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안전장치(2)
오성홍기가 그려진 중국 관용 비행기 안.
“드디어 지친 모양이로구먼.”
피식, 우월감에 찬 웃음을 지으며 좌석에 깊게 몸을 묻은 왕룽 외교부장.
잔에 담긴 얼음이 흔들려 달그락거리자, 조금씩 올라오는 위스키 향. 그 묘한 우드 향을 맡으며 그는 만족스럽게 입술을 적시었다.
“하기야, 벌써 몇 달째 전황이 지지부진하니, 남조선 위정자 놈들도 골치가 아플 터.”
장기전으로 접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전황.
조금씩 새어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들.
언뜻 보기에, 남한 정부는 마지막 승리를 목전에 두고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만 같았다.
특히나.
“북조선 망명정부라는 패를 꺼내 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흐흐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북한 망명정부의 존재.
을씨년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뱉는 왕룽 외교부장. 그는 입 안에 머금은 위스키와 함께 목구멍 너머로 착각을 흘려보냈다.
자신이 한반도라는 바둑판 위에 두고 있는 대국이, 실상은 모든 수가 다 읽히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서.
“장관님, 여기 있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팔락, 비서관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받은 왕룽 외교부장.
얼마 전, 비밀리에 한·중 고위급 회담을 요청한 한국 정부.
그 요청과 함께 내민, 간략하게 세부 내역이 요약된 문건에는 이런 제목이 쓰여 있었다.
≪북한 지역 안정화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
해석하기에 따라 여럿으로 갈릴 수 있는 제목.
자신감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왕룽 외교부장에게는, 이 제목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저쪽이 먼저 꼬랑지를 내렸다고.
“우리 쪽 지분을 인정해 줄 테니, 슬슬 휴전하자는 것이겠군. 뭐, 좋다.”
마지막 남은 황금빛 위스키를 전부 목구멍 너머로 털어 넣는 왕룽 외교부장.
독한 알코올 향이 그의 얼굴 위에 홍조를 띄웠다.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는 방심을 곁들인 채로.
“주석 각하께서도 나를 믿고 전권을 주셨으니까, 반드시 성과를 보여야만 하겠군.”
스멀스멀 올라오는 술기운 탓에 긴장했던 몸이 조금 느슨해진 걸까?
잠시 눈을 감고는, 어제 핑 주석과 보고 시간에 있었던 대화를 회상하는 왕룽 외교부장.
모든 보고를 받은 핑 주석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서명을 마치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룽 외교부장, 그대 뜻대로 정하고 오도록.’
‘주, 주석 각하…?’
‘북조선 망명정부. 그 건으로 그대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던가.’
제법 두터운 것처럼 보이는 신뢰 관계.
핑 주석은 묵직한 잉크 냄새가 풍기는 만년필 뚜껑을 닫고는, 하던 말을 연이어 나갔다.
‘북쪽의 망해가는 번국(藩國)을 살려낸 그대다. 남쪽의 번국(藩國) 놈들의 기강을 잡는 일 또한 능히 해낼 수 있을 터.’
툭, 툭.
자리에서 일어나 왕룽 외교부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던 핑 주석.
상당한 신뢰가 담긴 눈으로, 그는 마지막 당부의 말 한마디를 가슴속에 깊이 새겨 주었다.
‘부디 만족할 만한 성과, 그것을 반드시 가지고 오도록.’
만족할 만한 성과.
핑 주석에게 있어 만족할 만한 최소한의 조건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겼던 눈을 뜨고는 혼잣말로 그 조건 내용을 읊조리기 시작하는 왕룽 외교부장.
“서한만 유전 포기.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철수 후 신(新) 북조선 정부 수립 인정. 그리고.”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묵직하기 그지없는 조건들.
마치 넘쳐흐르는 탐욕의 배출구라도 된 양, 한번 열린 그의 입은 좀처럼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大) 중화의 새로운 대양… 아니, 저치들은 감히 동해라고 하는 바다로의 진출 보장까지.”
튀어나온 욕망만큼 거대한 이권을 그의 목구멍 너머로 흘려보내기 전까지는.
“이거, 어쩌면 본래 백두혈통 김가 놈들이 다스리던 때보다, 대(大) 중화에게 있어서는 훨씬 더 이익이겠군.”
비행기 창문 아래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인천공항의 모습.
중국에서 한국까지의 비행은 오늘따라 유독 순탄하기 그지없었다.
난기류 하나 없이, 바람 한 점 없이, 꽃길처럼 화창한 날이었다.
마치… 왕룽 외교부장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깔아 놓은 것이라 착각이 들 만큼.
물론, 그 카펫 아래에는.
“도착했습니다. 바로 서울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남조선은 처음 오는군.”
그가 생각지도 못할 날카로운 창살이 빼곡하게 박혀 있겠지만.
“소박하군. 아니, 초라하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어. 음…?”
외교관 전용 게이트를 통해 천천히 걸어 나가는 왕룽 외교부장.
길게 늘어진 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인천공항 면세점 광고판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언가 불길하기 그지없는, 이전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물.
그것은 바로.
“천사 가면…?”
“아아, 그 요새 탄약 생활 건강에서 새로 내놓은 화장품 브랜드라고 합니다.”
가시 면류관을 이마에 두른, 철제 천사 가면.
북한을 망하게 했던, 그리고 왕룽 외교부장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그 가면은 스산하게도 웃음 짓고 있었다.
“하하… 여편네가 출장 갔다 오는 길에 꼭 좀 사 오라고 어찌나 들들 볶던지, 골치가 아파 죽겠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을 정성스레 포장하는, 선의라도 된 것처럼.
