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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86화 (250/300)

286화 칸(Хан) 회장(2)

사람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법이다.

“좀 아쉽군.”

“주석 각하…?”

핑 주석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탄탄한 안전이 담보되는,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90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

심지어 비밀번호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핑 주석 혼자만 알고 있는 상황.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문득 그의 머릿속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심 한 조각.

“이 많은 돈을 죄 외국에 풀어야 한다니. 괜히 배만 아프단 말이지. 그놈들이 이 돈 대부분을 빨아먹을 텐데 말이야.”

중국 측의 명시적 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종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간접 지원만이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

막대한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이 돈은 세계 방방곡곡으로 풀어질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핑 주석의 말에 동의를 표한 중국 재무부장.

“확실히… 이 자금이 중화 대륙 내부에서 계속 순환한다면, 경제 성장률이 1%는 더 오를 겁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지금 꼬라지를 보라고.”

점점 엔진이 꺼져가는 중국 경제에는 10원 한 푼 돌지 않고서.

“두 자릿수대 성장률이 깨지게 생겼다. 이러면 분명, 가난뱅이들의 발목에 채워둔 족쇄도 같이 깨질 터.”

눈을 감고 무시해 왔던 대륙의 빈부격차.

당장이라도 봉기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빈곤한 농민공이 참고 있는 이유는 공포 정치와 함께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서였다.

언젠가는 자신도, 성장하는 국가와 함께 나아지리라는 헛된 희망.

“아랫것들이 들고일어난다면 정권 유지에 치명적일 터. 해서, 이 자금이 소화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주석 각하.”

그리고, 핑 주석은 그 헛된 희망을 좇아 낭떠러지 끄트머리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저 왼쪽 호주머니에서 오른쪽 호주머니로 돈을 옮기면 될 뿐이니 말입니다.”

내디딜 발밑에 무엇이 있을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로.

“그 옮기는 손이 누가 되느냐가 중요하겠군.”

“마침, 딱 적절한 손 하나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자가 있었지.”

핑 주석의 집무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동북아시아 지도.

그는 고개를 치켜올려 북방이 그려진 곳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동토를 깔고 앉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그 남자가 있는 곳을.

“뿌틴, 그 미친 대머리에게 이런 심부름도 다 시키는 날이 오는군.”

* * * *

같은 시각.

성북동 상왕의 자택.

늘 빈객으로 북적거리는 이곳은 오늘따라 유독 한산했다.

오직 한 사람,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한 빈객이 올 예정이었기에.

“어르신, 저 왔습니다.”

“아아, 그래. 기다리고 있었네.”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한 남자. 성북동 상왕의 바지사장, 최 대통령이었다.

“전화로 해도 되는데 말이지, 직접 보고 논의할 게 있다고?”

“사안이 좀 큰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결정하기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최 대통령. 평소와 조금 다른 그의 모습에 성북동 상왕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음…? 일단, 어디 한번 보세.”

나무 탁자 위에 올려진 두 개의 문건 첫 페이지는 각각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국민연금 기금 운용본부]

중국 증시 공매도 및 풋 옵션(Put Option) 대량 매수 관련 보고서.

-[한국투자공사]

한국-러시아 합작 은행 계획과 관련한 보고서.

건네어진 보고 문건을 받고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눈썹 산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성북동 상왕.

보고서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는 최 대통령에게 대답했다.

“이런. 그래, 그랬었지. 하도 급히 결정된 일이라 아직 교통정리가 채 안 되었을 게야.”

“어쩐 일입니까?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 둘 다 나랏돈을 굴리는 데에는 대들보나 다름없는데.”

“뭐, 이런 급진적인 생각을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지.”

드르륵, 탁자 가장자리에 달린 서랍이 열리고, 잉크병 하나와 만년필 한 자루가 그 위에 올려졌다.

묵직한 잉크 향을 맡으며, 무언가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인 성북동 상왕.

앞으로 진행될 일들을 눈앞에 그리며, 그는 문득 드는 솔직한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숫제 기병도를 든 유목민 같단 말이지. 한서준 회장, 그 친구는.”

“어르신…?”

이어지는 설명.

러시아를 무대로 한,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설명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 대통령.

“뿌틴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고요? 그 신(新) 러시아 제국의 차르라 불리는 남자를 말입니까?”

“그렇다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마지막 키가 있다더군. 1,000조 원짜리 복권이 당첨될지, 낙첨될지 정하는 키가 말이지.”

빙그레 웃음 지은 성북동 상왕.

잉크를 묻힌 만년필을 손에 쥔 그가 두 개의 보고서에 서명을 끝냈다.

믿음과 신뢰가 듬뿍 들어간 한마디 말과 함께.

“한서준 회장이 말한 대로 하라 하게.”

“어르신, 정말 그리해도 될는지요…?”

“왜, 불안한가?”

흔들리는 최 대통령의 눈동자.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기에 받아들인 바지사장의 자리. 그러나,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런 그에게 퍽 견디기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너무 과한 위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의 곳간 두 개를 전부 한 사람의 판단에 걸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이런, 이 친구. 아직 잘 와닿지 않나 보구먼.”

“예…?”

“지금 용산 벙커 안에서 맞대고 있는 수십여 개의 머리통들. 거기서 어디 그럴싸한 해결책 비슷한 것이라도 나온 게 있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최 대통령.

