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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88화 (252/300)

288화 칸(Хан) 회장(4)

탁, 탁.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뿌틴 대통령.

그는 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를 내게 던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대답을 하라는 뜻.

참… 이 양반, 스타일 하나는 확고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좀 더 이야기가 쉬워지는 것도 있겠지만.

“일단은.”

나는 방사능이 들어있지 않다는 홍차를 입술에 적시고는, 나는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어수룩한 장님 흉내를 내어 주십시오.”

“장님이라.”

“핑 주석이 보낼, 원화로 900조 원에 육박하는 자금. 어차피 일반 은행으로는 받지 못할 것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뿌틴.

애당초 그는 자신이 거느리는 금융 엘리트 수하들을 그다지 믿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화로 900조 원이라는 거액이 손에 쥐어지게 된다면, 아마 제3국으로 잠적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따로 생각해 둔 방안이 있는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건 바로.”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의 상황은 핑 주석에게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벼랑 끝으로 그를 몰고 가더라도 전혀 눈치를 챌 수 없게 말이다.

“특수은행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러시아와 한국이 합작한… 일종의 일회용 페이퍼 컴퍼니를요.”

“대놓고 금융 사고를 터트리겠다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이거,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군.”

내가 지구본에 총알 두 방을 박아넣은 후부터, 뿌틴 대통령은 내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장고의 시간 따위는 없이, 아주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

“좋다. 핑 주석의 분노 따위, 어차피 내 알 바 아니고. 또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핑 주석도 실각을 면치 못할 터.”

“일단 성공만 하면 각하께 부작용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지는군.”

그러나, 뿌틴 대통령은 내가 저지른 총알 연출이 마음에 든다고, 그것만으로 대계를 결정할 자 또한 아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손수 주전자를 집어 들고 내 빈 찻잔을 채우는 뿌틴 대통령.

찻잔의 용량을 아득히 넘어, 가장자리에서 흘러내려 식탁보를 적시는 홍차.

주전자 하나에 담긴 홍차를 모조리 비우고 난 후에야, 그는 내게 비장한 목소리로 물음 하나를 던졌다.

“칸(Хан) 회장, 네놈이 내게 안겨줄 것이 무엇인지가 말이야.”

테이블을 따라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홍차 향이 나는 압박감.

보통 사람이 이 상황을 마주한다면 아마 오금이 저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마, 마지막 시험 겸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너무 속이 훤히 보이시는 것 아닙니까.”

그가 가한 이 압박은, 내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알고 있으니까. 뿌틴 대통령이, 그리고 역대 러시아의 지배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뭐라…?”

“북한 지역을 통째로 틀어쥘 제게, 뿌틴 대통령께서. 아니, 신(新) 러시아 제국의 차르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뿐이니까요.”

달그락, 탁자 위에 놓인, 뿌틴 대통령이 들고 있던 주전자.

약간의 놀람과 함께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내가 내뱉은 말은 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으니까.

“나선부터 청진까지. 원하시는 항구를 고르시지요. 아무 걱정 없이 극동에서 부동항을 쓸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 * * *

살 떨리는 러시아 일정을 마친 후, 다시 돌아온 서울.

인천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반쯤 끌려가다시피 성북동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번 일정의 결과를 듣기 위해서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양반이 있었으니까.

“해서, 청진항을 99년 동안 임차해 달라?”

뿌틴 대통령이 선택한 부동항은 청진이었다.

아예 남쪽으로 내려와 원산을 노리면 어쩌나 고민하긴 했지만, 그는 다행히 청진만으로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보다 정확히는, 앞으로 있을 미래에 행여나 있을지 모른 우려를 아예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홍콩같이 아예 할양은 아니고요. 군사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으면 된다네요.”

추가로 곁들인 내 설명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성북동 상왕.

한참을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기를 돌려본 모양이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건지 그가 숙인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싸게 얻었군. 역시 타고났다니까. 정치가와 장사꾼의 면모 둘 다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후한 평가.

지극히 장사꾼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는데, 정치가 입장에서도 퍽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내게 물음을 던지는 성북동 상왕.

“응? 왜 그러나?”

“아뇨. 한 소리 들을 생각은 했는데 말이죠. 항구 임차는 주권과 관련한 문제 아닙니까.”

“이 사람, 다 알면서 또 그런 소리를.”

피식, 별것 아닌 것으로 그런 고민을 한 거냐며 작게 웃음 짓는 성북동 상왕.

눈 내린 뒤뜰에서 마음껏 뒹굴뒹굴하는 복실이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러시아 때문에 골머리야 좀 썩겠지만, 그쯤이야 감내할 만도 하지.”

“99년짜리 목줄이 묶일 예정인데도 말입니까?”

“뭐, 핑 주석은 가까이 있고, 뿌틴 그 양반이야 저 멀리 시베리아 너머 모스크바에 있으니까.”

부스럭부스럭, 말을 마치고는 방 한쪽의 캐비닛을 뒤적이는 성북동 상왕.

그는 내게 미합중국 기밀 표시가 적힌 외교 문서를 건네었다.

“양 웬리 부통령도 그러더군. 한 회장, 자네 생각대로 짠 판도가 미합중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고.”

