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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90화 (254/300)

290화 안전장치(1)

-어처구니가 없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모니터에 띄워진 영상 통화.

그리고, 헛웃음을 켜며 질렸다는 듯, 말을 내뱉는 성북동 상왕.

“현재 칸(Хан) 은행 계좌 최종 확인 중입니다! 전산 조회 결과…!”

파티션 너머에서 들려오는, 배경음악과도 같은 유세나 보좌관의 긴장된 목소리.

세기의 거래. 아니, 세기의 사기를 두 눈으로 바라보는 성북동 상왕은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세상에 이런 거액을 단 한 번에 주고받는 거래를 보다니 말이야.

그리고, 그 순간.

“입금 확인 완료! 원화 약 900조 원, 확실하게 칸(Хан) 은행에 입금되었습니다!”

마침내 팔려버린, 21세기의 대동강 물.

-와아아아아아!

모니터에 띄워진, 영상 통화 너머로 들리는, 정부 각료들의 환호성 소리.

이제껏 한발 한발 내디뎌 온, 한반도를 판돈으로 건, 고된 산행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끝났다…!”

턱, 하고 풀려버린 맥에 힘을 잃은 내 두 다리.

가죽 소파에 쓰러지듯 깊게 몸을 묻은 내 입에서는, 격렬한 환호성보다는 짧은 날숨이 휘파람처럼 길게 뿜어져 나왔다.

“후우….”

눈두덩을 비비던 두 손이 이마를 타고 올라와, 앞 머리칼을 쓸어올리고서야 느껴지는 빛줄기.

그 환한 불빛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한 걸음. 정상에 깃발을 꽂아 넣기까지, 단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된다고.

그리고, 이런 내 기분을 맞춰 주기라도 하듯, 모니터 화면 속 성북동 상왕은 내게 말 한마디를 건네었다.

-먼저, 세계 최고 현금 부자가 된 걸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고 싶군.

“뭐, 감사합니다. 곧 국고로 들어갈 현금이지만요.”

-그게 다 서한만 유전 독점권과 북한 지역의 다른 권리들로 바뀌지 않는가. 한 회장, 자네한테 결코 손해는 아닐 테지.

하기야, 이득이면 이득이지, 절대 손해는 아니다.

조금 시간은 걸릴 테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탄약그룹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검은 황금이 매 순간 쏟아져 나올 테니까.

-이런,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안 되겠군.

그렇게 내가 무어라 화답하려는데, 갑자기 당황하는 기색이 서린 모습의 성북동 상왕.

그의 뒷배경으로 서 있던 수많은 정부 각료들 또한, 갑작스럽게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정상에 깃발을 꽂기 바로 직전인 지금, 거대한 돌부리 하나가 그 앞을 가로막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님이라도 오신 겁니까?”

-뭐, 손님은 맞기는 한데. 일단 내 손님은 아닐세. 한 회장, 자네 손님이지.

갑자기 찾아온 손님.

지지직, 화면이 전환되는 것인지, 잠시 버벅대는 모니터.

곧바로, 거대한 돌부리의 존재를 알릴 그 손님의 정체가 화면 아래쪽 작은 창에 비추어졌다.

-바로 연결해 줌세. 러시아 뿌틴 대통령 핫라인을 말이야.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옥좌에 앉은, 신(新) 러시아 제국 차르의 모습이.

* * * *

-약속은 지키겠다. 칸(Хан) 은행에 예치된 자금,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한국으로 빼낼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일 처리와 은근히 호의적인 태도까지.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는 뿌틴 대통령의 모습에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았으니까.

-당연히 감사해야겠지. 그 자금, 군침을 질질 흘리고 손을 뻗으려는 아랫것들 몇 명을 몽둥이로 두들겨 팼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행여나 있을 아랫사람들의 횡령 또한 제법 신경을 썼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패셨을 것 같긴 합니다.”

-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마땅히 다리뼈를 분지르는 게 당연한 것인데.

