“여기 개마고원이 어지간한 시베리아만큼 춥다더니만, 그게 사실인가 봅니다.”
“빌어 처먹을! 방한복 보급이나 좀 똑바로 주던가. 앞으로 일주일을 어떻게 참으라고!”
물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특수부대 후임자는… 이곳에 비밀리에 잠입한 국정원 요원이었지만.
“도대체 왜 이리 보급이 안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어루숙한 신병을 연기하며, 정보를 캐묻기 시작한 국정원 요원.
“아아, 넌 신병이라 몰랐겠군. 하여간, 이래서 짬 안 되는 것들은.”
그의 물음에 선임자 특수부대원은 핀잔을 주며 대답했다.
“우리가 신분이 기밀이잖나. 그러니, 인민해방군에서 물자를 보낼 수가 없다는군.”
“아아, 그래서 지금 입는 것도 다 외국 장비를 입는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뭐, 이 넝마 옷도 이제 조만간 쓰레기통에 처박을 테지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씨익, 뜻 모를 웃음을 짓는 선임자.
국정원 요원이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고량주 병을 넘기고 나서야, 그는 나머지 대답을 해 주었다.
“크흐, 술맛 죽이는군. 조만간 본국 정부에서 북조선 망명정부에 막대한 지원금을 뿌린다고 한다.”
“아아!”
도수가 높은 술을 빨리 마셔서일까? 불콰하게 취한 얼굴의 선임자 특수부대원.
그는 북한 임시정부 지휘소로 쓸 예정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어, 이제는 김한소의 초상화까지 벽에 걸린 곳으로.
“뭐, 저 꼭두각시도 발목이 묶이는 셈이지.”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스르르 눈을 감는 선임자 특수부대원.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그가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제깟 놈이 어딜 도망가겠나. 비록 허울뿐이지만, 남조선 돈으로 400조 원을 관리해야 하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