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칸(Хан) 회장(5)
모스크바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북쪽, 눈 쌓인 침엽수림 한복판.
-삐이이이익!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금속제 호루라기 소리.
허공을 찢어버릴 듯, 날카롭게 겨울 공기를 울리는 바람 소리. 그 사이로 군용 셰퍼드 대여섯 마리가 콧김을 내뿜으며 내달렸다.
-컹! 컹! 컹!
피 냄새를 맡아서인지 잔뜩 흥분한 셰퍼드.
이내, 개들의 입가에는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무언가를 죽일 듯이 꿰뚫으며.
“그만. 작작 좀 물어뜯어라, 이놈들아.”
엽총 한 자루를 들고는, 개들을 뒤따라 내달려 온 뿌틴 대통령.
이런 사냥이 익숙한 듯, 그는 비릿한 짐승 피 냄새에도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집채만 한 흑곰 사체를 보고 있음에도.
-으르르르…! 컹! 컹!
목줄을 잡아끌어 성난 개들을 진정시킨 뿌틴 대통령.
엽총에 흉통을 관통당한 흑곰. 사체에는 총상 외에도 목덜미에 사냥개들이 물어뜯은 이빨 자국이 지저분하게 나 있었다.
“이런, 가죽이 조금 상한 것 같군. 박제 처리하는 장인들이 번거롭겠어.”
내뱉은 말과는 달리, 만족스러운 얼굴의 뿌틴 대통령.
솔솔 불어오기 시작하는 눈보라에, 그만 사냥을 멈추고 돌아갈까 싶던 그 순간.
“각하.”
“그래, 왔는가.”
뿌틴 대통령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이는 행정관.
막 모스크바에서 내달려 온 그는, 보고 문건 하나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핑 주석이 스위스 은행 측에 송금 요청을 끝냈습니다. 24시간 이내로 칸(Хан) 은행에 전액 입금할 것이라 합니다.”
무신경한 표정으로 문서를 힐끔 들여다보는 뿌틴 대통령.
경사진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그는, 다시 보고 문건을 행정관에게 되돌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리석은 건 사람이나 흑곰이나 매한가지로구먼.”
눈앞에 쓰러진 흑곰 사체가, 꼭 핑 주석을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면, 발밑에 함정이 있는지 채 볼 겨를도 없으니 말이야.”
그리고, 그때.
뿌틴 대통령에게 말을 흐리며 한 발짝 다가오는 행정관.
“저… 각하, 한 가지 여쭈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 짓는 뿌틴 대통령.
행정관은 추가로 뒷말을 이어 붙이려 했건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핑 주석이 보낸 그 돈, 이쪽에서 가로채자고?”
“……!”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곧바로 속마음을 간파당했으니까.
무안한 듯,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를 떨구는 행정관에게 뿌틴 대통령이 혀를 찼다.
“쯧쯧, 생각이 짧군. 저 흑곰 사체를 봐도 느끼는 게 없다는 말인가?”
“…송구합니다. 하지만, 알고 싶습니다. 어째서 쉬운 길을 가지 않으시는지 말입니다.”
기실, 원화로 물경 900조 원에 육박하는 거액의 자금인 만큼, 혹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일 터.
그러나, 뿌틴 대통령은 그 막대한 자금 가운데 단돈 1원 한 푼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뭐, 자네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궁금해할 만도 하겠군.”
건드려서는 안 되었기에, 그리고 건드릴 수조차 없었기에.
“칸(Хан) 회장… 그자가 내게 이렇게 말했거든.”
어떤 강요나 윽박지름도 없었던, 그날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협상.
홍차 한 모금을 입가에 머금으며, 뿌틴 대통령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그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
‘나선부터 청진까지. 원하시는 항구를 고르시지요. 아무 걱정 없이 극동에서 부동항을 쓸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날, 모스크바 사격장에서 있었던, 지구본에 권총을 쏘아 가며 벌이던 협상.
뿌틴 대통령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이야기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난 협상에, 그가 이러한 말을 던질 정도로.
‘하! 고작 그걸로 끝인 건가? 구두 계약 하나만으로?’
‘여기서 더 필요할 게 있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손에 쥔 권총을 까딱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던 뿌틴 대통령.
‘겁이 없는 자인가,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인가.’
나름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던 회담의 끝자락에, 다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아니면, 그저 뭣도 모르고 입만 나불댈 줄 아는 자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런 화약 냄새 따위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
칸(Хан) 회장이라 불리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는, 뿌틴 대통령에게 역으로 반문했다.
‘셋 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역으로 묻고 싶네요.’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어쩌면 위험에 가까울 정도로 맹랑한 어투로.
‘만에 하나, 뿌틴 대통령께서 이 원화 900조 원이 탐난다 하신들… 뭘 어쩌실 겁니까.’
‘뭐라…?’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날 것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그의 얼굴에는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자신이 짠 판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체스 말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움직임 따위는 이미 손바닥 안에 둔 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그 돈, 통으로 가져가 뱃속에 꾸역꾸역 넣어 드신들 소화도 못 시킬 돈인데 말이죠.’
‘…….’
‘우크라이나 땅에 눈이 벌게지신 분이 핑 주석 긁어서 유럽 쪽에 전력 투사 못 하시고 싶은 겁니까?’
너무나도 맛있어 보이는, 그러나 독이 든 것이 명백한 원화 900조 원의 자금.
자금을 넘겨주지 않으면, 핑 주석이 보내는 모든 원한이 모스크바를 향할 터였다.
‘또, 그렇게 되면, 그나마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마저 중국에 넘어갈 판인데. 아예 태평양 쪽 부동항은 영영 못 얻고 싶으신가요?’
‘…….’