단순히 비유적 표현이 아닌, 실천하는 폭력이 뒤따른 것 같긴 했지만.

그렇게 한참 좋게 흘러가던 분위기.

“아무튼, 최대한 빠르게 후속 처리를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러나.

-한 달 내로 빼게. 몽둥이질도 여러 번 하면 번거로운 데다가, 핑 주석이 갑자기 자금 반환을 요구하면 골치가 아프니.

“한 달씩이나 걸릴 리가요. 김한소 망명만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뺄 겁니다. 며칠도 안 걸릴 것 같습니다만.”

한 달.

생각보다 길게 주어진 인출 기간.

그렇다고, 뿌틴 대통령이 다른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인출을 못 하게 막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한을 길게 잡았을 뿐이니까.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기류에, 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던 모양이다.

금속제 라이터로 시가에 불을 붙이며, 혀를 끌끌 차는 뿌틴 대통령.

-쯧, 아직 모르나 보군. 하기야, 불과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니.

“무슨…?”

내 반문에 즉답 대신, 딸깍, 마우스 버튼을 몇 번 클릭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모습.

곧바로, 뿌틴 대통령의 얼굴로 가득 찬 화면은 좌측 상단으로 이동해 작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화면 하나를 나머지 빈 공간에 가득 채우면서.

그리고, 그 화면 속에는 영상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에 먼지라도 묻은 듯, 조악한 품질의 영상. 심지어 음향마저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귀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것은 바로.

“핑 주석…?”

핑 주석.

베이징 집무실의 핑 주석의 모습이 담긴… 스파이 캠 영상이었다.

그것도, 이후 펼쳐질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아주 핵심적인 대화 내용이 담긴 영상이.

-국가정보원이었나? 한국 정보부 쪽 책임자 엉덩이에 피멍이 들게 생겼군.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다니.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무표정으로 말을 내뱉는 뿌틴 대통령.

볼 일은 다 보았다는 듯, 무심하게 유리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며, 그가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남겼다.

-한 달일세. 그 안에 해결하도록. 그럼, 이만.

* * * *

영상은 탁했다.

드문드문 버퍼링이 걸리고, 잡음이 거슬릴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온몸의 신경을 이 영상 하나에 집중했다.

단 하나의 실마리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주석 각하.

-아아, 왕룽 외교부장.

핑 주석과 왕룽 외교부장, 두 사람의 모습.

무언가 보고를 올리려는 듯, 왕룽 외교부장은 핑 주석에게 보고서 하나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김한소 건부터입니다.

지지직, 회색빛 주름이 잡힌 영상.

알아듣지 못할 몇 마디 말이 지나가고,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서류를 내던진 핑 주석의 모습.

다시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내 귀에 들리는 것은 그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였다.

-얌전하군. 과할 정도로. 김한소답지 않다.

-이제야 비로소 본인의 처지를 깨달은 것이 아닐지요?

-그럴 리가.

툭, 툭.

목제 탁자를 손가락 끝으로 두들기는 소리.

한참을 그렇게 아무런 말이 없던 핑 주석은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긴 침묵을 깬 핑 주석.

-뒤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나 보군. 김한소 말이다.

-다른 생각… 말입니까?

-유사 이래로 흔히 있는 일이다. 꼭두각시가 제 주인을 갈아치우는 것. 특히나, 다른 주인이 생긴 경우에 그러하지.

갑자기 급하게 뛰기 시작한 내 심장 박동.

붉게 충혈된 눈과 메마른 입은 지금 이 상황이 명백한 위기임을 알리고 있었다.

들킨 걸까?

눈치챈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거미줄처럼 종횡으로 엮이는 바로 그때.

-아무래도 안전장치 하나를 해 두어야겠군.

-주석 각하…?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작스레 주제 하나를 툭 던지는 핑 주석.

곧바로, 그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수를 두기 시작했다.

-북부전구 병력. 압록강 쪽으로 전진배치부터 해 두어야 할 터.