그런 그를 바라보는 성북동 상왕은, 친필 서명이 된 두 개의 보고서를 건네며 말을 건넸다.

“당나귀 탄 졸개 백 명이 있다 한들, 무장한 중기병 하나를 이기기 어려운 법일세.”

그리고, 문득 그의 머리에 든 피상적인 이미지 한 장.

“그래, 마치 뭐랄까… 지금 초원길을 지나 모스크바로 향하는 그 친구.”

생각해 보니 그랬다.

러시아어로 한 회장은 발음상 묘한 단어로 바뀌지 않았던가.

마치, 한때 세상 전체를 발아래에 두었던 지배자를 뜻하는 그 단어로.

“칸(Хан) 회장, 그자처럼 말이지.”

* * * *

뭔가 묘하게 귀가 가려웠다.

옆자리의 김원철 아저씨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넬 정도로.

“뭐여, 왜 자꾸 귀를 만지작 버릇하는 겨? 중이염인가, 아니면 외이도염?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할 땐 귀마개 끼고 하는 게 낫다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좀 간질간질하네요. 꼭 뭐랄까.”

덜컹, 덜컹.

광활한 평야를 질주하는 기차 일등석 안.

나와 김원철 아저씨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는 깊게 몸을 묻었다.

“누가 제 욕을 한다기보단, 이상한 이름 같은 걸 붙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여, 그 싱거운 느낌은. 뭐, 그건 그렇고. 이젠 슬슬 말해도 괜찮지 않아?”

두리번두리번, 객차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내게 귓속말을 건네는 김원철 아저씨.

파리, 루브르 박물관부터 지금 이 열차 안에 오르기까지.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러시아 측 요원 때문에, 내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던 김원철 아저씨.

퍽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열차 안이 고요해지자마자 내게 물음을 던졌을 정도였으니.

“대관절 뿌틴 대통령이 갑자기 왜 튀어나온 겨? 핑 주석이 쥐고 있는 비밀번호를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는 또 뭐고.”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광대한 목초지. 마치 말을 탄 무사가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다.

호출 벨을 눌러 사무장을 부른 나는, 그에게 100달러짜리 지폐 다발을 안겨주며 당부의 말을 건네었다.

“이제부터 별도로 호출하기 전까지 다가오지 말아 주세요. 직원들 전부.”

“아, 예! 알겠습니다.”

“다른 객차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일 또한 절대 없도록 신경 써 주시고.”

“물론입니다.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굳이 받을 것까지는 없던 충성 맹세까지 받은 후에야, 비로소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나는 파리에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막대한 자금이 담긴, 스위스 은행에 대해서.

“일단, 핑 주석만이 아는 비밀번호. 그걸 알아내는 것 자체는 불가능합니다.”

“그야… 그렇긴 하지.”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시도해 보긴 했다.

국가의 정보기관뿐 아니라, 탄약그룹 자체적으로도.

그러나, 결국 알아낸 것은 없었다. 오로지 핑 주석이 비밀번호를 제 손에만 꼭 쥐고서 놓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그리고.

“심지어 북한 망명정부 채권 매각 대금도 죄 거기에 넣어 두었다면서.”

이번에 발행한, 서한만 유전을 담보로 한 채권 매각액까지.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틀어쥐려는 핑 주석.

“그러니까요. 무려 원화로는 900조 원짜리 보물창고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희망이 보였다. 손아귀에 꽉 틀어쥐려 할수록, 결국 아래쪽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게 되는 법이니까.

“보물은요. 결국, 창고 안에만 있으면 그냥 빛나는 돌덩이에 불과한 법입니다.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무슨 말이여…?”

“요는 이겁니다. 보물이 이동하는 타이밍.”

특히나, 중국 내로 자금을 돌리면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이토록 규모가 큰 거액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원화 900조 원의 막대한 자금. 하지만, 결국 써야 하는 돈입니다. 망명정부 군대 하나를 새로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사기 위해서요.”

그리고, 내가 아는 핑 주석이라면, 신중국의 시황제가 되려는 핑 주석이라면, 여기에 손을 뻗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욕심으로 부풀어 오른 배가 터져나갈 위험이 있더라도.

“가급적 자국에 이 막대한 돈이 풀리길 바라겠지요.”

“어… 중국이 직접 지원하기는 어려운 상황 아니여? 그것도 군용 물자를.”

“틈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찾은 틈.

왼쪽 호주머니에서 오른쪽 호주머니로 돈을 옮기려면… 결국, 외부의 손 하나가 필요한 법이다.

일종의 우회로로 쓰일 수 있는 손이.

“중국 내부에서 직접 물자 조달이 어려운 상황인 지금, 우회로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핑 주석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우회로로 최적인 나라는 바로.

“러시아라는 우회로가. 그리고, 저는… 그 우회로 바로 옆 풀숲에서 숨죽인 채로 매복을 할 겁니다.”

끼익, 낡은 선로 위에서 브레이크를 잡은 건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모스크바역에 멈추는 기차.

착지 포인트를 잘 잡은 모양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크렘린궁.

러시아 특유의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그 건축물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궁궐 안 옥좌에 앉은 사내 한 사람을 생각했다.

“신(新)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되고픈, 뿌틴이라는 남자와 함께.”

이제부터 내 손을 잡을, 블라디미르 뿌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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