그것도, 북한 망명정부가 없어지지 않기에, 권력의 줄을 끝내 붙잡고 있는 핑 주석의 날 것 그대로의 원한이.
‘거기에, 통일 한국과의 거래, 중국과의 거래, 전부 반 토막, 반의반 토막이 날 텐데, 그 손해가 900조 원보다 적겠냐 이 말입니다.’
‘…….’
연이어 쏟아지듯 몰아치는 타당한 반론.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기에,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이어나가는 뿌틴 대통령.
그런 그에게, 마지막 쐐기 같은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다가왔다.
‘사실 그 돈 떼일까 봐 걱정이 좀 되긴 합니다. 근데 어쩔 겁니까? 뿌틴 대통령께서 뭘 할 수 있습니까?’
뿌틴, 당신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독이 든 성배를 마실 능력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저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모아서 먹는 것일 뿐.
‘양쪽 손에 든 떡 보고서 군침만 흘리다가, 결국 청진항 얻어가는 선택지에 사인하는 것 말고는 뭘 할 수 있습니까.’
‘…….’
여러 차례 총알이 박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금속제 지구본.
툭, 툭. 권총 총구 끄트머리로 그 지구본의 청진항을 가리킨 칸(Хан) 회장.
뿌틴 대통령이 떠올린, 그날 회상의 마지막 장면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칸(Хан) 회장의 모습이었다.
‘최선의 결정. 잘 부탁드립니다.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는데, 이딴 일로 얼굴 붉혀야 쓰겠습니까.’
아주 강한 자기 확신으로 무장한 모습이.
* * * *
“어찌 그런 무도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지금. 침엽수림이 울창한 사냥터 안.
그때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는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는 행정관.
“무도하기야 했지. 하지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뿌틴 대통령. 청명한 겨울 하늘 위로 연기를 내뿜고는, 그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틀린 말은 없더군. 그리고.”
손가락으로는 피범벅이 된, 핑 주석을 꼭 닮은 흑곰 사체를 가리키며.
“자칫 과한 욕심을 내었다가 저 흑곰 꼴이 될 뻔도 했고.”
“대통령 각하….”
툭, 툭.
눈 덮인 땅 위에 아무렇게나 털어버린 담뱃재.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뿌틴 대통령이 행정관에게 물음을 던졌다.
“24시간이라고 했던가.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송금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예, 그렇습니다.”
“바로 칸(Хан) 회장에게 알려주게. 그 괴상한 사연 담긴 돈, 들어오자마자 바로 가져가라고. 그리고.”
지시를 내리면서도 좀처럼 흑곰 사체에서 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한 시선.
잠시 말허리를 자른 채, 가만히 머릿속에서 할 말을 고르던 뿌틴 대통령.
곧바로, 뒤돌아선 그가 말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침엽수림이 울창한 이곳 사냥터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돌아가는 이 상황이 퍽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일이 다 마무리되면 언제 모스크바에 오라고 하지. 후에 사내들끼리 술이나 한잔 진하게 나누면 좋겠구먼.”
* * * *
“난 진짜, 그때 우리 회장님이 정신이 반쯤 나간 줄 알았잖어.”
그날, 뿌틴 대통령과의 협상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지금 이렇게 김원철 아저씨가 과장된 몸짓으로 오버하는 것처럼.
“오금이 막 떨리고 오줌 방울도 찔끔 나올락 말락 했던 게, 이거 죽으면 내 재산은 다 어디로 가나 싶었다니까.”
“뭘 또 오버하십니까. 그냥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서 있으셨으면서.”
나름 특전사 출신이어서 그런 걸까?
그 공포스러웠던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선 채 자리를 지키던 김원철 아저씨.
물론, 그날의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평소처럼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재산이 가긴 어딜 가요. 다 알아서 자녀분들께 가겠죠. 뭐, 박자옥 여사님한테도 갈 수도 있고.”
“여편네는 이혼할 때 아파트 가져갔는디. 여기서 또 줘야 한다니 무슨 소리여.”
어쩐지, 퇴근하고서도 자꾸 나랑 같이 있으려고 하더니만. 살고 있던 아파트를 다 줘버린 거였나.
진짜 뭔가 억울하다는 듯, 지금 가진 재산만큼은 줄 수 없다는 김원철 아저씨.
그런데, 이 양반. 전처분하고 다시 만나는 것 아니었나.
“가정법원 판사님도 사람인디, 설마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결정을 할 리가 있나.”
“예전에 전화하시는 거 들어보니까, 재결합하시려는 것 같던데…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김원철 아저씨의 가정사야 알아서 원만하게 해결할 문제다.
진짜 당면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오늘 오후 2시였죠. 입금 시간이.”
“그랬었지. 슬슬 확인해 볼 시간이네.”
핑 주석이 자금을 예치한, 스위스 은행의 칸(Хан) 은행으로의 송금 시간.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한 건지, 성북동 상왕은 아예 회장 집무실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 정도였다.
-칸(Хан) 회장?
“적어도 한국에서는 한 회장입니다. 칸 어쩌고 하는 건 러시아 한정이라니까요.”
실시간으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뭘, 듣기 좋으면서. 꼭 어디 유목 제국 지배자 같은 칭호 아니던가.
“아, 예.”
-각설하고, 이 중차대한 순간에 유선상으로나마 같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틱, 틱, 틱, 틱.
시곗바늘의 초침이 정확히 2시 정각을 알리자,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유세나 보좌관의 들뜬 목소리.
“스위스에서 전화 왔습니다! 지금 바로 칸(Хан) 은행으로 송금 시작한다고 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남은 산봉우리를 넘게 된다.
전화기 너머의 성북동 상왕 역시 들뜨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으로, 그는 이런 말까지 덧붙일 정도였으니까.
-한반도, 동북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바꿀, 대동강 물 팔이 사기극을 보게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