“이거야 원, 첫인상부터 재수도 없군. 물론 그래 봐야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지만.”
솟아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르는 왕룽 외교부장.
그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며, 이 불편한 직감에 합리화를 끼얹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는 공직에서 물러난 일개 기업인. 그저 끈 떨어진 연에 불과할 것이다.”
천사 가면.
이전 같은 어처구니없던 상황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출발하자! 내 오늘 가소로운 소국의 버르장머리를 똑똑히 고쳐 주겠다!”
* * * *
북한 망명정부 본부가 있는 개마고원.
“위원장 동지.”
“거, 참. 곁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지 않았습네까.”
칼바람이 불어오는 매서운 환경 속. 당장이라도 창틀을 뚫고 실내로 들이닥칠 것만 같은 눈보라.
“어차피 벗어던질 꼭두각시 감투이니 말입네다.”
김한소는 이 시간이 좋았다.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
김한소 곁에서 비서관을 자처하는 이는, 국정원 소속 정보 요원이었다.
당장이라도 지시가 떨어지면, 그를 빼 올 능력이 있는.
“혹시 염려되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염려? 내가 말입네까? 뭣 때문에?”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질문 하나를 던지는 국정원 정보 요원.
“핑 주석이 북부전구를 움직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미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그것 말입네다.”
약간의 망설임을 곁들인 채로, 김한소가 대답했다.
“걱정이 안 된다면… 그거이 거짓부렁일 테고. 두려움으로 가슴팍이 솔찬히 떨리기는 합네다. 그런디 말이요.”
그리고, 그 망설임의 외피 안, 깊숙한 씨앗 부분에는 확신이 있었다.
단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던 한 사람에 대한 확신이.
“내래 마카오에서 노름꾼 흉내를 냈던 걸 생각해 비유해 보자면.”
도박 중독자 연기를 해야 했기에 그의 집무실 안에는 이런저런 도박 도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딸그락, 룰렛 위에 주사위를 던지는 김한소.
“판돈을 전부 끌어다 올인(All In)하고자 한다면, 내래 한서준 회장 쪽에 걸갔시오.”
탁, 탁, 탁, 탁한 소리와 함께 룰렛 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주사위의 모습.
“적어도 손모가지 이상을 걸고 벌이는 노름판에서는 그자를 이길 도리가 없어 보이니 말이지비.”
은은한 음악에 맞추어 추던 주사위의 춤사위는 금방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행운의 숫자, 룰렛 위 7의 자리 위에 멈춰 선 채로.
“그리고, 내래 사실 여기서 걸었던 칩을 뺄 수도 없습네다. 그저 믿고 가는 것 말고 방법이 없는 셈이요.”
올인(All In).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건다.
김한소의 의지를 확인한 국정원 정보 요원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사람 보는 눈이 일찍 트이셨군요.”
“어쩌다 보니… 팔자에도 없게 그래 되었습네다.”
“그럼, 위원장 동지. 아니, 김한소 씨의 의사는 확인했으니,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두리번두리번. 집무실 바깥에 다른 듣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국정원 정보 요원.
방금 전보다 한층 더 진지해진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탈출 및 망명 작전까지, 남은 D-Day는 총 10일. 정확히 10일 후 토요일 새벽에 결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 말인즉슨… 답을 찾았단 말이겠군. 한서준 회장이 말이요.”
* * * *
나는 답을 찾았다.
“한 회장님, 오셨습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이곳 용산 벙커 안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는커녕, 오히려 가벼울 정도였으니까.
“먼저들 와 계셨네요. 제가 조금 늦었나 봅니다.”
벙커 최심부, 안쪽의 작은 방.
원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이곳에는, 나 외에 다섯 사람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외교부 장관, 최 대통령, 성북동 상왕. 이렇게 다섯 명이.
“우리 같은 영감들이 미리미리 와 있어야 하는 법이지. 본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니 말이야. 그리고.”
나를 반기며 턱 끝으로 나머지 네 사람을 가리키는 성북동 상왕.
“여기 이 친구들 설득하는 시간도 필요했고 말이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국정원장.
“한 회장님.”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제까지 늘 그래왔지만, 이번 일은 특히나 위험하다는 것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요.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를 구성하는 사람들… 전부 하나같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중국과의 전쟁으로 번지는 것은 막아야만 한다고.”
역시나, 언쟁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들의 얼굴에는 오전부터 유독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었으니까.
“하지만.”
단호한 한마디 말과 함께, 내 쪽을 향해 내민 손.
“동시에, 이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는 것. 그것 또한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마주 잡은 내 손을 꼭 움켜쥐고는, 국정원장이 고개를 숙였다.
당부의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부디, 저희가 올라탄 한 회장님이라는 호랑이의 등.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반드시 보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 모양이었다.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다섯 사람.
그리고, 나는.
“고개 숙이실 필요 없습니다. 기왕 올라타셨으면, 앞을 똑바로 보셔야죠.”
이들의 기대에 마땅히 부응할 만한, 그런 계책을 가지고 이곳에 섰다.
“이제부터 정말 빠르게 달릴 거거든요. 막판 속도를 빠르게 올려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국내 진입을 시도조차 못 하게 만들, 그런 계책을.
“상대방이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 그리고 이 선택이 옳게 된 선택이었다는 증거를 눈에 꼭 담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뚜벅뚜벅,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아무래도, 왕룽 외교부장이 조금 일찍 도착한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원탁 자리에 앉으며, 나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못다 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