그새 한·미 간의 공식 외교 채널에서 대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비공개 기밀 외교 문서를 펼치자, 곧바로 내 눈에 들어온, 전형적인 양 웬리 부통령의 평소 어투가 도드라진 문구.

-워싱턴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차후 서울은 베이징의 턱밑에 놓인 비수 역할을 할 것이라고. 그리고 모스크바의 엉덩이를 찌를 표창이 될 것이라고.

비수니 표창이니, 삽시간에 뾰족한 무언가가 되었지만… 뭐, 그런 것쯤은 크게 상관없다.

이런 자잘한 비용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이번 수확물의 양은 어마어마할 테니.

“뭐, 이래저래 잘 되었네요. 그러면.”

탁, 기밀 외교 문건을 접어, 다시 성북동 상왕에게 건네는 나.

“모든 퍼즐 조각은 다 모인 듯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내 손으로 만들어 낸 모든 인과율이 마치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한순간에 맞물려 움직일 시간이.

성북동 상왕 역시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음을 던지는 그의 모습.

“해서, 언제쯤 조립할 생각인가? 나도 빨리 전체 그림을 보고 싶어서 말이지.”

“국정원에서 김한소의 탈출 계획을 짜고, 러시아-한국 합작은행을 만들려면 한 달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한 달이라. 딱 적당하군.”

합작은행으로 원화 900조 원이 들어오는 그 순간, 나는 곧바로 김한소를 빼돌릴 것이다.

꼭두각시일지언정 백두혈통이라는 우두머리를 잃은 북한 망명정부는 순식간에 와해될 터다.

정치적으로도, 재무적으로도.

그리고… 그 모든 후폭풍은 핑 주석과 그의 지지기반인 태자당을 향할 터.

“제법 볼 만하실 겁니다. 베이징에 불어닥칠 거대한 바람이 말이죠.”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음 짓는 성북동 상왕과 나.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눈을 치켜뜬 성북동 상왕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참. 그나저나, 그 러시아 합작은행 말이지. 이름은 어떻게 지을 생각인가?”

“아, 그게 말이죠. 사실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작명 부분은 자기가 정하고 싶었던 걸까?

마치 첫 손주의 이름을 짓지 못한 노인처럼, 조금은 실망하는 모습의 성북동 상왕.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뿌틴 그 양반, 그 자리에서 즉시 이름을 지어버리더니, 제 의견도 묻지 않고 서류에 도장을 찍더라고요.”

뿌틴 대통령, 그 괄괄한 양반이 지은 은행 이름이,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마음에 들었으니까.

“칸(Хан) 은행. 어디 만리장성 이남에서 마음껏 날뛰어 보랍니다.”

* * * *

한 달 후.

베이징 중난하이, 핑 주석의 집무실.

“칸(Хан) 은행이라고 했었던가?”

“예, 그러합니다. 주석 각하.”

원화로 90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을 송금하는 날이어서일까?

평소보다 훨씬 가시 돋친 듯한,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핑 주석.

“이거야 원, 뿌틴 그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도대체 은행 이름을 왜 그렇게 지은 것이지?”

“워낙에… 괴팍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핑 주석의 심기에 괜히 책잡히고 싶지 않은 왕룽 외교부장.

“제 딴에는 강해 보이는 단어 아무것이나 주워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멍청한 대머리는.”

늘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핑 주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달콤한 아부의 언사를 쏟아내는 데에 아낌이 없었다.

“위대한 중화의 역사, 그 가운데 원나라의 칸(Хан)이 제 나라를 짓밟았다는 것조차 잊은 듯하지만 말입니다.”

피식, 그제야 조금 기분이 풀린 듯 웃음 짓는 핑 주석.

하기야, 공식 외교 석상에서마저 워낙 기행으로 유명한 뿌틴 대통령이었다. 이런 작명 부분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여기는 핑 주석.

“그래, 그렇겠군. 하기야, 은행 이름 따위야 중요한 것이 아니지.”

심호흡을 길게 내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시작될, 위대한 대(大)중화의 비상(飛上)이 본질일 터.”

자금이 예치된, 스위스 은행으로부터 받은 특수 송금 장치가 있는 곳으로.

“실로 그러합니다. 자금성의 용상이 비어 있는 이유는, 오로지 주석 각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곤 하니까요.”

“이 사람도 참. 무슨 그런 말을.”

철컹, 보안 절차가 마무리되자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기계장치.

모니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환한 불빛을 바라보며, 핑 주석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시작하지.”

타닥, 타닥.

조심스레 써 내려가는 비밀번호.

-c1j9d9g2k1r0d1b4s!

복잡하기 짝이 없는 비밀번호를 일말의 오류 없이 적어넣자, 작동하는 송금 프로그램.

흰색의 대기열 표시가 녹색으로 바뀌어 100% 송금이 완료되었음을 알리자, 그제야 핑 주석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흠뻑 젖은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핑 주석이 왕룽 외교부장에게 지시했다.

“뿌틴, 그자에게 말하도록. 송금은 다 끝났다고. 그리고.”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다는 듯, 중간이 잘려버린 말허리.

곧바로, 퍽 멋진 말이라도 생각이 난 듯, 핑 주석은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이제까지 알던 세상 역시 끝났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자신의 세상이 제 손으로 끝났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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