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안전장치(3)
베이징, 중난하이.
1층 중앙홀에서 계단으로 향하는 복도.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인 지금. 투명한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햇빛은 구리로 된 현판에 내려앉았다.
[七上八下]
가만히 선 채, 현판에 새겨진 그 문구를 바라보는 핑 주석.
보좌진도 따로 떼 놓은 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글귀에 적힌 뜻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칠상팔하(七上八下). 정말이지, 어지간히들 싸웠나 보군.”
예순일곱까지는 권력을 누리다가, 예순여덟이 되는 순간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원칙.
수십 년의 피바람 끝에 만들어진, 칠상팔하(七上八下)라는 합의.
“아예 권좌에 오래 앉지 못하게 강제할 정도라니. 내부 투쟁 하나는 질리도록 했다는 것인가.”
이제껏 그 누구도 이 원칙을 어긴 이는 없었다. 제아무리 절대 권력을 쥔 자일지라도.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달라야 할 것이다, 반드시.”
뚜벅뚜벅,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한쪽 벽에 줄지어 선 역대 주석의 초상화를 눈에 담는 핑 주석.
가장 먼저, 초대 주석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신(新)중국의 토대를 쌓아 올린 개척자.”
뒤이은 2대, 3대 주석의 초상화.
“토사구팽당한 꼭두각시. 그리고, 제 후배의 허수아비.”
별 가치가 없다는 듯, 보폭이 넓어진 핑 주석.
하지만, 곧바로 소금 기둥처럼 자리에서 멈춘 그의 모습.
“개혁·개방의 물꼬를 튼 선각자.”
스스로 생각하기에 위대하다 여긴 이의 초상화 앞에서는 제법 긴 시간을 보내는 핑 주석.
4대 주석의 초상화를 머릿속에서 곱씹으며, 그는 다시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하이방의 시조인 늙은이. 그리고, 역대 주석들의 유지를 안정적으로 이은 승계자.”
핑 주석 자신의 전임자 두 사람인 5대, 6대 주석의 초상화.
아직도 살아있는 이 두 사람은, 뒷방 늙은이가 되었을지언정 핑 주석의 정적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표정을 찌푸린 핑 주석.
그는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액자 속 사진의 인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본래라면 자리에서 물러난 이를 위해 마련된 공간인 이곳에, 반쯤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걸어둔 액자.
“그리고… 나.”
역대 주석들의 것과는 달리 유달리 크고 화려한 액자.
뿌리 박힌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춘 핑 주석은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액자가 들어설, 텅 빈 벽체.
그 공간에는 앞으로도 액자가 들어설 것이었다. 뒤를 이어 중화 대륙을 통치할 이의 모습이 담긴 액자가.
하지만.
“나머지 공간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무판자로 막아버린, 그리고 앞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을 세워둔 벽체.
앞으로 뒤를 이을 차기 주석의 자리를 짓누르는 그 장식품은, 다름 아닌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중국 지도였다.
“위업이 필요할 터.”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가려 꿈틀거리는,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그려진 지도.
남쪽으로 향한 핑 주석의 눈. 그는 아쉬운 듯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대만, 홍콩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건만, 약간 순서가 어그러졌군.”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는 그의 시선. 홍콩부터 시작된 둥글게 튀어나온 아랫배 모양의 지형은, 상하이를 거쳐 툭 튀어나온 산둥반도를 향했다.
그러고는, 힐끔 황해 너머 한반도를 바라보는 핑 주석.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였던가? 그 조선 놈들 속담이.”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만이 가득 찬 공허한 공간 속.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뎅그렁거리는 괘종시계의 알림음이 있고 나서야 장고를 거둔 핑 주석.
“정말 말 그대로 서울부터 가게 생겼군.”
괘종시계로 눈을 돌리니 어느덧 저녁 여섯 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
예상했던 것을 훌쩍 넘긴 시간.
핑 주석은 다시 한반도가 그려진 지도로 눈을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리인으로 보낸 왕룽 외교부장, 그가 돌아오는 길에 두 손 가득 들고 올 전리품을 한껏 기대하며.
“논의가 길어지는 모양이로군. 과연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
* * * *
그 시각.
“……!”
용산 벙커 가장 안쪽, 원탁이 놓인 방 안으로 들어선 왕룽 외교부장.
다소 어두운 조명, 착 내려앉은 분위기.
놀라움이 가득 서린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분명, 한국의 외교·안보 수뇌부가 모여 있을 이곳 방 안.
그러나, 원탁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있으면 안 될 사람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심이 없는 둥그런 원탁임에도, 명백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그자는 바로.
‘한서준! 이 불길한 작자가 어째서 여기에…?’
순간, 왕룽 외교부장의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섬찟한 불안감.
꿀렁거리는 목젖이 몇 차례나 위아래를 오가는 시간, 그는 이 수상한 현실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분명 민주평통 부의장 직책도 없는, 끈 떨어진 연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연차 내뱉은 심호흡. 왕룽 외교부장은 머릿속으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며 시선을 돌렸다.
‘침착해야 한다. 일단 저쪽에 나온 인선은.’
원탁에 앉은, 여섯 명의 사내들.
최 대통령, 성북동 상왕, 국정원장,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그리고.
“앉으시죠. 그렇게 계속 서 계실 생각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려둔 채, 왕룽 외교부장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 남자.
‘한서준….’
갯벌 위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밀물처럼, 그는 왕룽 외교부장에게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그리 오래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퍽 불쾌한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내뱉은 왕룽 외교부장.