-……!

아주 까다롭고, 또 정면으로 대항하기 힘든 수를.

-중화의 인민해방군이 직접 참전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말하지 않았던가. 안전장치라고.

뚜벅뚜벅.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 바깥으로 사라진 핑 주석.

텅 빈 탁자를 비추는 화면각에서는, 오로지 그의 탁한 목소리만이 중압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쓸 일은 없는 편이 좋을 터지만, 만에 하나라도 부적절한 일이 터진다면.

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이 서늘함이, 아주 스산하게도 느껴질 만큼.

-부득이하게 칼을 뽑아 들 수밖에. 그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 * * *

“난감하게 되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영상 재생이 끝나자마자 나를 용산 벙커로 부른 성북동 상왕.

도무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아다니며, 턱에 손을 올린 채 고민하는 그의 모습.

“이를 어쩐단 말인가. 본래 중국군이 직접 북한 지역에 들어갈 것은 희박하다고 보았으니 말일세.”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경우를 상징하는 동물인, 검은 백조(Black Swan).

지금 그 칠흑 같은 백조는 한반도라는 호수 위에서 모두를 비웃듯, 짠 하고 등장한 상황.

결국, 이 검은 백조를 어떻게든 물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혹시, 양 웬리 부통령이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습니까?”

“주기야 했지. 전혀 쓸모도 없는 언질을.”

힘센 검은 백조를 잡기 위해서라면, 가장 쉬운 방법은 흰 백조가 힘을 써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영 마뜩잖은 태도를 보였다는 양 웬리 부통령.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정규전은 피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희 미합중국의 입장에서는 말이죠.’

그는 일정 이상의 위험은 감수하기 싫다는 의사 표현을 명백히 밝혔다고 한다.

특유의 얄미운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진짜 얄밉네요. 양 웬리.”

“원래 그런 사람이니 말일세. 그리고, 애당초 이번 건은 그자가 쥔 권한을 아득히 초월하는 일일세.”

하기야, 제아무리 부통령직에 있다고 한들, 이인자는 이인자.

결국, 이런 국가의 중대사에 해당하는 일을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일인자인 미국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는.

“어찌할 건가…?”

눈동자에 불안한 기색이 잔뜩 담긴 성북동 상왕.

뭐랄까, 이미 판돈이 너무 커진 상황에서 불리한 패 한 장이 손에 들어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껏 본 적 없는 막대한 칩이 포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상황에서, 어떤 카드를 제시하느냐에 따라 명백히 승패가 갈리는 상황.

그렇기에.

“방법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닙니다.”

결국, 최종 결단을 내리는 자는 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겐가?”

“시도는 해 볼 만한 아이디어는 있습니다.”

심호흡과 함께 몸의 과도한 긴장감을 바깥으로 내뱉어 버린 나.

잠시 찾아온 차분함을 빌어, 나는 천천히 핑 주석의 생각에 자리한 맹점을 짚어내기 시작했다.

“이 정규군 참전 계획. 중국 내에서는 어느 선까지 공유가 되어 있습니까?”

“핑 주석과 왕룽 외교부장. 그리고, 아마 태자당 주요 인물들까지는 암암리에 알고 있다고 하더군.”

“태자당 주요 인물들이 알고 있다라….”

핑 주석과 태자당.

언뜻 보기에 운명 공동체로 단단하게 묶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

그러나, 제아무리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석축(石築)에도 틈은 있는 법이다.

“해 보죠, 어디 한번. 늘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해결책은 존재해 왔으니까.”

“무슨…?”

마치,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주 희미한 틈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북동 상왕. 그런 그에게, 나는 곧바로 가벼운 밑그림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한·중 고위급 회담을 잡아 주십시오. 그 의제로는.”

이야기의 최종 장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지에 대한, 거칠고 투박한 밑그림을.

“북한 지역 안정화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 이 정도 미끼를 던진다면 분명 물고기는 낚싯바늘을 물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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