“상황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 말입니다.”
의자를 길게 끌어 뺀 그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논할 주제는 중한데, 영 어울리지 않는 분께서 앉아계시니, 잠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툭, 툭.
긴장감을 애써 감추려는 듯, 연신 탁자 끄트머리를 두들기는 왕룽 외교부장.
간신히 심장 고동이 진정되자,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다그치며 생각했다.
‘상관없다. 그저 꺼림칙한 장식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꺼림칙한 장식품.
분명,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리라.
그저 단순히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기 위한, 일종의 소품 같은 것이라고.
그렇기에, 그는 이런 얕아 보이는 수에 넘어갈 생각은 없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과할 정도의 무례함을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고삐에서 벗어나려는 번국(藩國)에게 본국(本國)이 회초리를 드는 입장이니, 바로 본론부터 꺼내겠습니다.”
허공 위에 펼쳐 든 네 개의 손가락. 하나하나의 손가락이 접힘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요구 조항이 하나씩 나열되기 시작되었다.
“첫째, 청천강-함흥 선 이북에서 물러날 것. 둘째, 해당 지역에 들어설 신(新) 북조선 정부 수립을 인정할 것.”
“허어… 그 무슨 망령된 소리를!”
이마에 핏줄이 솟아 격노를 터트리려는 국정원장.
그러나, 물에 젖은 화약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다 잠잠해지는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로 화를 식히는 모습.
그 때문일까? 방금보다 한층 더 기세등등해진 채로 요구조건을 늘어놓는 왕룽 외교부장.
“셋째, 동해 항구 가운데 한 개, 아니, 두 개 이상을 99년간 할양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침내 접힌, 네 번째 손가락.
아까 전 세 개의 조항을 늘어놓았을 때보다 훨씬 더 눈이 벌게진 왕룽 외교부장.
그의 시야는 탐욕의 뿌연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 어떤 판단을 하든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서한만 유전에 대한, 개발권과 채굴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대(大) 중화에게 일임할 것. 이상입니다.”
“…….”
아무런 말이 없는, 원탁 위 한국 측 수뇌부.
그 침묵을 공포에 질린 것이라 받아들인 왕룽 외교부장이 기세등등해진 모습으로 협박조의 말을 계속해 나갔다.
“이 네 가지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서릿발 같은 회초리가 이 작은 나라에 매섭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북부전구의 인민해방군.
그 강대한 전력이 앞으로 어떤 짓을 벌일지를 폭압적으로 암시하며.
“수십 년이 지나도 낫지 않을, 시뻘건 상처가 종아리에 죽죽 그어질 정도로.”
* * * *
왕룽 외교부장의 콧대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높아 보였다.
처음 이곳 벙커 안으로 들어왔을 때의 긴장감은 벌써 사라진 것인지, 잔뜩 기세등등한 그의 모습.
“그게 다입니까?”
자신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 남자.
물론, 어떻게 보면 실제로 꽃놀이패를 들고 있는 셈이기는 하다.
중국 인민해방군 북부전구와의 전면전은 그야말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고속열차를 타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그러나.
“뭐, 골자는 이렇습니다. 사소한 것들이야 실무진들에게 조율케 할 것이고.”
그 스스로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꽃놀이패. 그 완벽해 보이는 패에, 보이지 않는 맹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맹점은… 왕룽 외교부장, 그가 속한 태자당 일파 전체가 만들어 낸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그렇군요. 일단 그쪽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당연히 잘 알아들어야겠지요. 애당초 남조선 측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아예 쐐기를 박으려는 듯, 추가적인 요구까지 늘어놓을 심산인 왕룽 외교부장.
더 들을 필요도 없다. 더 들을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내가 손에 쥔 패 하나만으로, 그가 그토록 자랑스레 여기는 북부전구는 절름발이 신세가 될 테니까.
“잠시만요.”
“무슨…?”
한쪽 손을 들어 왕룽 외교부장의 추가 발언을 제지한 나.
당황해하는 그의 표정 따위 개의치 않은 채, 나는 곧바로 옆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도 더 들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바지사장일지언정 이 나라의 국가원수인 최 대통령을 향해서.
“최 대통령님.”
“아, 예. 한 회장님.”
그리고, 내가 손에 쥔 패는.
“태워버리세요.”
“네…?”
성냥.
빨간 머리를 바둑판 위에 그으면 곧바로 불꽃이 피어오르는 성냥이었다.
“그, 저… 뭘 태우라는 겁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태자당 일파의 자산 상당액이 투자된 북한 망명정부 채권.
그 채권의 담보인 서한만 유전 바로 위에서 나는 불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서한만 유전. 그 안쪽에 미사일을 처박든 뭘 하든 그냥 태워버리잔 말입니다.”
“회, 회장님…?”
어쩌면 나 스스로까지 타 죽을 수 있는, 그러나 상대방 역시 곧바로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 불장난을.
“이게, 이게 무슨 짓이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어차피 먹지도 못할 떡 아닙니까. 서한만 유전.”
조금씩 높아지는 왕룽 외교부장의 목청.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높아지는 내 패에 대한 확신.
“그러면 남들도 못 먹게 해야지요. 아예 시원하게 불을 싸질러버릴까 합니다.”
원탁 앞으로 몸을 기울인 나는 웃음 지은 채로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성냥불처럼 일렁거리는 눈동자로 왕룽 외교부장을 바라보며.
“태자당이 투자한 채권 금액도 같이 활활 날아가 버리게끔.”